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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8화 (18/164)

18화

알버트는 겁도 없이 자신의 허점을 찌르는 엘리사를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맹랑한 것.”

하지만 말과는 달리, 노기가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기분은 언짢지만, 엘리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싸늘했다.

“네 건방을 봐주는 건 이번 한 번이다.”

“…….”

“수업을 듣는 뭘 하든 상관없지만, 두 번 다시는 가문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라.”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땐 수업을 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엘리사는 눈을 내리깔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나가 봐.”

엘리사는 돌아서 집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역시 남의 집에서 군식구로 사는 건 힘드네.’

리하르트가 출정한 후, 알버트는 물론이고 앤을 제외한 가문의 사람들이 엘리사를 대하는 태도가 알게 모르게 시큰둥해졌다.

애초에 리하르트의 신부로 공작가에 들어왔으니, 리하르트가 없으면 남이 되는 셈이었다.

‘내 입지를 다지려면 내가 리하르트의 신부 외의 다른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엘리사가 재무 수업을 열심히 듣고, 부지런히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읽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엘리사는 평소처럼 도서관으로 향했다.

침실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었지만, 침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마음도 나태해지는 기분이라 일부러 도서관에서 책을 읽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책은 방에 두고 온 책이랑 같이 읽어야 좋을 거 같은데.’

엘리사는 읽을 책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문이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던 건지, 조용히 열렸다.

그때, 살짝 열린 문틈으로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거 빨리 주머니에 넣어.”

“우, 우리 이래도 되는 걸까?”

“리하르트 님은 이제 고작 열다섯살이야. 열다섯 소년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처음부터 작정하고 전장에 내보내신 거라고.”

“……,”

“마음 단단히 먹어. 정말 그렇게 되면, 루벨린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우리는 갈아 치워질 거야. 그 전에 우리도 우리 살길을 도모해 놔야지.”

“그건 그렇지만…….”

“자, 어서.”

화장대 근처에 서성이는 하녀의 손에는 금으로 세공한 엘리사의 브로 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앤이 찾던 머리 장식의 행방을 알 것 같았다.

엘리사는 방문을 열고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희들 짓이었구나?”

“자, 작은 마님?”

브로치를 훔치길 주저하던 하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성큼 다가가 하녀의 손에 들린 브로치를 낚아챘다.

“늘 그 자리에 뒀는데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어디 갔나 했더니.”

사색이 된 하녀는 덜덜 떨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어요!”

먼저 도둑질을 주도하던 하녀도 친구를 따라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마님.”

그러고는 눈물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장식들은 사실 마님께는 잃어버려도 되는, 보잘것없는 것들이잖아요. 저희에겐 몇 년 치 밥줄 같은 것이에요.”

“…….”

“부디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

“만약 가문이 몰락하면 저희 같은하녀들은 처지가 곤란해져요.”

그러나 하녀는 진심으로 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긴커녕 뻔뻔하게 엘리사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요구했다.

엘리사는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녀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가문이 몰락할 거라고 생각해?”

“…….”

“이 루벨린이?”

루벨린은 엘리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하녀가 말하는 루벨린의 몰락은 결국 리하르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죽음을 운운하는 하녀의 말이 고깝게 들렸다.

엘리사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알아챈 하녀는 엘리사에게 굽실거렸다.

“그, 그럴 리가요! 그건 그냥 만약을 가정한 것이에요.”

“뭐, 그래. 너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생각까지 바꿀 수는 없으니까.”

엘리사의 순순한 말에 하녀는 엘리 사가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이제 겨우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니까.’

인정에 호소하면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 줄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비를 베풀어 브로치를 내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어리숙하고 덜떨어진 앤도 항상 동생처럼 챙겨 주는 엘리사였으니까.

그러나 이어진 엘리사의 말은, 그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네 죄를 합리화하며 다른 사람의 희망까지 짓밟진 말았어야지.”

“그, 그건……!”

“네 생각대로라면 어차피 망할 가문이니, 지금 나가나 그때 나가나다를 바 없겠구나.”

“마, 마님?”

하녀는 그제야 엘리사가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하녀의 치마폭에 조금 전 그녀가 훔치려 했던 금 브로치가 툭 떨어졌다. 엘리사가 던져 준 것이었다.

금 브로치를 보고 시선을 든 하녀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리사의 눈과 마주했다.

엘리사는 담담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렴.”

엘리사의 해고 통보에 하녀의 눈빛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 마님! 잘못했어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하녀는 다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지만, 엘리사는 무시하고 설렁줄을 당겨 하녀들을 불렀다.

엘리사는 눈앞의 상황에 당황한 하녀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장신구에 손을 대고, 소공의 죽음과 가문의 멸문을 입에 담으며 사용인으로선 해선 안될 언행을 보였다.”

“……!”

“그 죄는 엄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니, 당장 공작저에서 내치렴.”

“마님!”

“네, 작은 마님.”

다른 하녀들은 울부짖는 제 동료와 엘리사를 번갈아 보다가 하녀를 일으켰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 해도, 리하르트가 이혼하지 않는 한 엘리사는 그들의 상전이었다.

하녀들은 엘리사의 명에 따라 도둑질한 하녀를 데리고 나갔다. 도둑질을 종용받았던 하녀는 엘리사에게 선처를 받고 돌아갔다.

‘다른 하녀들도 오늘 일을 봤으니, 이제 그런 허튼 생각은 못 하겠지.’

누가 루벨린의 차기 안주인인지도 확실하게 알았을 테고.

엘리사는 조용해진 방을 보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언젠가 한 번은 본보기로 보여 줬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후련한 마음 한편에서는 싱숭생숭한 마음도 들었다.

‘공작도 그렇고, 다들 리하르트가 전쟁에서 질 것처럼 말하니까 나도 같이 불안해지잖아……….’

리하르트가 죽지 않을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리하르트가 전쟁에서 졌는지 이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찌 됐든 저도 어른이 될 때까지는 루벨린의 일원으로 지내야 하니, 가문의 위상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냐. 안 좋은 생각은 하지 말자.’

엘리사는 잠깐 들었던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 냈다.

대신 리하르트가 없는 동안 루벨린의 실질적인 위상을 세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로 했다.

‘내게 그렇게 살가운 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리하르트의 집은 여기니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루벨린을 잘 이끈다면 안주인으로서 제 명예도 서고, 이혼할 때는 크게 한몫 떼어 달라 요구할 권리도 생길 터였다.

엘리사가 영지 경영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막 책을 펼친 그때, 예고도 없이 앤이 들이닥쳤다.

“마님, 마님!”

사용인이 노크 없이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 건 예의에 어긋났지만, 엘리사는 앤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그 무례를 납득했다.

“소공께서 첫 전투에서 승리하셨대요!”

엘리사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엘리사를 포함한 루벨린의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

며칠 후, 황제의 탄신일이 밝았다.

엘리사는 저녁에 열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단장을 했다.

“마님,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응, 그걸로 할래.”

엘리사에게 드레스를 이것저것 들어 보이는 하녀들의 표정은 꽤 들뜬듯 보였다.

리하르트의 승전보 덕분인지 하녀들은 물론이고 루벨린 공작저의 모두가 묘하게 전보다 밝아진 상태였다.

그렇듯 황제의 탄신 연회를 앞두고 들려온 승전보는 루벨린은 물론이고, 제국민들 모두를 기쁘게 했다.

황제와 그 측근만 제외하고.

‘황제는 리하르트가 전투에서 지길 바랐을 거야. 전세가 완전히 기울 때쯤, 지원군을 더 보내 승전으로 이끌려고.’

그것만큼 루벨린의 명성을 추락시키는 데 확실한 방법은 없으니까.

실제로 황제는 출정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지원군을 보내는 것을 차일피일 미뤄 왔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다면, 최대한 지원군을 빨리 투입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어쩌면 더 나아가서…….’

리하르트가 죽길 바랐거나.

황제의 의도를 짐작한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의 아들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제 아들은 귀하다 이거지.’

리하르트가 출정하고 일주일쯤 지나자, 아프다던 크리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빠른 속도로 몸을 회복했다.

그리고 오늘 연회에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얄미운 얼굴을 볼 생각을 하자 심사가 뒤틀렸다.

‘우리 애는 그 험난한 곳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텐데. 크리스티안그 녀석은 침대에서 뒹굴면서 쿠키나 먹고 있겠지.’

황제와 크리스티안을 생각하며 이를 갈던 엘리사는 문득 묘수를 떠올렸다.

황제와 크리스티안, 두 부자를 크게 한 방 먹일 묘수를.

“다녀올게.”

배웅하는 하녀들을 뒤로하고 방을 나서는 엘리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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