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읽으며 졸고 있던 엘리사는 갑작스러운 말 울음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누구지?”
엘리사는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다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에서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엘리사는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는 알버트의 집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를 쫓아갔다.
남자는 많이 다급했던지, 집무실 문을 채 닫지 않았다. 그 틈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 각하, 어제저녁경에 서쪽 변경에서 파이란 왕국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라고?”
“예. 하여, 폐하께서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갑자기 전쟁이라니.
엘리사의 눈이 초점을 잃고 깜빡거렸다.
집무실 안에서 황명을 읽는 기사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로암 카이로트는 루벨린에 형제의 맹약을 이행할 것을 명하니, 소공작 리하르트 루벨린은 그 맹세를 받들어 아렌시아 제국을 수호하라.”
엘리사는 그 황명을 듣고서야 알아챘다. 내내 멀쩡하던 크리스티안이 왜 갑자기 병상에 앓아누웠는지.
아니, 왜 아픈 ‘척’을 했는지.
사냥터 사건 이후 루벨린 공작에게로 모여들던 귀족들, 그쯤부터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크리스티안, 그리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쟁까지.
모든 단서의 아귀가 딱딱 맞아 들었다.
황제는 루벨린 공작가로 힘이 쏠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그 힘의원천은 사냥터에서 리하르트가 보여준 루벨린의 능력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킬 요량으로 크리스티안이 아프다는 소식을 퍼트린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황태자와 황자는 반드시 전쟁에 나가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줘야 할 의무가 있지만, 병상에 누운 환자를 전장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황제는 전쟁을 빌미로 리하르트를 죽일 생각인 거야.’
살려 두면 장차 황가에 방해가 될 존재이기 때문에.
알버트 역시 황제의 의도를 알아채고 격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 기어이 루벨린의 피를 말리려 는구나!”
파이란 왕국은 아렌시아의 서쪽 국경과 맞닿은 나라로, 본디 유랑 도적들이 모여 이룬 국가였다.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파이란의 도적 떼들은 아렌시아 제국민들을 자주 약탈해 갔다. 그 때문에 파이란과 아렌시아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황제는 이참에 골칫거리 두 가지를 정리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괜찮아. 리하르트는 이 전쟁에서 죽지 않으니까.”
원작에 따르면 그는 멀쩡히 살아돌아와 하네스의 아빠가 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게 불편하지…….’
엘리사는 기사가 집무실에서 나오기 전에 돌아섰다.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이 저택 로비로 향했다.
그렇게 저택 로비에 도착했을 때.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몬스터 토벌에 나갔던 리하르트가 들어오고 있었다.
몬스터의 것으로 보이는 혈흔이 묻은 로브를 입은 리하르트의 눈은 늘 그랬듯 무심했다. 하지만 엘리사에게는 굉장히 지친 모습으로 보였다.
생기라곤 없는 메마른 눈동자에 빛이 깃든 건, 눈앞의 엘리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엘리사는 깨달았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아니잖아. 괜찮은 게 아니잖아….’
적이든 아군이든, 수많은 생명을 거두고 시체를 넘어서는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저 애를 그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그를 그저 체스 말 중 하나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험난한 운명을 슬퍼해 줄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러워 눈물이 났다.
“엘리사?”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리하르트의 앞에서, 엘리사는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
아무리 루벨린이라 하더라도 황명은 거역할 수 없다.
당장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현재의 루벨린은 깔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지만, 후계가 불안정한 상태이기에 반역을 일으킬 힘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알버트는 그 화살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둘 다 오늘 밤부터 후계자 생산에 힘쓰도록 해라.”
그의 말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싫습니다.”
“후계자의 의무가 어디 좋고 싫고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더냐? 그 자리에 앉았으면 마땅히 네가 해야 할 의무를 해.”
“각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제가 후 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죠.”
리하르트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엘리사를 데리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네놈이 죽으면!”
엘리사는 처음 들어 보는 격앙된 알버트의 목소리가 리하르트와 엘리 사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엘리사는 그런 알버트를 돌아보았지만, 리하르트는 그대로 등 돌린채 서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알버트는 한층 억누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 죽으면 이 루벨린은 어찌해? 황제가 루벨린을 흡수하고, 껍데기는 루벨린의 힘도 이어받지 못한 방계가 이어받겠지. 이 이름도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
“내가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히며 지켜 낸 가문인데.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그렇게는 안 되고말고.”
리하르트의 조부는 손자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손자의 죽음으로써 자신이 한평생 지키고 키워 온 가문의 몰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 속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면전에서 들으니 더욱 비참해졌다.
리하르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리하르트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알버트를 돌아보았다. 알버트를 바라보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하르트는 짓씹듯 내뱉었다.
“죽지 않을 겁니다.”
“…….”
“죽음의 문턱까지 가더라도 몇 번이고, 어떻게든 그 문턱을 넘고 넘어……… 살아남을 겁니다.”
“절대로, 루벨린이 그렇게 무너지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내 손으로 망가트릴 거니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
리하르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엘리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각하께서 명하신 대로 할게요.”
예상외로 순순한 대답에 굳어져 있던 알버트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리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엘리사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 나가 봐도 되죠?”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알버트의 집무실을 나온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뭐라고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바쁘게 사라졌다.
그 후, 엘리사를 보지 못한 채 밤이 되었다.
목욕을 마친 리하르트는 찝찝한 마음으로 방문 앞에 섰다.
‘엘리사,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리하르트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먼저 씻고 온 엘리사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에 들어오는 리하르트를 본 엘리 사는 고개를 슬쩍 들더니, 제 옆자리를 팡팡 치며 리하르트를 불렀다.
“나 오늘 피곤하니까 얼른 자자.”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리하르트가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자, 엘리사는 벌떡 일어나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안 잡아먹는다고 약속했잖아. 이리 와.”
리하르트는 기가 막혔지만, 일단은 엘리사의 말을 따라 침대로 갔다.
엘리사는 옆에 앉은 리하르트에게 무언가를 내보였다.
“짠! 이거 뭐게?”
검은색의 작은 약병이었다.
리하르트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뭔데?”
“닭 피야. 이걸 뿌리면 얼추 피처럼 보인대.”
“닭 피?”
“일단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깨서 이걸 침대 시트에 뿌리자. 이렇게 하면 네가 떠날 때까진 공작 각하도 조용히 있을 거야.”
리하르트는 그제야 엘리사가 낮에 어딜 갔었는지 알아챘다.
엘리사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제법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처음은 그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말고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
“왜?”
“어? 그야… 사랑하는 사람이랑은 모든 소중한 순간을 나누고 싶으니까?”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을 멀뚱히 마주 보던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머쓱함을 느끼고 시선을 피했다.
매사에 무심하던 그 눈이 어쩐지 평소와 달리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짙어져 있었다.
“그, 그럼 이제 자자!”
엘리사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리하르트도 엘리사를 따라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한 방에 잠든 엘리사의 숨소리가 울렸다.
엘리사는 당연한 수순처럼 데굴데 굴 굴러와 리하르트의 팔에 착 붙었다.
리하르트는 아예 몸을 틀어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엘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는 리하르트에겐 너무도 낯선 단어였다.
받아 본 적이 없어 당연히 베풀어 본 적도 없는 감정.
모친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시절에 죽었고, 외숙은 그저 공작가에 돈을 뜯어내겠다는 일념으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며 키웠다.
아버지란 존재는 저를 한 번 찾지도 않았으며, 조부는 자신의 존재를 알자마자 죽이려 했다.
그런 게 너무나 당연한 삶을 살아왔는데.
어느 날, 눈앞의 소녀가 나타났다.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자신의 편이 되어 주고, 자신을 위해 싸워 주고,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 유일한 사람.
사랑이란 감정이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내 유일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잠든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조심스럽게 그 온기를 안았다. 난생처음으로 품에 안아 본 누군가의 온기는 따뜻했고, 포근했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리하르트의 눈이 이내 스르륵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