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2화 (12/164)

12화

“리하르트, 약 먹어.”

자기 전, 목욕을 마치고 온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 컵에 담긴 약을 건넸다.

마침 약을 들고 오던 앤으로부터 건네받은 약이었다.

리하르트는 푸르죽죽한 액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거 안 먹어도 금방 나아.”

“써서 먹기 싫으니까 그러지?”

엘리사는 제 서랍에 넣어 둔 유리 병에서 과일 맛 사탕을 꺼내 건넸다.

“자. 마시고 이거 먹어. 내가 아껴둔 건데 특별히 줄게.”

마치 약 먹기 싫어하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행동이었다.

리하르트는 무어라 반박하려다, 체념한 듯 물약을 마셨다. 그리고 엘리사가 준 사탕을 도로 돌려주었다.

마치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반박하듯이.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말도 잘 듣고 착하네, 남편.”

뚱하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남편이란 말에 조금 풀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표정을 굳혔다.

“너, 그 연회에 갈 거야?”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말하는 ‘연회’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가, 침대 협탁 옆에 놓인 안셀의 초대장을 보고 기억해 냈다.

“가야지. 공작님도 그러길 바라는 눈치였어.”

아르덴 백작과 안셀이 돌아간 후, 알버트는 엘리사를 저녁 식사 자리에 불렀다. 리하르트는 왼팔을 쓸 수 없었기에 식사 자리에 합석하진 못했다.

알버트는 처음으로 엘리사를 칭찬했다.

‘아르덴 영식을 도와준 건 잘했다.’

아르덴 백작 영지는 동쪽 바다를 끼고 있어 동대륙과 무역이 활발하고, 그로 인해 구하기 어려운 물자를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 친분을 쌓아두면 이득이 될 이들이다.

“그렇군요.”

‘살다 보면 둘 중 하나는 적으로 둬야만 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오지. 그때, 누굴 적으로 돌리고 누굴아군으로 두는 게 네게 득이 될지 잘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번처럼.’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도 철저히 득과 실을 따지며 계획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가히 아렌시아 최고의 권력 가다운 생각이었다.

엘리사는 그가 리하르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안셀이랑 친분을 쌓아 두면 좋을 것 같아.”

사람의 쓰임을 따지는 건 알버트와 같아 찝찝하지만, 엘리사에겐 안셀이 가진 조건들이 꽤 솔깃했다.

‘구하기 어려운 물자들을 보다 싼가격에 구매해서 유통하며 사업할 수 있을 테고, 바닷가 근처에 작은 별장을 지을 만한 땅도 싸게 얻을 수 있을지도.’

물론 아직은 8년 후라는 먼 미래의 이야기였지만, 계획은 미리 다져 둘수록 좋았다.

그런 이유로 엘리사는 아르덴 백작가의 초대에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런 결정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걔랑 친하게 지내지 마.”

그 말에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엘리 사의 눈매가 게슴츠레해졌다.

“리하르트, 친구를 그렇게 이유 없이 미워하고 그러면 안 돼.”

“뭐?”

“안셀이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님 황태자랑 틀어진 게 걔잘못인 것 같아서 그래?”

리하르트는 기가 막혀 입만 열었다 다물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크리스티안과 같은 부류라고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 네가 내 편이 되어 준다고………!”

반박하려던 리하르트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엘리사의 눈을 보고 도로 입을 닫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저 눈에 대고 혼자 유치하게 네 편, 내 편 가르고 있자니 자존심이 퍽 상했다.

“됐어. 잠이나 자.”

리하르트는 한숨과 함께 말을 삼키고 먼저 침대에 누워 엘리사를 등졌다.

‘내 편?’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의 등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아르덴 백작가의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연회에는 알버트와 리하르트도 동행하기로 했다.

‘오기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마차 안에서 엘리사는 제 옆자리에 앉은 리하르트를 힐긋 보았다.

안셀을 탐탁지 않아 하더니 의외였다.

물론 표정은 늘 그랬듯 무심했지만,이윽고 세 사람이 탄 마차 두 대가 아르덴 백작저 앞에서 멈춰 섰다. 아르덴의 기사들은 능숙하게 마차 문을 열었다.

리하르트가 먼저 내리고, 엘리사가 뒤따라 내리려는데 먼저 내린 리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엘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리하르트가 손을 더 가까이 내밀며 말했다.

“에스코트.”

“아.”

엘리사는 그제야 그 손의 의미를 깨닫고 리하르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제 손을 감싼 온기는 어색했지만, 제법 든든했다. 처음으로 참석하는 연회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엘리사는 알버트의 뒤를 따라 리하르트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홀은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많다…….’

손님뿐이랴. 수많은 손님만큼이나 맛있는 음식들과 반짝반짝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으로 가득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알버트와 엘리사, 리하르트를 발견한 아르덴 백작은 다른 손님을 맞이하다 말고 허둥지둥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 뒤엔 안셀과 아르덴 백작 부인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벨린 공작 각하.

귀한 걸음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일을 축하하네, 백작.”

알버트와 인사를 나누는 아르덴 백작의 뒤로, 주위에 있던 다른 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의 관심은 알버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근래에 자주 뵈니 더 반가운 마음입니다. 공작 각하. 내달엔 저희 저택에서 연회가 열리는데, 괜찮으시다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겠습니까?”

“어머나, 저 아가씨가 손주며느님이군요. 귀여워라. 소공작님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귀여운 손주며 느님까지 보셨으니, 공작님께서도 마음이 든든하시겠어요.”

알버트에게 잘 보이려는 이들의 관심은 자연히 리하르트와 엘리사에게도 흘러갔다. 사냥터에서의 형식적이던 인사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엘리사는 그들의 반응이 왜 달라졌는지 알아챘다.

‘리하르트의 힘을 보고 굽신거리는 거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알버트의 의도가 정확히 먹힌 셈이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엘리사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잠시 후, 연회 홀이 손님들로 가득차자 아르덴 백작이 연회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모두 이 자리를 빛내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자리이니 마음껏, 아낌없이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아르덴 백작의 감사 인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었다.

인사가 끝나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백작가의 하녀가 엘리사와 리하르트에게 다가왔다.

“두 분, 별채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와 함께 백작저의 별채로 향했다.

통상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다과회는 어른들의 연회와는 다른 장소에서 열렸다.

귀족들은 아이들이 연회 중앙을 마구 뛰어다니는 것이 격 떨어지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소를 분리한 덕분에 어른들은 마음껏 어른들의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았다.

‘쿠키 냄새!’

하녀를 따라 별채 앞에 도착한 엘리사는 갓 구운 쿠키 냄새를 맡고 눈을 반짝였다.

별채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그곳엔 먹음직한 다과들과 먼저 도착한 귀족 아이들 여럿이 있었다.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안으로 들어서는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보고는 조용해졌다.

싸한 분위기를 깬 건 이 다과회의 주최자인 안셀이었다.

“어서 와, 엘리사. 그리고…… 소공작님.”

“초대해 줘서 고마워, 안셀.”

안셀과 더 이야기할 틈도 없이 다른 귀족 아이들이 별채에 도착했다.

안셀이 손님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연회 홀한쪽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다른 아이들은 서로 삼삼오오 모여있었지만,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근처엔 오지 않았다. 이따금 이쪽을 흘금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엘리사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사냥터에서의 일 때문이구나.’

크리스티안의 명령에 복종하고, 크리스티안이 웃으면 웃기지 않아도 억지로 따라 웃던 아이들.

이 연회에 크리스티안이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크리스티안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뭐, 상관없지.’

엘리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우정이라면, 또한 권력에 따라 이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으니.

‘아, 심심해……….’

한참을 얌전히 서서 자리를 지키던 엘리사는 근처 테이블에서 쿠키를 발견하고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는 제 입으로, 다른 하나는 리하르트의 입에 가져다 댔다.

“단 건 안 좋…….”

리하르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입에 쿠키를 쏙 집어넣었다.

“그래도 내가 준 거니까 맛있지?”

엘리사가 히죽 웃으며 묻자, 리하르트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얌전히 먹었다.

그 이후로도 리하르트는 건네는 쿠키를 곧잘 받아먹었다.

테이블과 리하르트의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쿠키를 먹던 엘리사는 문득 발의 통증을 느끼고 우뚝 멈춰섰다.

‘발꿈치가 까졌나.’

새 구두를 신었더니 발뒤꿈치가 점점 더 쓰라려 왔다.

주위를 살피던 엘리사는 자리를 잠시 뜨기로 했다.

그것을 눈치챈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보았다.

“어디 가?”

“쉿. 숙녀한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야.”

엘리사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리하르트의 시선을 뒤로한 채 복도로 나왔다.

음악과 말소리가 가득한 연회 홀과 달리 복도는 고요했다.

엘리사는 근처 발코니로 나오자마자 구두를 훌렁 벗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뒤꿈치가 까져 빨갛게 변해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백작가의 하녀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잠깐 동안만이라도 신으실 실내용 슬리퍼라도 구해 볼까요?”

“그래 줄래?”

하녀는 금방 돌아오겠다며 발코니를 나갔다.

혼자 남겨진 엘리사는 발코니에서 보이는 백작저 정원을 구경했다.

‘예쁘다.’

공작저의 정원도 예뻤지만, 백작저의 정원도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특히나 램프의 조명이 더해지니 분위기가 한층 더해졌다.

고요한 풍경 속에 바람 소리만 울리던 그때였다.

“로제, 황태자 전하께선 오늘 왜 안 오신 거야?”

“아버지께 여쭈어봤는데, 며칠 전부터 많이 편찮으시대.”

복도 쪽에서 아이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복도는 고요했기에, 아이들의 크지 않은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본의 아니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크리스티안이 많이 아프다고? 사냥터에서만 해도 그렇게 멀쩡하던 애가?’

걔가 벌써 죽을 애는 아닌데.

원작에서 크리스티안은 남주인 리온이 열 살이 될 무렵까지 살아 있었다고 나온다. 그러니 벌써 죽을리는 없었다.

크리스티안에 대해 생각하는데, 아이들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엘리사는 자연히 귀를 기울였다.

“혹시 걔 때문에 충격받으셔서 그런 거 아니야?”

“누구?”

“리하르트 말이야. 사냥터에서 황태자 전하께 그런 짓을 했잖아. 반쪽짜리 귀족이라도 챙겨 줬더니, 감히 황태자 전하께 대들고.”

“반쪽짜리 귀족?”

“걔네 엄마가 창부라잖아. 몸 파는 여자. 공작가에 들어오기 전까지 길바닥을 구르던 애였으니 알 만하지.

예의도 모르고.”

“맞아, 길드 용병이었대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거긴 멍청하고 무식하게 힘만 센 사람들이 모이는 곳 이랬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사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저것들이 남의 남편을………!’

내 남편은 까도 내가 깐다고!

엘리사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두런거리던 아이들의 말소 리가 뚝 멎었다. 아이들은 적잖이 당황한 눈으로 엘리사를 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런 아이들을 서늘한 눈으로 가만히 주시하다 휙 돌아섰다.

그때였다.

“얘, 괴물 남편이랑 사니 기분이 어때?”

한 아이가 묻자, 얼어 있던 다른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잠시 그대로 멈춰 있던 엘리사는 걸음을 돌려 아이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이들은 그 기세에 흠칫했다. 마주한 엘리사의 눈에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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