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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3화 (13/164)

13화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엘리사는 저보다 큰 아이들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좋아.”

“뭐?”

“리하르트랑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잖아. 좋다고.”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엘리사의 반응에 당황해 주춤하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엘리사가 반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볼래. 너희는 이런 저질스러운 대화가 재밌어? 당사자 없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비웃고 씹으며 떠드는 게?”

“뭐, 저질? 우리가 뭐 없는 얘기 했니? 전부 다 사실이잖아. 걔가 창부의 자식인 것도, 용병 출신인 것도!”

“그래? 너희 대화가 그렇게 떳떳하면 저기 어른들 앞에서도 얘기해 보지 그래?”

귀족 중에는 황제파였다가 사냥터에서의 일로 루벨린으로 기울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이 아이들의 부모 중 몇몇도 이미 알버트에게 줄을 서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황제파라고 한들, 루벨린을 전면적으로 적대할 수 있는 귀족은 제국 내에 아무도 없었다.

“너, 사냥터에서 봤을 때도 알았지만 되게 건방지구나.”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은발의 소녀가 말했다. 조금 전, 로제라고 불렸던 아이였다.

엘리사는 로제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의 부인이자, 남주의 계모지.’

현재 크리스티안의 약혼녀일 테니, 아마 저 아이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 격일 터였다.

엘리사의 예상대로 다른 아이 하나가 로제를 보호하듯 나섰다.

“얘, 네가 얼마 전까지 로엔그린 촌뜨기로 있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로제는 펠리스 후작가의 영애야. 장차 이 제국을 통치하실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고. 예의를 갖춰!”

“그래서?”

“그래서라니?”

“어쨌든 아직 로제 펠리스잖아. 나는 엘리사 루벨린이고.”

엘리사는 일부러 ‘펠리스’와 ‘루벨린’에 악센트를 넣어 말했다. 그러고는 로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쪽이 누군지 모르겠나요? 로제 펠리스 영애.”

엘리사의 기세에 눌린 아이들과 로제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아이들을 빤히 보던 엘리사는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선 엘리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뒤늦게 눈치챈 엘리사는 제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때, 등 뒤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한 핏줄을 이은 반쪽짜리 귀족을 남편으로 뒀다고 으스대기는!”

그로도 모자라 무어라 더 덧붙이려던 아이들은 순간, 엘리사의 앞을 보고 놀라 말을 멈췄다.

그대로 아이들을 뒤로한 채 걸어가려던 엘리사 역시 한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우뚝 멈춰 섰다.

“………리하르트?”

바로 앞에, 예의 서늘한 눈을 한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 벌레들에게 잡혀 있었군.”

리하르트는 경멸 어린 눈으로 아이들을 노려보며 다가와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가자.”

아이들은 엘리사를 면전에서 비웃을 때와 달리, 리하르트를 차마 비웃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네들을 ‘벌레’라고 칭하는데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데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잡힌 엘리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자 짜증이 치밀었다.

‘간도 작으면서.’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쥐며 말했다.

“앞으론 나서지 말고 그냥 무시해.

어차피 헛소리니까.”

“싫어.”

엘리사는 그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리하르트도 멈춰 섰다.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엘리사가 말을 이었다.

“바위에 떨어지는 낙숫물이 당장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단단하던 바위도 패. 패고, 패다, 결국 부서지지.”

“…….”

“그러니까 싫어.”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목소리와 눈동자에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그때 말했잖아. 내가, 네 편이 되어 주겠다고.”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덮고 살아가지 말라고.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싸움을 못 하는 애가, 아니 몸을 떨 정도로 두려워하는 애가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그러니까, 내 편이 아무도 없을 땐 너도 내 편이 되어 줘야 한다는 뜻이야. 나한테 나쁜 말 하는 사람들, 네가 그 바람으로 다 날려 줘야 한다고. 알았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리하르트는 언제 몸을 떨었냐는 듯 강단 있게 말하는 엘리사를 바라보다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엘리사의 걸음걸이가 절뚝거리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고는 엘리사에게 제 등을 내밀었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 등짝을 쳐다보았다.

“업혀.”

“어?”

“발, 아프잖아.”

“괜찮은데….”

하지만 거절의 말에도 리하르트는 등을 내민 채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등에 업혔다.

혹시라도 무거워서 리하르트가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리하르트는 크게 힘든 기색 없이 능숙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저가 오빠라고, 이럴 땐 든든하네.’

늘 사춘기 동생처럼 여겨지던 리하르트가 오늘은 조금 어른스러워 보였다. 동시에 어느새 제법 넓어진 등과 닿아 있는 따뜻한 온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팔.”

“응?”

“팔, 목에 감으라고. 떨어져도 난 몰라.”

엘리사는 황급히 리하르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자 맞닿은 온기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에 리하르트의 입꼬리가 씩 올라 갔지만, 엘리사는 보지 못했다.

달빛 아래, 봄밤의 부드러운 바람이 두 아이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

연회가 끝나고,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정말 봄이네.”

도서관으로 향하던 길, 어느덧 연둣빛 녹음이 가득한 창문을 본 엘리 사가 중얼거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창밖 아래쪽에서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엘리사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루벨린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날이 따뜻해져 모처럼 야외에서 대련을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땀에 젖은 얇은 셔츠를 입었다. 몇몇은 아예 웃통을 벗고 있기도 했다.

가릴 것 하나 없이 드러난 근육질의 몸을 본 엘리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크흠…….”

하지만 고기 냄새에 끌리듯 본능처럼 다시 시선이 갔다.

‘흠흠. 기사단이 어떤 식으로 훈련하는지, 부족한 건 없는지 살피는 것도 안주인의 할 일 아니겠어?’

엘리사는 도서관으로 가려던 계획을 좀 늦추고 기사단의 훈련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기사들이 대련을 시작했다.

이번엔 둘 다 웃통을 시원하게 벗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근육들이 움직이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완연한 성인 남자의 몸이었다.

엘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해?”

“악!”

엘리사는 갑작스러운 리하르트의 등장에 죄라도 지은 아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뜻하지 않은 엘리사의 반응에 놀란건 리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머쓱해진 엘리사는 혹여나 리하르트에게 제 속내를 들킬세라 다급히 답했다.

“수, 수련하는 게 멋있어서 구경하고 있었지. 엄청 멋있다. 나도 배워 보고 싶었는데.”

“배우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는 뜨끔했다.

양심에 찔렸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를 열다섯 살 순수한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너 검술도 잘해?”

엘리사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미간을 좁혔다.

엘리사가 자신의 검술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왜인지 자존심이 상했다.

“…왜 내가 검술을 못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넌 마법사니까 검술은 못할 줄 알았지.”

“내가 마법을 사용하는 건 검술을 못 해서가 아니라 마법이 훨씬 더 효율적이어서야.”

“아하.”

엘리사는 기사들을 훔쳐보던 걸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건성으로 반응했다.

애초에 정말로 검술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어려서 여러 길드를 전전한 리하르트가 검을 잘 다룬다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이따 봐.”

엘리사는 그대로 돌아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리하르트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조금 전까지 엘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서늘히 침잠해 있었다.

*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던 루벨린의 기사 톰슨은 방앞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

“…리하르트 님?”

리하르트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톰슨은 제게 다가오는 리하르트를 보며 긴장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지?’

리하르트가 공작가에 들어온 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이었다.

당시에 리하르트는 가문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기사단의 일에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당연히 기사들과 말을 섞을 일도 없었다.

일개 기사인 톰슨은 더더욱.

그런 리하르트가 숙소까지 찾아오다니.

용건이 있다면 하인을 시켜 불러 그의 방으로 오게 하거나, 기사단장에게 지시를 내리면 되었을 일이다.

그런데 저런 서늘한 얼굴로 직접 온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뭐, 뭔가 내가 심기를 거슬렀나?’

오늘 한 일이라곤, 점심시간 이후에 뒤뜰에서 동료들과 열심히 대련한 것밖에 없는데.

톰슨은 오늘 일과를 다시 곱씹으며 자신이 리하르트의 심기에 거스를 만한 일을 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일 나랑 대련하지. 점심시간 이후 두 시쯤에, 뒤뜰에서.”

“예……?”

난데없이 대전 신청을 받은 톰슨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으나, 리하르트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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