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4화 (14/164)

14화

“저, 리하르트 님. 대련은 언제 시작합니까?”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한 톰슨은 리하르트의 명령대로 뒤뜰로 나와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리하르트가 말했던 두 시가 훌쩍 지나 두 시 반이 되어 가는데도 리하르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고는 간간이 저택의 2층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다려라.”

리하르트의 서늘한 대꾸에 톰슨은 다시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십여 분이 더 흘렀을 때, 2층 창문가에 엘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톰슨을 돌아보며 검을 다잡았다.

“대련, 시작하지.”

톰슨은 리하르트를 마주 보며 자세를 잡고 섰다. 문득 동료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공작을 네 본 실력으로 상대하려고 하지 마. 다들 말로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고 하지만, 지면 기분 상해 하거든. 귀하신 분들일수록 더더욱 그렇지.’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는 건, 자존심 안 상할 정도로 연기만 하다가 적당히 져 달라는 소리야.’

‘그래, 적당히. 제국 어느 가문에 가도 이만한 돈 챙겨 주는 곳은 없으니까 오래 붙어 있자고.’

톰슨은 동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료 기사들은 리하르트가 왜 하필 많고 많은 기사 중에서 톰슨을 대련상대로 꼽았는지 한탄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설픈 검술을 상대하며 최선을 다해 싸우는 척해야 하다니, 톰슨에겐 꽤 힘든 일이 될 터였다.

‘적당히. 적당히 하자고, 상대는 동생뻘이다.’

톰슨은 제 밑으로 달린 동생들의 밥줄을 생각하며 맞은편의 리하르트를 주시했다.

그때, 리하르트가 선제공격을 해왔다.

톰슨은 재빠르게 그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공격했다.

그런데 검에 힘을 실어 리하르트를 누르려는 그 순간, 리하르트의 검이 날쌔게 움직여 그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내고 곧바로 파고들어 와 톰슨의 목으로 향했다.

‘빨라…!’

톰슨은 다급히 뒷걸음질하여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하마터면 목이 베일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리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톰슨에게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본실력대로 상대하지 않으면 다음엔 네 목이 베일 거다.”

리하르트의 실력에 톰슨은 물론, 지켜보던 동료 기사들도 놀라 입을 벌렸다.

‘열다섯 살짜리가 어떻게 저런 실력을……?’

리하르트는 체격이 당연히 성인인 톰슨보다 작지만, 그 체격 차를 어떻게 제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는지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톰슨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내지 않았다. 순수 힘으로 겨룬다면 체격 차에서 밀릴 테니까.

대신 공격을 받으면 충격이 전해지기 전에 빠르게 흘리고, 빠르게 반격했다.

그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유려했다.

전문 훈련을 받은 암살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공작가에 들어오기 전까지 여러 길드를 전전하며 살았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던 건가…….’

리하르트의 속도를 가까스로 따라가며 버거워하던 톰슨은 마침내 검을 놓쳤다.

“큭!”

결국, 날카로운 검이 톰슨의 목에 겨눠지며 리하르트의 승리로 끝이 났다.

톰슨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검을 휘두를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검을 거두어 갔다.

“본 실력이 아니었다면 재대결을 신청해도 좋아.”

“아뇨. 제 실력이 맞습니다.”

톰슨은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내심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대전을 하신 겁니까? 혹시 제가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아니. 그저 기사단의 실력이 궁금했을 뿐이다.”

리하르트는 얼버무리듯 대꾸하고 저택 2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엘리사는 없었다.

*

리하르트와 톰슨의 대련을 구경하던 엘리사는 막 심부름을 다녀온 앤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앤은 둘둘 말린 종이 두루마리를 엘리사의 앞에 내려놓았다.

“부탁하셨던 거예요, 마님.”

엘리사는 앤에게 받은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흡족하게 웃었다. 그 종이는 서대륙 전역을 그린 지도였다.

“고마워. 수고했어. 여기 앉아서 이거 먹어.”

그리고 남겨 두었던 쿠키를 앤에게 밀어 주었다.

앤은 수줍게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 쿠키를 먹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제 몸만 한 거대한 지도를 침대 위에 펼쳤다. 그리고 각 모퉁이에 작은 물건을 내려놓아 고정했다.

그때, 앤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 참. 오늘 광장에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황태자 전하께서 많이 편찮으시대요.”

“아, 그 얘기? 그건 보름 전에도 들었어. 아직도 안 나았대?”

“네. 생각보다 많이 위독하신 것 같더라고요. 광장에서 다들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엘리사는 잠시 황태자의 근황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그래도 아직 죽진 않을 거야.

아직 수명이 남았거든.”

“네……?”

“아무것도 아냐.”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놀란 듯 되묻는 앤에게 별말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쿠키를 다 먹은 앤은 빈 쟁반을 가지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엘리사는 침대에 엎드려 거대한 지도를 훑어보고 있었다.

엘리사의 시선이 제일 먼저 아렌시아 북쪽의 거대한 땅, 루벨린으로 향했다.

“여기가 루벨린이구나…….”

루벨린 공작령은 그 어떤 영지보다 넓었지만, 기온이 낮고 험난한 산지가 많아 토지의 활용도가 낮았다.

게다가 북서쪽으로는 마물로 오염된 땅과 맞닿아 있어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엘리사의 관심이 향한 곳은 현재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제도, 아카로아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리하르트가 들어왔다. 씻고 바로 온 건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왔어?”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엎드려 있는 침대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슬쩍 물었다.

“오늘 뭐 했어?”

“어? 그냥, 뭐……. 도서관에서 책읽었는데?”

그리고?”

엘리사는 자신의 일과를 꼬치꼬치 묻는 리하르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얘가 왜 갑자기 내 일과에 관심을 가지지?’

갑작스러운 관심이 얼떨떨했지만, 엘리사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지도를 보고 있었……. 아, 맞다.”

문득 조금 전에 보았던 리하르트와 톰슨의 대련이 떠올랐다.

“아까 너 대련하는 거 봤어.”

엘리사의 대답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묘한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의도했던 대답이었다.

리하르트는 다음에 이어질 엘리사의 감상을 기대했다.

하지만 칭찬이나 감탄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엘리사의 눈은 걱정으로 물들었다.

“지난번에 다친 상처는? 아직 덜 아물었지 않아? 그렇게 막 움직여도 되는 거야?”

“어?”

“상처 덧난 건 아니겠지? 어디 봐봐.”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곧장 상처를 살필 기세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하니 있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에 붙잡힌 팔을 슬그머니 빼내며 투덜거렸다.

“예전에 다 나았거든?”

“그래도 당분간은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

리하르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엘리사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 듯 잔소리했다.

리하르트는 대답 대신 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숨을 삼켰다.

타들어 가는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엘리사는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리하르트, 아카로아는 살기에 어때? 기후나 사람들 성격 같은 거.”

엘리사가 묻자, 리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지못해 지도를 보며 대답했다.

“원래 제도는 그 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선점해. 아카로 아가 괜히 제도로 선택된 게 아니지. 넓은 평야, 큰 강이 흘러서 비옥한 땅, 강을 타고 가면 바닷길로도 이어지니까.”

“아하……. 아, 참. 그 지역 음식도 중요한데. 맛있는 건 많아?”

“그런 건 몰라. 음식은 그냥 먹는 거지.”

지도를 대충 훑어본 리하르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 듯 물었다.

“그런데 이건 알아서 뭐 하게?”

“나중에 어디서 살지 미리 봐 두는 거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 공작가를 떠나겠다고 했잖아.”

엘리사의 말에 감겨 있던 리하르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잊고 있던 미래의 약속을 떠올리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엘리사가 ‘그리고 알아 두면 다른 영지와 교류할 때도 좋을 것 같아서.‘라며 덧붙였지만, 그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리하르트는 초조한 눈으로 엘리사에게 물었다.

“나중에 어디서 살고 싶은데?”

그렇게 묻는 리하르트의 눈이 집요하게 지도를 훑었다.

그 시선을 알 리 없는 엘리사는 지도를 쭉 훑어보다가 동쪽 항구 근처를 가리켰다.

아르덴 백작령과 가까운 곳으로, 엘리사의 친정인 로엔그린 자작가의 별장이 있던 곳이라고 들었다.

그 별장은 지금은 자작이 생전에진 빚을 갚느라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지만, 언젠가는 한번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자신이 빙의한 ‘엘리 사 로엔그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여기? 남쪽은 너무 더울 것 같고, 북쪽은 너무 추워.”

“소르네티.”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손가락으로 짚은 지역을 기억에 새겼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이.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도를 보던 엘리사의 머리가 갑자기 푹 엎어졌다.

리하르트가 흠칫 놀라 엘리사를 돌아보자,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

리하르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잠든 엘리사를 쳐다보다, 똑바로 돌려 눕혔다.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지도를 걷어 내 치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리사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입술에 머리카락이 붙은 줄도 모르고.

“…많이 자야 많이 크겠지.”

리하르트가 보기에 엘리사는 조금 더 클 필요가 있었다.

아르덴 백작가에서의 연회 때, 저보다 큰 아이들 앞에서 홀로 맞서던 엘리사의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작고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그래도 절대 안 졌지만.’

그 모습이 가소롭게 느껴지기보다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입술에 붙은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조그만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의 손끝도 멈췄다.

잠시 굳어 있던 리하르트는 손끝에 작은 바람을 모아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러자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말간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만족한 듯 다시 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으응.….”

그때, 엘리사의 웅얼거림과 함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데굴데굴 굴러 거리를 좁혀 온 이는 리하르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

리하르트는 어이없다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팔 한쪽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제는 익숙했다.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 온기에서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길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