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3. 성년이 되어 돌아온 남편
‘늦었다!’
루벨린의 서기관 아가일은 회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루벨린의 가신들과 주군이 참석하는 회의에 늦은 탓이었다.
아가일은 가빠진 숨조차 고르지 못한 채 황급히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에 이미 가신 대다수가 착석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 이제 어엿한 루벨린의 안주인이 된 엘리사가 앉아 있었다.
허리께로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과 싱그러운 연둣빛 녹안, 우윳빛 부드러운 피부 위에 꽃을 피운 듯 불그스름한 작은 입술.
시리도록 새하얀 북부에서, 홀로 봄빛을 머금고 있는 사람.
회의장으로 조용히 들어오던 아가 일과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빙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 마님은 오늘도 상냥하시군.’
아가일은 그런 엘리사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며 황급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엘리사에겐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체구로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과 강단도 있었다.
그 힘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님은 루벨린의 모두가 알았다.
리하르트가 출정한 후, 엘리사는 알버트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
처음엔 어린 마님을 무시하던 가신들도 엘리사가 영지 운영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주군으로 받아들였다.
기대가 없던 기사들 역시 이제는 그 능력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충성했다.
그 결과, 엘리사는 병상에 누운 알버트를 온전히 대신하여 영지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할 정도로 경영에 빠삭한 인재가 되었다.
“이제 다들 모이신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알버트의 보좌관인 애런이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엘리사는 회의 안건에 대해 미리 정리해 둔 서류를 펼쳤다.
첫 안건은 식량고를 담당하는 안토니오가 내민 안건이었다.
“마님께서 명하신 대로 식량고의 식량을 어림잡아 측정해 보았는데, 이대로라면 다가올 봄에는 굶주리는 이들이 많이 발생할 것 같습니다.”
북부는 척박하지만, 그래도 식량이 부족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엔 몇십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극심한 가뭄이 드는 바람에 식량이 부족해졌다.
“흐음, 역시 그렇군요.”
엘리사는 예상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안을 내놓았다.
“최근 남부는 식량을 노리는 해적 떼들에게 급습을 당하여 피해가 막 심하다고 들었어요.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팔겠다고 하세요. 그 값으로 금화 대신 식량을 요구하고요.”
루벨린에서 나는 철광석은 강도가 단단하여 모두가 탐냈으며, 광석을 많이 다루는 만큼 무기를 만드는 방법 또한 뛰어나 많은 이들이 루벨린 산 무기나 농기구를 선호했다.
그것을 아는 엘리사는 올해 여름, 가뭄이 들어 일거리를 잃은 영지민들에게 매년 세금으로 걷던 농작물대신, 대장일과 관련된 잡일을 돕게 했다.
그리고 원래 잡일을 하던 대장장이 견습생들에겐 대장일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본디 대장일의 잡일은 견습생들의 몫이었다.
불과 가까이서 하는 위험한 일인 만큼, 몇 년간 잡일을 하며 눈으로 보고 익히는 것이 관례였다.
대장장이들은 엘리사의 처사에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쳤으나, 곧 엘리 사의 확신 어린 말을 믿고 따라 주었다.
처음엔 가르치느라 업무 속도가 느렸지만, 시간이 흘러 견습생들이 어느 정도 숙달되자 농기구와 무기를 만드는 속도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이빨라졌다.
덕분에 현재 루벨린의 창고는 농기구와 무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부의 입장에서는 엄한 해적 떼에게 식량을 빼앗기느니, 남는 식량을 거래하고 받은 무기들로 영지를 지키는 것이 이득이라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가신들은 그녀가 내놓은 방안에 내 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루벨린과 남부는 거리상으로 멀어 교류가 거의 없었던 데다 농기구, 무기와 식량 거래는 더욱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가신들은 해당 안건을 해결했다며 흡족해했으나, 엘리사는 고민에 빠졌다.
‘올해는 이렇게 위기를 넘기지만, 다음엔? 올해는 남부에 풍년이 들어 식량이 남았으니 교류가 성사되겠지만, 다음엔 남부에도 가뭄이 들 수도 있어.’
언젠가 남부도 가뭄이 들면 남부도 당연히 내부의 영지민들부터 챙기게 될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온실은 일반 서민들이 짓기엔 너무 비싸고……. 비닐하우스 같은 걸 개발해 볼까.’
엘리사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려던 그때, 누군가가 회의장의 문을 두드렸다.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히 전해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회의장 안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어지간한 일로는 회의 도중에 출입이 어려웠기에, 누군가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찾아왔다는 건 긴 급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들어와요.”
엘리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만면에 기쁨이 역력한 모습으로 소식을 전했다.
“제국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합니다.”
*
승전보가 울리고 한 달 후, 파이란 왕국 잔당들의 은신처 부근.
리하르트의 부하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자신들의 주군을 찾아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리하르트의 부관, 톰슨은 근처의 나무 기둥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대체 어디로 가신 거 람.”
리하르트는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늘 어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 쓸어버리는 그가 걱정이 된 톰슨은 늘 잔소리를 했다.
‘어디 가면 간다. 오면 온다 말씀이나 좀 남기고 가십시오!’
리하르트는 그 잔소리를 수십 번쯤 듣고서야 마지못해 쪽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리하르트가 사라지고 나면 그를 찾아가는 것은 부하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겨우겨우 전장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상황은 정리되어 뒷정리만 남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톰슨 경! 이쪽에서 폭풍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주위를 살피던 부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나뭇잎들이 숲 안쪽으로 날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톰슨과 부하들은 서둘러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파이란 왕국잔당들의 은신처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은신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터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 일어난 거대한 폭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사람, 물건 구분할 것 없이.
매번 보아도 숨이 막히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톰슨은 오른팔을 들어 부하들의 전진을 막았다.
“멈춰! 더 이상 다가가면 위험하다!”
부하들은 즉각 몇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거대한 폭풍이 순식간에 멎으며 사람과 물건들이 허공에서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비명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가 가득한 그 중심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과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자.
그는 이 혼란 속에서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그 잘난 얼굴은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도 저 홀로 태연했다.
톰슨과 부하들은 그에게 다가갔다.
“리하르트 님!”
“말씀도 없이 가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좀 같이 가자고요!”
톰슨이 잔소리부터 늘어놓자, 리하르트는 귀 따갑다는 듯 눈썹 한쪽을 일그러트리며 대꾸했다.
“너희는 너무 늦어.”
“아니, 걸어 다니는 일반인이랑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소공이랑 비슷한 속도이길 바라는 건 좀 양심 없으신 거 아닙니까………?”
티격태격하는 리하르트와 톰슨을 지켜보던 부하는 톰슨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불쑥 끼어들어 소식을 전했다.
“소공작님, 제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친서를 보내셨다고 하더군요.”
“알았다. 바로 가 보지.”
리하르트는 부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영으로 날아갔다.
톰슨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리하르트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
“소공작님, 황제 폐하께서 보낸 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국군 진영으로 돌아오자, 부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리하르트를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안엔 이미 황실 측의 제국군들과 리하르트를 따라 전장에 온 루벨린의 기사들, 그리고 황제가 보낸 사자로 보이는 이들이 셋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소공작께서 감수하신 노고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들은 리하르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러고는 곧장 황제의 친서를 리하르트에게 건네며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는 아렌시아를 위해 싸워 준 루벨린과 제국군을 위해 성대한 축제를 열겠다 하셨습니다. 또한 개 인적으로 공을 치하하고 싶으시다며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하셨습니다.”
“바라는 것이라…….”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리하르트는 비딱하게 웃었다.
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던 황제가 그 공을 치하하겠다니, 우습지 않나.
리하르트는 습관적으로 제 목에 손을 뻗었다. 7년째 단 한 번도 제게서 떼 놓은 적 없는 루비색 펜던트가 손끝에 잡혔다.
리하르트는 그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내놓았다.
“귀가.”
“예?”
“집에 가고 싶다고.”
“하, 하지만 폐하께서 소공작님을 위해 축제를 준비하신다고………!”
“그 축제는 참전한 제국군을 위해서 여는 것이기도 하니,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겠지.”
마침 리하르트를 따라 잔당을 정리 하러 갔었던 부하들이 천막에 도착했다.
그들은 숨 돌리기도 전에 리하르트의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루벨린은 곧바로 본성으로 귀환하겠다.”
리하르트의 말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루빨리 돌아가려면 서둘러 잔당을 정리를 해야겠군.”
리하르트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마음이 없는 듯, 무심히 중얼거리며 천막을 휙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