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는 지난 7년 동안 낯설어진 이름을 불러 보았다.
“………리하르트?”
하지만 그 이름을 확인하듯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엘리사는 아차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이 대륙을 통틀어 비행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니까.
그는 대답 대신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원래도 저보다 컸지만, 이제는 더욱 확연한 키 차이가 어색했다.
달빛을 등진 채 오묘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어쩐지 위험하게 느껴져 엘리사는 그 시선을 피했다.
“예, 예정보다 빨리 왔네?”
“보고 싶어서.”
시선을 피해도 짙은 시선이 제 얼 7년 동안 방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리하르트에겐 변함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7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 방을 채우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존재 때문에.
‘어색하다! 숨 막히게 어색해!’
엘리사는 어색함에 몸을 배배 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7년 전에도 리하르트는 말이 없는 편이었고, 지금도 여전할 뿐인데 왜 그때랑은 이렇게 다를까.
리하르트는 겉옷을 벗었다. 두 겹의 겉옷을 벗자, 셔츠 차림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겉옷을 입고 있을 때도 언뜻 잔근육의 윤곽이 비치긴 했지만, 겉옷을 벗자 얇은 셔츠 위로 그 윤곽이 더욱 또렷해졌다.
넓은 가슴과 어깨, 늘씬한 허리, 팔을 살짝만 접어도 확연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근육들.
완연한 남자의 몸이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리 사는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굳었다. 흑심 가득한 눈으로 그의 몸을 감상하던 것을 들킨 것 같아 지레 발이 저렸다.
“모, 목욕물 준비하라고 할까?”
서둘러 하녀를 부르려는 엘리사를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막았다.
“씻고 왔는데.”
“아…. 그래?”
“만져 볼래?”
리하르트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푼 차림으로 성큼 다가왔다.
리하르트의 몸에 온통 신경이 쏠려있던 엘리사는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펄쩍 뛰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니! 마, 만져 보긴 뭘 만져?”
하지만 리하르트가 들이민 건 머리였다.
“아직 덜 말랐는데.”
아……. 머리 만져 보란 거였구나.
엘리사는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리하르트가 제 흑심을 못 알아챘길 바라며 화두를 돌렸다.
“그, 그럼 얼른 자자. 먼 길 오느라 피곤했겠다.”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대로 곧장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엘리사는 침대에 눕지 않고 이불과 베개를 주섬주섬 챙겼다.
의아한 리하르트의 시선이 엘리사에게로 향했다.
“뭐 해?”
“같이 자면 불편할 것 같아서……….
난 소파에서 자려고.”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엘리사의 대답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왜? 전에 같이 잤잖아.”
그 물음에 엘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성인 남녀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좀 그렇긴 하니까……. 그런데 우린 부부니까 이상할 것도 없긴 하고……. 그렇긴 한데…….’
침대에 누워서, 셔츠 단추도 두 개나 풀고, 턱을 괴고 올려다보며 그런 말을 하는 리하르트의 모습을 보니 어째 넘어선 안 될 금기를 침범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언젠가 엘리사가 했던 말을 하며 은근히 같이 잘것을 요구했다.
“안 잡아먹을 거라며.”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결국 침대에 누웠다. 예전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로.
어색함에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던 엘리사는 슬그머니 리하르트 쪽을 살폈다.
리하르트는 피곤했던지, 금세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눈 감고 있으니 어릴 때랑 똑같네.’
낯설던 얼굴이 기억 속 익숙한 얼굴로 변하자, 어색하던 감정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제야 반가운 마음과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사는 그가 돌아오면 꼭 해 주고 싶었던 인사를 뒤늦게나마 건넸다.
“어서 와, 리하르트, 고생 많았어.”
“……”
“잘 자.”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엘리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이윽고 잠든 숨소리가 들리자, 리하르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누워 턱을 괴고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7년간, 내내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자라면서 앳된 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저 얼굴을 보니 처음으로 살아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얌전히 자나 보네.”
제자리에 얌전히 누워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어쩐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엘리사는 제 옆자리를 보고 흠칫 놀랐다.
“……리하르트?”
분명 함께 잠들었던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씻으러 갔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기엔 소파에 걸어 두었던 겉옷도 사라져 있었다.
엘리사는 설렁줄을 당겨 앤을 불렀다.
“앤, 리하르트는?”
“지금 성으로 오고 계시대요. 준비를 서두르셔야 할 것 같아요.”
앤의 대답에 엘리사는 멍해졌다.
‘그럼 어젯밤에 만난 리하르트는 뭐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엘리사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은 채 루벨린의 기사들과 리하르트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작은 마님, 소공과 기사들이 귀환하셨습니다.”
때맞춰 루벨린의 기사들이 본성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곧장 로비로 내려가 가신들, 사용인들과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이윽고 성의 문이 열리고 루벨린의 기사들이 들어섰다. 그 중심에 리하르트가 있었다.
지난밤, 엘리사가 보았던 그 모습과 똑같은 그가.
분명 어제와 꼭 같은 모습인데, 햇빛 아래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지난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둠 속에선 조금 섬뜩하게 느껴지던 잘난 얼굴은, 햇빛 아래에선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리하르트 님.”
가신들과 사용인들이 리하르트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리하르트는 그들을 지나쳐 성큼 엘리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사는 선뜻 무어라 말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난밤이 꿈이라면 잘 다녀왔냐고 해야 할 것이고, 꿈이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하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크고 단단한 몸이 스치듯 닿았다.
그 행동에 놀란 가슴이 두근거렸다. 곧 맞닿은 몸이 어색하게 얼어붙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가족 사이의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굳어 있는 엘리사의 귓가에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좋은 아침, 엘리사.”
다른 사람들에겐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였다.
엘리사는 그제야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님을 알아챘다.
엘리사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리하르트는 곧장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그에게 애런이 다가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리하르트 님.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리하르트는 환영하는 가신들과 사용인들을 뒤로하고 알버트의 침실을 찾았다.
알버트의 침실에 독한 약재 냄새가 가득했지만, 죽음을 넘나드는 전장에서 그보다 더 지독한 냄새를 많이 맡아 온 리하르트는 무감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몰라보게 핼쑥한 얼굴을 한 알버트가 누워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리는 것마저 힘에 부치는 듯, 겨우 조금 고개를 돌려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열망에 타오르는 그 눈동자만은 여전했다.
“어찌하여… 그 계집들을 안지 않았느냐? 전부 네 성에 차지 않더냐?”
한참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마른 기침을 뱉던 그가 겨우겨우 꺼져 가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물은 첫 마디였다.
리하르트는 그가 말하는 ‘계집’이 그가 전장으로 보냈던 여자들임을 알아챘다.
알버트는 자신의 병환이 깊어지자, 전장의 리하르트에게 여자들을 보냈다. 평소 같으면 감히 천것들의 피를 섞을 수 없다고 했을 사람이 그들을 보낸 것을 보면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어젯밤,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방에서 자고 새벽 일찍 군으로 돌아가 기사들과 함께 정식으로 귀환한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엘리사의 방에서 잔 것을 알버트가 알게 되면, 또 헛된 기대를 품고 엘리사를 닦달할까 봐.
“그것이 아니라면…… 마음에 담아 둔 계집이라도 있는 것이냐.”
"참 여전하십니다.”
끔찍할 정도로. 몇 년이 지났지만 한 치도 변하지 않는 대화 주제였다. 리하르트는 더 이상 전처럼 화를 내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죽어 가는 제 평생의 숙적을 바라볼 뿐. 어차피 제 조부는 곧 죽는다.
이제 가신들도 죽어 가는 조부보다는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제아무리 다그쳐 봐야, 자신이 듣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알버트는 오직 후계에 대한 생각밖에 못 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돌아왔으니 엘리사 그 계집에게서 후사를 보아야 한다. 후사를 본 이후에 네 뜻대로 해도 좋으니…….”
그것은 열망을 가장한 광기였다.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리하르트는 더 듣고 있을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때, 등 뒤에서 무어라 더 말하는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계집에겐……… 분명 특별한 힘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