11화
#2. 풋사랑
며칠 후, 점심 무렵.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침대에 붙어 있게 된 김에 같이 주판 공부를 복습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상냥한 선생님은 아니지만, 꽤 실력 좋은 선생님이었다.
“569-192?”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낸 문제를 주판으로 열심히 계산했다.
“음, 367?”
그러자 리하르트가 말없이 주판알하나를 움직였다.
엘리사는 그제야 자신이 틀렸음을 알아채고 정정했다.
“377!”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녀가 곧장 들어와 아뢰었다.
“아르덴 백작 각하와 영식께서 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들은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묘하게 경계심이 어린 눈이었다.
“그들이 왜?”
“작은 마님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해서, 각하께서 작은 마님과 두 분의 식사를 주선하셨습니다.”
“아르덴?”
엘리사는 그들이 누군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낮선 이름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리하르트가 대답했다.
“안셀 아르덴.”
엘리사는 그제야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었는지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사냥터에서 크리스티안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그럼 바로 단장해 드릴까요, 마님?”
“응.”
엘리사는 주판을 두고 일어났다.
그때,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팔을 붙잡았다.
“같이 가.”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얼굴에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픈 애가 가긴 어딜 가려고? 넌 방에서 쉬어. 손님맞이는 내가 할게.”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뒤로한 채 하녀들과 함께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리하르트는 그 뒷모습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곧이어 드레스룸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의 말소리, 부스럭거리는 옷감 소리 등등.
리하르트의 시선은 책에 꽂혀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읽히지 않았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하녀들과 엘리사가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그 인기척을 느낀 리하르트가 책에 박고 있던 시선을 들어 슬쩍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과 하늘색 드레스가 제법 잘 어울렸다.
“마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하녀들은 엘리사를 화장대에 앉혔다. 그리고 장신구함에서 이것저것 꺼내 엘리사에게 대 보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책장 너머로 그 모습을 흘긋거렸다.
그 시선을 알아챈 하녀들이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리하르트 님이 보시기에도 마님이 예쁘시죠?”
그 물음에 리하르트는 미간을 팍구기며 대답했다.
“정신 사나워서 책에 집중이 안 되잖아. 밖에서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며.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그냥 대충하고 나가지 그래?”
“하지만 손님을 잠옷 차림으로 맞이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잖아.”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입을 꾹다물었다.
그러고는 책을 덮고 아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잠이라도 잘듯한 모양새였다.
머리띠와 코사지, 공단 리본 등을 대어 보던 엘리사는 군청색 공단 리본으로 머리를 반만 묶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다녀올게, 리하르트.”
엘리사가 방을 나서기 전, 리하르트에게 인사를 했으나 리하르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새 잠들었나?’
엘리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을 나갔다. 하녀들도 일제히 따라 나갔다.
리하르트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이불을 걷었다.
이윽고 리하르트의 점심 식사를 든 하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별생각 없이 방으로 들어오다가, 리하르트의 표정을 보고 흠칫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서늘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왜인지 평소보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럼…… 맛있게 드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하인은 베드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식사를 차려 두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리하르트는 다친 왼쪽 어깨는 두고 오른팔로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식사를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습기가 찬 수프그릇 바닥 때문에 그릇이 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 때는 엘리사가 같이 식사하며 그릇을 잡아 줬기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편했다.
리하르트는 오기로 수프를 바닥까지 비웠다. 한 손으로 하는 식사는 당연히, 평소 식사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식사를 마친 리하르트는 방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불렀다.
“브라이언.”
하인은 곧장 들어와 식기를 정리했다. 그 모습을 뚱하니 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엘리사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식사만 하고 오는 거 아니었나?”
“예?”
하인은 황당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작은 마님이 나가신 지 아직 30분도 안 지났는데요……?”
손님을 모신 오찬이면 통상적으로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제야 시계를 확인한 리하르트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
“엘리사. 아르덴 영식에게 온실을 구경시켜 줘라.”
식사를 마친 알버트가 빈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말은 백작과 둘이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안셀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라는 뜻이었다.
그에 아르덴 백작이 맞장구쳤다.
“그게 좋겠다, 안셀. 듣기로 루벨린 공작가의 온실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진귀한 이국의 식물들도 많고 말이야.”
“루벨린 소공작 부인만 괜찮으시다면….”
“당연히 괜찮죠.”
엘리사는 머뭇거리는 안셀에게 당연하다는 듯 화답했다. 안셀은 엘리 사를 순순히 따라나섰다.
뒤뜰 한편엔 거대한 온실이 지어져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예쁘고 신기한 꽃들과 함께 고운 빛깔의 작은 새들이 재잘거리며 두 사람을 반겼다.
“우와.”
안셀은 두리번거리며 엘리사의 뒤를 따랐다.
온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온실의 중앙에 위치한 티 테이블이 보였다. 그 위에 하인들이 미리 준비해 둔 주스와 디저트가 있었다.
“앉자.”
엘리사는 먼저 의자에 앉았다.
안셀은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반말에 흠칫했다가, 조용히 의자를 끌어내 자리에 앉았다. 그 모양새가 퍽이나 조심스러웠다.
“자.”
엘리사는 주스 한 잔을 안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제 몫의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안셀은 주스를 마시지 않고 쭈뼛거리다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곱게 접은 손수건 두 장이었다.
하나는 엘리사가 안셀에게 포도 주스를 닦으라며 줬던 손수건이었고, 하나는 꽤 값비싸 보이는 새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은 열심히 빨아 봤는데, 포도 물이 들어서 잘 빠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다른 손수건을 마련했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아. 손수건이야 얼마든지 많은걸.”
“그리고……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셀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엘리사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깍듯한 감사에 머쓱해진 엘리사는 괜스레 주스를 벌컥 들이켜곤 말을 돌렸다.
“뭐, 나야 당연한 일을 한 거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걔네가 나쁜 거지. 안 그래?”
안셀은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황태자의 편이 아닌,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멋지다…….’
안셀의 눈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엘리사가 그 누구보다 강하고 멋져 보였다.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던 엘리사는 청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저를 쳐다보는 안셀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넌 존댓말 써? 그냥 말 편하게 해.”
“아, 네! 아, 아니. 응.”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안셀은 문득 생각난 듯,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안셀이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은 말린 꽃을 얇은 나무판에 붙여 만든 압화 책갈피였다.
“이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준비한 거……야.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루벨린 소공작 부인에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오, 예쁘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으응.”
엘리사는 안셀의 손재주와 센스에 감탄했다. 값비싼 선물이라면 받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고마워, 잘 쓸게. 근데 있지, 난 비싸고 반짝거리는 것도 좋아해.”
“어?”
“다음엔 걱정하지 말고 네 마음껏 준비해도 된다는 뜻이야.”
이혼 대비 자금은 많이 모아 둘수록 좋으니까. 후후.
엘리사는 음흉한 생각을 하며 히죽거렸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왜인지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한 리하르트가 서서 엘리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리하르트? 쉬라니까 왜 왔어?”
“손님이 오셨는데 누워만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리하르트는 엘리사와 안셀의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으로 셋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서늘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리하르트 때문에 눈치를 살피던 안셀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저, 그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내 아내를 도와준 걸 왜 네게 감사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리하르트의 대꾸에 엘리사는 기함했다. 상대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그, 그렇죠. 그래도 덕분에 저도 상황을 모면했으니까요.”
머쓱해진 안셀은 시선을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말을 해도 꼭……!’
그 모습을 본 엘리사가 그런 리하르트를 흘겨보며 옆구리를 쿡 찔렀으나, 그는 도리어 그 손을 붙잡으며 차단했다.
엘리사는 잡힌 손을 빼내며 리하르트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리하르트가 테이블에 엎어지며 중얼거렸다.
“……어지러워.”
살짝 찡그린 리하르트의 얼굴을 보자, 그를 흘겨보던 엘리사의 눈매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막상 아프다고 하니 얄밉던 마음이 사라지고, 걱정이 앞섰다.
“그러게 방에서 쉬라니까.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쉬어.”
“데려다줘.”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붉은 눈이 엘리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도움을 갈구하는 듯한 그 눈동자를, 엘리사는 어쩐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 알았어. 데려다줄게.”
엘리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리하르트를 부축했다.
“안셀, 우린 먼저 올라가 볼게. 먼저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 더 구경하고 싶으면 더 구경해도 돼. 하인 이 곧 올 테니 안내받으면 될 거야.”
엘리사를 따라 일어나는 리하르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쳤으나, 그 미소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잠시만.”
안셀은 안주머니에서 또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며칠 후에 우리 저택에서 연회가 열리는데, 네가 와 주면 기쁠 것 같아.”
아르덴 백작가의 인장이 찍힌 연회초대장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