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번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주된 화제는 단연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리하르트였다.
“가문의 힘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고작 열다섯 살 소년이 과연 이길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아직 어려도 루벨린은 루벨린인가 봐요.”
“전 사냥터에서 그 모습을 봤을 때부터 그 힘이라면 분명 제국에 승리를 가져다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그 잠재력을 알아보시고 적임자를 앞세우신 것이겠지요.”
“스스로의 힘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더라도 아직 어린데, 정말 용맹하신 분이에요.”
귀족들은 저마다 리하르트와 나이 답지 않게 용맹한 그의 용기를 칭송했다.
그런 그들에게 간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크리스티안은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크리스티안은 사방에서 들리는 리하르트의 이름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기가 뒤틀렸다.
‘나도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출정했을 거라고.’
황제 로암은 크리스티안에게 아픈 척 병상에 누워 있으라 명했다.
‘황제는 나서는 자가 아니라 명령하는 자다. 싸우는 건 아랫것들이 할 일이지. 그러니 네가 굳이 그 위험한 곳에 나설 필요는 없다.’
그는 일부러 리하르트에게 병력의 일부만 지원했다. 뭣 모르는 어린 소년이 전쟁에서 처참히 지길 바라며,운이 좋다면, 죽길 바라며.
하지만 결과는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리하르트는 승리했고, 병상에서 자리보전한 크리스티안과 대조가 되어 더욱더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재수 없는 새끼…….’
크리스티안은 리하르트의 잘난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1년 전, 불쑥 루벨린의 후계자라며 등장한 리하르트는 크리스티안의 것이었던 모두의 관심을 빼앗아 갔다.
여자아이들의 관심도, 황제파로 기울던 권력도.
겉으로는 ‘유능한 인재를 가까이 두는 것 또한 차기 황제의 안목’이라며 리하르트를 곁에 두었지만, 속은 이미 비틀릴 대로 비틀려 있었다.
‘그 녀석도 전쟁에서 이기는 걸 보면, 전쟁이라는 거 별거 아닌가 보지? 내가 출정했으면 이미 오래전에 승전을 울렸을지도.’
처음엔 전쟁이 두려워 아비의 말대로 했지만, 리하르트를 보니 저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연회장 가운데 홀로 오도카니 서 있는 엘리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리하르트의 얼굴이 떠오르며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없는 리하르트 대신 엘리사라도 괴롭혀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은 로제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을 끌고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이게 누구야. 루벨린 소공작 부인 아니신가?”
“황태자 전하.”
엘리사는 제 앞까지 다가온 크리스티안에게 드레스를 살짝 들며 예를 갖추었다.
“많이 편찮으셨다고 들었는데, 이 이제 다 나으신 건가요?”
엘리사의 살가운 말투에, 크리스티안은 헛기침했다.
막상 어여쁘게 단장하고 저를 걱정하는 엘리사의 얼굴을 마주하자,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뭐, 거의?”
“그럼 이렇게 장시간 무리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
“그래도 폐하의 탄신일인데, 아들된 도리로 병상에 계속 누워 있을 순 없지.”
“과연 효심이 지극하신 분. 폐하께선 전하께서 병상에서 일어나신 것만으로도 큰 선물을 받으신 기분일거예요.”
엘리사는 방 웃으며 크리스티안을 치켜세웠다.
그에 우쭐해진 크리스티안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가려는 찰나, 웃고 있던 엘리사가 걱정으로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효심이 지극하신 전하를 두고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요?”
“소문?”
“전하께서 전장을 두려워해서 일부러 아픈 척했다는 소문이요.”
“뭐?”
웃고 있던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굳어졌다.
엘리사는 저가 더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토로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날 수가 있죠? 폐하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연회에 참석하신 분께 말이에요.”
정곡을 찔린 크리스티안은 더욱더 크게 분개했다.
“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그따위 헛소릴 해? 죽고 싶은 게 아니 고서야.”
“역시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감히 그딴 헛소문을 퍼트린 놈들에게 전해.”
크리스티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 내 결심한 듯 덧붙였다.
“황태자는 이번 지원군 출정 때 함께할 거라고 말이야.”
리하르트도 승리를 가져다주었는 데, 저라고 못 할 건 없었다.
“어쩜 이렇게 용맹하신지!”
“역시 제 주군이 되실 분답습니다.”
크리스티안의 무리에 속한 귀족 영애들이 환호하자 영식들 역시 엉거주춤 분위기를 따라 크리스티안을 추앙했다.
“당연한 걸 가지고.”
크리스티안은 ‘용맹한 자신의 모습에 심취해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사는 그런 크리스티안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윽고 황제에게 선물을 진상하는 시간이 왔다.
엘리사는 알버트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루벨린의 하인들이 상자를 가져와 시종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시종은 받은 상자를 가지고 계단을 올라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을 본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것은 ….”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사람의 머리만 한 거대한 발광석이었다.
발광석은 햇빛 아래에 두면 빛을 흡수해 머금고 있다가 어둠이 드리우면 그 빛을 뿜어내는 돌로, 루벨린에서만 나는 진귀한 것이었다.
아기 주먹보다 작은 발광석도 평민들은 평생 일해서 벌어도 구경조차 하기 힘들 만큼 값비쌌다.
그러니 저만한 크기의 발광석의 가치는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부디 아렌시아에 이 발광석과 같은 폐하의 은총이 내리길 바라며 준비한 것입니다.”
알버트의 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 임은 엘리사도, 그리고 황제 본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황제는 흡족한 척 미소를 지었다.
“공에겐 이런 선물을 받기가 미안할 정도군. 이미 소공이 전장에서 큰 승리를 안겨 주었지 않나.”
“폐하께선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셨으니, 이 정도는 약소하지요.”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대답에 황제는 물론, 알버트 역시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보았다.
엘리사는 황제의 옆에 선 크리스티안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지원군 출정 때,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출정하시어 기사들의사기를 돋워 주겠다 하셨답니다. 그보다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엘리사의 천진한 말에 황제와 황후의 얼굴이 당황의 빛으로 물들었다.
황제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채고 크리스티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 리 없는 귀족들은 엘리사의 말만 듣고 지금 이 크리스티안과 황제를 추앙할 때라고 판단했다.
“역시, 황태자 전하세요!”
“과연, 차기 황제다운 용맹함이십니다!”
“황태자 전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귀족들의 추앙에, 황제의 표정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모두의 앞에서 공언한 셈이 되었으니, 이제 와 크리스티안은 출정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이상해진 것이다.
엘리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출정하시는 만큼, 이번 전쟁은 분명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
*
크리스티안과 지원군의 출정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크리스티안은 엉겁결에 모든 귀족들 앞에서 출정을 공언한 셈이 되어, 더는 출정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라던 결과를 얻은 엘리사는 매우 흡족해했다.
가 봤자 갖은 핑계를 대며 금방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갔다가 돌아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어떤 이유로 돌아오는, 크리스티안은 패배자 혹은 겁쟁이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리하르트의 영웅적인 면모가 부각될 것이고, 그 결과에 기뻐하는 건 엘리사만이 아니었다.
엘리사가 황제와 크리스티안에게 그렇게 크게 한 방 먹인 덕인지, 그날 이후 알버트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님. 오늘부터 마님의 보좌를 맡게 된 아가일 리체스터입니다.”
알버트는 엘리사에게 보좌관을 붙여 주었다.
올해 열일곱인 아가일이란 소년은 어린 나이에 진리의 탑에서 세계의지식을 습득한 인재였다.
알버트가 엘리사에게 집무를 도울 보좌관을 붙여 줬다는 건, 이제 엘리사가 루벨린의 안주인임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봤자 제법 쓸모 있는 체스말 정도겠지만.’
그는 분명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리하르트와 자신에게 정신적 학대를 가하는 악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오답을 빠르게 인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알버트의 모습을 본 엘리사는 그가 가히 아렌시아 최고의 권력가가 될 만한 그릇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보름의 시간이 흘러, 크리스티안의 출정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마님, 혹시 리하르트 님께 보낼 물건이 있으십니까?”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엘리사에게 직접 데운 우유를 가져다주러 온 집사 그레이슨이 물었다.
“황실 지원군이 출정할 때 전장에 있는 우리 기사들에게 가족들의 물건을 보낼 거라고 하더군요.”
“없………. 아.”
“있으시면 금주 중으로 준비해 주십시오. 제가 받아서 이번에 출정하는 황실 기사들에게 전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레이슨.”
그레이슨은 그럼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진 마시라고 당부하며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서 랍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전생에서, 입대한 사촌오빠들이 편지 한 장 보내 줘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말하던 것이 기억나서였다.
‘리하르트도 좋아하려나??’
저보다 큰 어른들 사이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을 리하르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이 루벨린 공작저에서 버텨내고 있듯, 너도 힘을 내라고.
무슨 이야기부터 쓸까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공작저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제일 처음엔 자신의 보좌관이 된 아가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다 썼다!”
그렇게 편지지를 빼곡히 채운 엘리 사는 편지 봉투에 잘 넣어 두고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리하르트가 떠난 이후, 모처럼 허전하지 않은 밤이었다.
*
사람들은 아렌시아 - 파이란 간의 전쟁이 파이란의 항복으로 5년 안에 끝날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파이란은 끈질겼고,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장기전이 되자, 사람들은 파이란 왕국이 멸망해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며 10년을 예측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람들의 예측은 깨졌다.
아렌시아 - 파이란의 전쟁이 발발한 지 7년째, 엘리사가 성년이 되는 해를 앞둔 초겨울.
파이란 왕국은 모두의 예측보다 빠르게 멸망했다.
‘폭풍의 루벨린’이라 불리는 리하르트 루벨린의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