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카드를 펼치자, 동글동글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생일 축하해.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그제야 잊고 있던 자신의 생일이 떠올랐다.
일주일 전, 생일은 어떻게 하겠냐는 집사의 물음에 전쟁을 앞두고 파티를 하고 싶지 않다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저조차도 잊어버린 제 생일을 기억하고 저를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출정을 앞둔 기사 대부분은 훈련보다는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
죽지 않더라도, 얼마나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할지 기약할 수 없으니까요.’
케이크 옆엔 손바닥보다 작은 소형 오르골도 놓여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소중히 감싸 쥐었다.
당장 살아남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홀히 했다.
어쩌면, 이 시간이 너와의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르는데.
“…..”
리하르트는 오르골을 두고 잠든 엘리사를 안아 들었다. 그 인기척을 느낀 엘리사가 눈을 떴다.
“..…리하르트?”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웅얼거리던 엘리사는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것인지 번쩍 눈을 떴다.
“맞다, 생일! 아직 열두 시 안 지났지?”
리하르트는 바둥거리는 엘리사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오늘 내 생일 아니야.”
“어? 그레이슨이 오늘이라고 했는 데….”
“내 생일은 나도 몰라. 그냥 임의로 정한 거지.”
외숙부는 군식구인 리하르트의 생일을 챙겨 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리하르트는 자연히 생일을 모른 채 자랐다. 생일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젠 의미가 생겼다.
“일단 자고 내일 정해, 내 생일.”
“내가 정하라고? 그래도 돼?”
“귀찮으면 그냥 내일로 정하고.”
“아, 안 돼.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인데 좋은 날로 정해야지!”
엘리사는 생일을 아무렇게나 정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리하르트는 길일을 찾아봐야겠다며 조잘거리는 엘리사를 뒤로한 채 욕실로 향하려다, 무언가 생각난 듯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내일 별채 구경시켜 줄게.”
침실 한쪽의 책장에서 길일에 관한 책을 찾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말에 놀라 돌아보았다.
“내일은 훈련 안 해도 돼?”
“쉴 거야.”
그 대답을 들은 작고 하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반색이 차올랐다.
돌아서는 리하르트의 입가에 피식,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리하르트의 출정이 바로 다음 날로 다가왔다.
그날 밤, 엘리사는 침실로 들어서는 리하르트에게 기다렸다는 듯 달려갔다.
“리하르트!”
반색을 띠며 달려오는 엘리사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까이 다가온 엘리사가 제 목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리하르트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굳어 있던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안아 주려는 순간,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서 떨어졌다.
정작 리하르트에게 불을 지핀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히죽웃으며 물었다.
“어때?”
“뭐?”
“펜던트 말이야.”
“아.”
리하르트는 그제야 엘리사가 제 목에 펜던트를 걸었음을 깨달았다. 제목엔 붉은색 작은 보석이 박힌 펜던 트가 걸려 있었다.
갈 곳 잃은 팔이 스르륵 내려갔다.
“이게 뭔데?”
“마스코트. 이 보석이 불운을 다 먹어서 주인의 불운을 막아 준대.
그러니까 절대 빼지 마.”
원작에서도 사지 멀쩡히 돌아왔으니 당연히 살아남겠지만, 그래도 떠나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아 준비한 것이었다.
‘네가 살아야 너도 좋고 나도 어른이 될 때까지 공작가에서 안 쫓겨나니까!’
리하르트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붉은색 보석이 그의 눈동자와도 잘 어울려 퍽 흡족했다.
“그럼 어서 자자. 내일 아침에 일찍 깨야 하잖아.”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곧장 침대에 누웠다.
“내일 배웅해 줄 테니까 꼭 깨워.
알았지?”
짧아도 앞으로 한두 해는 못 볼것이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못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는 꼭 하고 싶었다.
“알았어.”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대답을 듣자마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꿈속을 헤매던 엘리사는 어렴풋한 목소리를 들었다.
“……안녕, 엘리사.”
익숙하지만, 어쩐지 그리운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좀처럼 잠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엘리사는 한참 꿈속을 헤매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느덧 새벽 여명으로 가득 차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리하르트가 베던 베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 어디에도 베개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리하르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덮어 준 이불이 흘러내렸다.
멍하니 텅 빈 방을 훑어보던 엘리 사는 제 옆에 있던 베개를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 베개에선 매일 밤, 제가 찾아들던 체향이 났다.
*
리하르트가 떠난 후,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아침 식사를 마친 엘리사는 알버트의 부름을 받고 단장을 하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서 초여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어?”
장식함에서 엘리사에게 꽂아 줄 머리 장식을 찾고 있던 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을 본 엘리사가 물었다.
“왜 그러니, 앤?”
“분홍색 꽃이 달린 머리 장식이 사라졌어요.”
“그래? 다른 데 뒀나 보지.”
“다른 데 뒀을 리가 없는데…이따가 다시 한번 찾아 볼게요.”
엘리사는 공단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방을 나섰다.
알버트의 집무실로 향하는 엘리사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버트가 개별적으로 부르는 경우엔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일이 없었으니까.
오늘도 그럴 조짐이었다.
문 앞에 도착한 엘리사가 노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엘리사는 문을 열기 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독한 궐련의 냄새가 콧속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서늘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알버트와 잘 어울리는 냄새였다.
마침 집무실에 있던 알버트의 보좌관 애런이 엘리사를 보고 자리를 피했다.
알버트는 언제나 그랬듯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냈다.
“며칠 전 펠리스 후작 영애가 주관하는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엘리사는 그 한마디만으로 알버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황제의 탄신일을 며칠 앞두고, 얼마 전부터 유품이 돌아오고 있었다.
리하르트와 제국군이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전사한 자들의 유품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돌아온 유품들을 보고 이번 전쟁이 제국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기게 됐다.
그러자 황실 사냥터에서의 습격 이후 루벨린을 기웃거리던 귀족들이 다시 황제 측으로 몰려갔다.
훈련을 받은 정식 기사들과 병사들도 저리 쉽게 죽어 나가는 전쟁이다.
제아무리 가문의 힘을 이어받았다 해도 고작 열다섯 살 소년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탓에 근래 알버트의 기분은 내내 저조했다.
그러던 차에 엘리사가 티파티에 불참했으니, 가뜩이나 가문의 위신을 중히 여기는 그의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리라.
엘리사는 차분히 설명했다.
“재무 수업이 있었습니다. 제 쪽에서 이미 한 번 날을 미룬 것이라, 또 한 번 미루기가 죄송했어요.”
“그깟 수업 때문에 티파티에 빠졌단 말이냐?”
“선약이기도 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제 간의 도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의 대답에 알버트는 혀를 찼다.
“우매한 것. 두 가지의 일이 겹치면 일의 경중을 따져 선택했어야지.
네겐 가문의 위신보다 그깟 학문이 더 중요하더냐? 고작 계집인 네가?”
그 말은 곧, 여자아이가 공부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성별을 운운하는 알버트의 말에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면, 일의 경중을 알면서도 일부러 피한 것이냐? 그들이 너를 우롱할까 두려워서?”
정곡을 찔린 엘리사는 내심 뜨끔했다.
사실 그 티파티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를 티파티에 초대한 로제 펠리스는 황태자 크리스티안의 약혼녀이자, 아르덴 백작저의 연회 때 말다툼을 했던 아이였다.
로제는 리하르트가 있을 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을 티파티에 초대하지 않더니, 리하르트가 출정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티파티에 초대했다.
그 의도는 뻔했다.
‘리하르트가 떠나고 입지가 불안해진 나를 까 내리려는 목적이었겠지.’
그러던 차에 마침 수업이 티파티에 불참할 핑계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럴수록 네가 가서 루벨린이 건재함을 보여 줬어야지! 어찌 루벨린의 이름을 달고 그딴 버러지들이 루벨린은 겁쟁이라 수군거리도록 내버려 둔단 말이냐?”
“덜떨어진 이들을 상대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번성한 루벨린을 그들의 눈에 보여주는 것이 실질적으로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알버트의 눈을 올곧게 마주하며 대답했다.
마주한 붉은색 눈동자에 노기가 어려 있었으나, 엘리사는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이 덧붙였다.
“말로만 세운 위신은 그저 허울뿐인 것이니까요.”
허울뿐인 위신에 집착하는 알버트를 꼬집는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