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21화 (21/164)

21화

그와 동시에 천막에 모여 있던 제국군들이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탐탁지 않은 시선이 리하르트의 부하들에게로 향했다.

본디 제국군은 루벨린의 기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국군의 수장인 기사단장은 전투 때마다 형편없는 전략을 세우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어린놈의 전략을 따를 수 없다고 버티는 허울뿐인 인간이기도 했다.

제국군 역시 상대적으로 어린 리하르트의 지휘는 따르지 않으면서 루벨린이 공을 다 가져간다고 싫어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이들이었다.

톰슨과 루벨린의 기사들은 그런 그들을 쏘아봐 주고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리하르트는 또 잔당들의 근거지를 정리하러 간 것인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톰슨에게 부하 중 하나가 물었다.

“톰슨 경, 소공께선 왜 저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공로를 치하하신다니, 제도에 잠깐 들렀다 가면 좋을 텐데.”

그에 톰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난들 알아? 뭐, 본성에 꿀단지라도 숨겨 두셨나 보지.”

*

엘리사는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혼 승인서]

아렌시아에서 결혼은 사랑의 여신인 아렌느 여신의 가호 아래에 맺어지는 서약이었다.

그 때문에 이혼을 할 때도 여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축복을 받아야 홀로 남은 두 사람의 앞날에 또 다른 사랑과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나도 성인이 돼.”

리하르트와 처음 결혼했던 그때, 이혼을 약속했던 바로 그 나이가 된다.

나이가 되더라도 리하르트가 돌아올 때까지 루벨린의 안주인으로 좀 더 영지를 돌볼 의향이 있었으나, 때마침 이 성의 주인이 돌아오고 있으니 더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사업 자금은 준비했고, 노후 자금은… 그래도 그간의 노고와 정이 있는데 위자료는 부족하지 않게 챙겨 주겠지. 이제 남은 건 소르네티에 있는 별장인데……..’

엘리사는 올해 초, 친구인 안셀을 통해 소르네티에 있는 로엔그린 자작가의 별장을 구입했다. 아르덴 가문이 몇 년 전에 소르네티까지 영지를 넓힌 덕에 가능했다.

하지만 별장은 오랜 시간 비워진채로 있어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엘리사는 소르네티의 가까이에 있는 안셀에게 별장의 보수를 부탁했다.

그러나 올여름, 태풍의 피해로 일정이 늦춰지는 바람에 내년 여름에야 수리 완료될 예정이었다.

엘리사가 리하르트와 이혼하고 루벨린 성을 나가기로 예정해 둔 봄과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돈이 넉넉한데, 설마 그동안 머물곳을 못 구할까.’

엘리사는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슬슬 귀환 축하 연회 예산을 짜야겠네.’

마침 얼마 전, 남부와의 교류로 많은 식량을 얻은 덕에 식량고가 풍족했다.

게다가 황궁에서 전쟁 영웅들을 위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하니, 루벨린 기사단은 분명 제도에 들렀다가 올 것이다. 서두를 것은 없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좀 쉬자.’

엘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침실로 가기 위해 집무실을 나왔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앤이 허겁지 겁 달려왔다.

“마, 마님.”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앤, 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

“시,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다니?”

“소공작님께서…… 곧바로 영지로 오고 계신대요!”

“뭐?”

“빨리 연회를 준비하셔야……”

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발소리가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알버트의 보좌관인 애런이었다.

“작은 마님,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앤, 난 잠깐 들렀다 갈게.”

엘리사는 앤을 돌려보내고 애런과 함께 알버트의 침실로 향했다.

“각하, 작은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애런은 침실 앞에서 대기하고, 엘리사는 홀로 알버트의 침실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매일 아침, 형식적인 문안 인사를 하러 올 때마다 맡는 냄새였다.

엘리사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숨소리는 언제 멈춰도 놀랍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으나, 눈빛만은 처음 보았던 그때와 같이 매서웠다.

“부르셨어요, 각하.”

“그 녀석이… 곧장 영지로 오고 있다고 들었다.”

말을 이으려던 알버트는 갑자기 터진 기침에 연신 쿨럭거리다 겨우 다시 말을 이었다.

“리하르트가 돌아오면……… 그 녀석을 구슬리는 구워삶든, 어떻게든 아이를 가져라.”

“…….”

“내 누누이 말했지. 네 쓸모는 그것이 전부라고, 지금껏 너를 먹이고 키워 준 것은 오직 그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너를 내 집안에 둘 이유가 없어.”

“………”

“리하르트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정갈히 하고 기다려라. 바로 씨를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하는 알버트의 눈빛은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듯 형형했다.

눈감기 전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명인 양, 그 소명을 위해 남은 생명을 소진하는 양 강렬했다.

그는 마치 그 염원을 이루겠다는 일념 하나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염원이 무엇인지를 떠나, 죽어 가는 이가 단 한 가지 열망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만의 열망을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희생시켜선 안 되는 거지.’

엘리사는 그의 염원을 이루어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도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루벨린 기사단에서 까마귀가 왔다.

내일 정오쯤 본성에 도착한다는 내용이 적힌 짤막한 쪽지였다.

루벨린의 사람들은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최대한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로 눈코 뜰 새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엘리사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신없던 하루가 가고 어둠이 내려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모두가 행복한 내일을 기대하며 잠는 밤, 엘리사는 홀로 잠들지 못한 채 깨어 있었다.

‘잠이 안 와…….’

꽤 오랜 시간 침대에서 뒤척이던 엘리사는 결국 자는 것을 포기하고 발코니로 나왔다.

“으, 추워.”

초겨울의 찬 바람을 막으려 담요로 몸을 꽁꽁 싸맸지만, 루벨린의 날카로운 바람은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젠 그 한기마저도 익숙했다. 눈앞에 펼쳐진 저 풍경처럼.

발코니 아래엔 루벨린 영지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밤이지만, 영지를 뒤덮은 새하얀 눈이 달빛을 반사하여 고요한 풍경이 훤히 보였다. 그 풍경이 평화로웠다.

17년 동안 고생했네, 엘리사.

리하르트가 출정한 후,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보람차고 즐거웠던 기억들도 많았다.

빙의 후 줄곧 루벨린에서 살아온 엘리사에게 여기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나의 루벨린.’

7년간 자신이 가꾸어 온 루벨린이다.

고작 7년으로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일평생의 시간을 이곳에 바친 알버트의 집착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이제 여길 떠나야 한다니…… 시원섭섭하다.’

리하르트가 돌아올 날이 가까워진다는 건, 자신이 떠날 날이 가까워 진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리하르트, 이젠 어른이 됐겠네.’

마지막으로 봤던 게 7년 전이다.

그때도 자신보다 키가 컸지만, 지금은 훨씬 더 컸으리라.

‘성격은……… 편지를 봤을 땐 여전히 무뚝뚝했어.’

만나진 못했지만, 계절 주기로 편지를 주고받긴 했다. 그래 봐야 안부 인사나 짤막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전부였지만.

‘얼굴은…… 어땠더라.’

어린 나이에도 잘생겼다는 건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많이 흐려진 기억이라, 그 얼굴이 어떻게 자랐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엘리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끄집어내려 집중하던 그때, 언젠가 맡아 본 적 있는 향기가 묻은 바람이 불어왔다.

동시에 은은한 달빛이 가려지며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큰 키, 늘씬하지만 넓은 체격,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얼굴을 한 남자가.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흑발 아래 핏빛 붉은 눈동자가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밤을 틈타 지상으로 내려온 타락한 천사 같았다. 날개가 없다는 것만 빼면.

‘저 얼굴은….’

홀린 듯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던 엘리사는 마침내 저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자가 발코니에 내려섰다.

남자는 엘리사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안녕, 엘리사.”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남자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가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