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리하르트의 출정일은 황명이 내려온 날로부터 한 달 후로 잡혔다.
통상적으로 출정 준비에 할당되는 시간보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황제는 한시가 급하다는 핑계를 대며 출정일을 급박하게 잡았다.
리하르트는 출정을 대비해 혹독한 수련에 돌입했다.
리하르트의 능력은 공작저 내부의 수련장에서 사용하기엔 파괴력이 컸다.
그래서 치안을 살필 겸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제도 변방의 숲이 수련장으로 채택되었다.
리하르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숲으로 갔다가,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엘리사는 자기 전이나 아침에 잠깐 리하르트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잠들어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공작저로 돌아온 리하르트를 집사 그레이슨이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리하르트 님.”
외출용 로브에 묻은 몬스터들의 피와 지친 듯한 리하르트의 표정은 그가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했는지 증명했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더러운 로브를 건네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욕실엔 미리 덥혀 둔 목욕물이 있었다. 리하르트는 목욕 시중을 받는 걸 싫어했기에 하인들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옷을 벗자, 멍들고 긁힌 크고 작은 상처들이 드러났다.
물이 닿으면 쓰릴 법도 하건만 리하르트는 내내 무신경한 표정으로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왔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던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보고 알은 체했다.
“잘 다녀왔어, 리하르트?”
“응.”
“바로 잘 거지? 잘 거면 불 좀 꺼줘.”
엘리사는 읽고 있던 책을 곧장 덮었다.
리하르트는 근처 테이블 위에 놓인 발광석에 다가갔다. 그리고 덮개를 덮어 불을 끄려던 그때였다.
“잠깐만!”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엘리사가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아 소매를 걷었다. 반쯤 가려져 있던 긁힌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흠칫 놀란 리하르트는 잡힌 팔을 빼려 했지만, 엘리사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뭐야?”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이렇게 많이 긁혔는데. 아프지도 않아?”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팔을 질질 끌고 화장대로 다가갔다.
리하르트는 마지못해 그 손에 끌려 갔다.
화장대 서랍을 뒤적거리던 엘리사는 어렵지 않게 연고가 든 케이스를 찾아냈다.
그리고 상처에 연고를 골고루 펴 발라 주며 구시렁거렸다.
“미련하다, 미련해.”
“…..”
리하르트는 가느다랗고 조그만 손가락이 제 팔 위를 지나다니는 것이 간지러웠지만, 그 손길이 싫지는 않았기에 꾹 참았다.
연고를 다 바른 엘리사는 케이스를 닫으려다 말고 리하르트의 등을 확걷었다.
불시에 불쑥 등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등에도 상처 있을 거 아냐. 연고 바르자.”
“여, 여긴 됐어. 그냥-”
“어허, 가만히 있어.”
당황한 리하르트가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엘리사의 손길을 피했으나, 이번만큼은 엘리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등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붉어진 리하르트의 귀 끝을 보지 못한 채 옷을 걷었다.
그러자 크고 작은 멍들이 선명히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엘리사의미간이 찡그려졌다.
엘리사는 화장대 서랍에서 멍을 빼는 연고를 찾아 리하르트의 등에 바르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내일은 조금 빨리 돌아오면 안 돼? 저녁 먹기 전에.”
“왜?”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 나 아직 저택을 다 못 둘러봤거든. 북쪽 별채도 가 보고 싶은데, 거긴 하인들은 못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혼자 가긴 좀 무서워서….”
루벨린 공작저에는 뒤뜰의 정원을 중심으로 총 세 개의 별채가 있었다.
사용인들이 기거하는 동쪽 별채와 기사들이 기거하는 서쪽 별채.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쪽 별채는 오직 루벨린의 이름을 이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노력해 볼게.”
연고를 다 바른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옷을 다시 내려 주며 말했다.
“난 네가 너무 무리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전쟁을 앞두고 두려운 마음은 이해 하지만, 출정하기도 전에 무리를 해서 오히려 악효과가 날까 걱정이 되었다.
리하르트는 걱정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를 빤히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러 가자.”
*
밤하늘을 배경으로, 두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리하르트는 이를 악물고 기사단장의 공격을 막아섰으나, 숨 돌릴 틈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리하르트의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 검을 잡고 있는 팔에서도 힘이 빠져 가는 게 보일 정도였으나, 리하르트는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맞닿은 검 너머로 리하르트의 기색을 살피던 기사단장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이 상태로 계속하면 분명 다치실 겁니다.”
“………아직입니다.”
그 틈을 탄 리하르트가 기사단장를 공격했다.
기사단장은 그 공격을 받아 냄과 동시에 틈을 파고들어 리하르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역습이었다.
“평소의 리하르트 님이라면 피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제게 들이밀린 검을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는 기사단장의 검을 손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한 번 더 하죠.”
“그 한 번 더가 벌써 열 번쨈니다.”
기사단장은 다시 검을 다잡으며 덤벼들 준비를 하는 상대에게 발을 걸었다.
“큭…….”
리하르트는 검으로 땅을 짚으며 맥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더 할 수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다리에 일어날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검을 짚은 팔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훈련도 좋지만, 떠나기도 전에 체력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대비해야죠.”
“…….”
“떠나기 나을 전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셔야 합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검을 꺾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잠시 쉬었다 하지.”
겨우 훈련을 중단하고 돌아가나 기대했던 루벨린의 기사들은 리하르트의 말을 듣고 기함했다.
근방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폭풍의 힘을 단련한 리하르트는 불가피한 근접전에 대비해 검술 훈련까지하고 있었다.
검술 실력이야, 톰슨과 대련할 때부터 기사들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실력보다 정신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게 인간의 정신력인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진 혹독한 훈련에 체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저렇게나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정신력이라니.
혀를 내두르는 기사들 틈을 헤치고 불쑥 튀어나온 톰슨은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리하르트에게 다가갔다.
“목 좀 축이세요.”
리하르트는 톰슨이 건네는 가죽 물병을 받아 물을 마셨다.
톰슨은 그런 리하르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수련하시는 겁니까?”
물을 마시고 잠시 숨을 고르던 리하르트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살고 싶으니까.”
어려서부터 죽음과 가까이서 자라 온 리하르트는 죽음이 두려웠다.
하지만 죽음이 무서워서 살아남은 것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으로 살고 싶어졌다.
살아 돌아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살아남아 지켜 주고픈 사람이 생겼다.
“모두가 그렇지 않나?”
“모두가 그렇죠.”
리하르트의 물음에 톰슨은 수긍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출정을 앞둔 기사 대부분은 훈련보다는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죽지 않더라도, 얼마나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할지 기약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소공께서도 너무 훈련에만 목매지 마시고 공작 각하와 식사라도…….”
불현듯 톰슨의 목소리 위로, 엘리 사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리하르트, 내일은 조금 빨리 돌아오면 안 돼? 저녁 먹기 전에.’
잠자코 톰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하르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에 정신이 팔려 엘리사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톰슨은 흠칫 놀라 하던 말을 멈추고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지.”
“네?”
훈련 좀 적당히 하고 놀고 싶다는 제 속내를 리하르트가 꾸짖진 않을지 조마조마하던 톰슨은 뜻밖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저 공작저로 돌아가겠다.”
리하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톰슨을 뒤로한 채 근처에 매어 놓았던 제 말에 올라탔다.
시간은 이미 밤 열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엘리사는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리하르트는 서둘러 공작저로 향했다.
*
공작저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욕실 대신 곧장 침실로 향했다.
“엘리 -”
침실로 들어서며 엘리사를 부르려던 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 잠들어 있는 엘리사가 보였다. 그런데 침대가 아닌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저를 기다리다가 잠든 모양새였다.
리하르트는 계단을 뛰어 올라오느라 가빠진 숨소리를 죽이며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케이크?’
엘리사의 앞 테이블에 조그마한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엔 작은 카드가 있었다.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와 카드를 번갈아 보다 카드를 집어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