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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23화 (23/164)

23화

리하르트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방을 나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조부의 말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다. 방을 나오자마자 마주친 건 뒤따라온 톰슨과 낯선 얼굴의 동년배 남자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공.”

리하르트는 오늘 입성할 때, 엘리 할 때, 사의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냈다.

“보좌관 아가일 리체스터입니다.”

아가일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예를 갖추었다. 그러잖아도 싸늘하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엘리사가 보내는 편지마다 거의 한번도 빠짐없이 언급되던 자였다.

“경의 이야기는 아내에게 많이 들었어.”

'아내'라는 단어에 묘하게 악센트가 실려 있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리하르트는 아가일의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휙 지나가 버렸다. 아가일은 어느새 훌쩍 멀어진 리하르트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왠지 묘하게 찍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리하르트와는 이제야 겨우 인사를 하고 첫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자신을 못마땅해할 만한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아가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찬가지로 돌아섰다.

* * *

엘리사는 병상에 누운 알버트 대신 루벨린 기사단의 노고를 치하하며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밤이 깊어 가도록 연회의 분위기는 식을 줄 모르고 더욱더 고조되었고, 음악 소리 역시 끊이지 않았다.

“자자, 사양 말고 마셔! 오늘 같은 날 술에 찌들 때까지 마시지 않는 건 뭐라고?”

“죄!”

루벨린 기사단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지난 7년간 루벨린을 지켜온기사단장은 호쾌하게 웃으며 전장에서 돌아온 기사들의 잔을 채워 주러다녔다.

기사들은 간만에 만난 동료들과의 지난 이야기와 전장에서의 무용담을 풀어놓으며 회포를 풀었다. 하지만 흥이 고조된 연회의 분위기와 달리, 엘리사의 얼굴엔 근심이 어려 있었다.

엘리사는 곁눈질로 옆에 앉아 있는 리하르트를 슬쩍 살폈다. 리하르트는 톰슨 및 전장에서 함께했던 다른 기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사는 연회가 시작되기 전, 자신을 부른 알버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 밤이다. 오늘 밤에, 그 녀석의 씨를 받아. 모처럼 흥이 올랐을 때 분위기를 타서 유혹하면 그 녀석도 어쩌지 못할 테니….'

하녀들에게 듣기로, 알버트가 밤에 입을 잠옷까지 따로 준비시켰다고 했다. 아주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작의 하네스와 리하르트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이쯤 하네스를 가진 것 같긴 한데.'

물론, 엘리사는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상황을 어찌 모면하냐는 것이었다. 어떤 옷을 입고 그의 앞에 서더라도 그가 흔들리지 않을 것은 알고 있다. 가문의 대를 제 손으로 끊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그니까.

'그렇지만……… 민망하잖아!'

지금도 낯설고 어색한데,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얼마나 민망할까. 그러니 그런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그때, 맥주가 든 오크 통을 든 기사단장이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자, 마님도 한잔 받아 주시지요.”

“네?”

"아, 이건 잔이 너무 작군요. 자고로 루벨린의 마님이라면 이 정도 배포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기사들이 사용하는 커다란 술잔을 가져와 엘리사의 앞에 쿵! 내려놓았다. 그 크기가 가히 엘리사의 얼굴보다 컸다. 그는 껄껄 웃으며 엘리사의 잔에 넘쳐라 맥주를 부었다.

“그동안 마님께서 고생하신 만큼, 그리고 제가 마님께 충성하는 만큼 따라 드리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술에 취한 기사들은 들뜬 나머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잔을 들기 전에 마님께서 한마디해 주시지요.”

기사단장은 엘리사에게 축배사를 제안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좌중의 시선이 엘리사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모이자, 엘리사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모두들… 너무 고생 많았어요. 경들이 무사히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 진심으로 기쁘답니다. 그대들은 누구 하나 고를 것 없이 모두가 루벨린의 이름을 널리 떨친 영웅들입니다. 루벨린의 영웅들에게 축복을.”

"루벨린에 무한한 영광을!"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외치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엘리 사는 제 앞의 잔을 내려다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것을 본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말렸다.

“억지로 마시지 마.”

하지만 엘리사는 제 얼굴보다 큰 잔을 두 손으로 잡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리하르트는 물론, 옆에서 보고 있던 톰슨의 눈도 놀라 커졌다.

“오, 역시 우리 마님. 생각보다 잘드시는데요?”

“이 정도야, 뭐. 물 마시는 것처럼 마실 수 있어요.”

엘리사는 놀란 톰슨을 향해 허세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리하르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았고, 톰슨과 기사들은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저희가 없는 동안 영지를 아주 번 창시켜 놓으셨던데, 대단하십니다!"

“내가 고생 좀 했죠. 물론, 다른 분들도요.”

엘리사는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리하르트가 옆에서 말리려고 해 봤지만, 도리어 그녀는 막무가내였고

기사들은 이미 술기운이 올라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아니, 소공께서 글쎄… 본인이 날아다니는 속도로 쫓아오라고 하시지 뭡니까?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요? 가능한 소릴 해야지……….

그냥 경들이 다치는 게 싫어서 혼자다니고 그랬나 봐요. 원래 아닌 척하면서 챙겨 주는 성격이거든요. 경들이 고생 많으셨겠어요.”

“챙겨 주신다고요? 마님께만 그런 거 아니고요? 저희는 딱히 챙김받은 적 없는 거 같은데……….”

어느새 술기운으로 눈이 풀린 톰슨이 은근슬쩍 리하르트의 흉을 봤다.

마찬가지로 눈이 풀린 엘리사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술을 마시려는 순간, 보다 못한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잔을 빼앗았다.

“엘리사. 그만 마시고 자러 가자.”

“더 마시고 싶은데……….”

엘리사는 입술을 삐쭉이며 불만을 토로했으나, 리하르트에겐 당해 낼수 없었다.

리하르트는 휘청거리는 엘리사를 안아 일으켰다.

그 모습을 톰슨과 기사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었다.

“그렇지, 결혼하자마자 7년을 떨어져 살았으니 이제 신혼이지. 그렇죠, 소공?”

리하르트는 싸늘하게 그들을 쏘아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돌아서 홀을 나왔다.

리하르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엘리사는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종알거렸다.

“한참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에……. 더 마시고 싶은데에……….”

“…….”

“오늘 같은 날 떡이 될 때까지 안마시면 죄라니까아.”

칭얼거리던 엘리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삐쭉이며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나 더 놀다 갈래. 응?”

“…….”

“리하르트으.”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엘리사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이 난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엘리사의 투정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다른 이가 이 모습을 보는 건 싫었다.

리하르트는 웅크리고 있는 엘리사를 안아 들려 했다.

“흥. 못 들걸? 나 엄청 무겁거든!”

엘리사는 그에게 저항하듯 다리에 힘을 주며 큰소리쳤으나, 저항이 무색하게도 작은 체구는 손쉽게 번쩍 들렸다.

“아아, 퍽이나 무겁네.”

리하르트는 바둥거리며 저항하는 엘리사를 감싸 안고 침실로 향했다.

처음엔 저항하던 그녀도 지친 것인지, 조용해졌다.

“더 놀고 싶은데…….”

잔뜩 흥이 오른 지금,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인지 연신 종알거리긴 했지만.

하지만 막상 방에 도착하자, 엘리 사는 언제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썼냐는 듯 곧장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으, 어지러워……….”

가만히 있는데도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듯 눈꺼풀이 무거웠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옆에 걸 터앉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셔?”

“취한 사람은… 그런 옷 못 입으니까.”

“그런 옷?”

“…안 잡아먹겠다고 했잖아, 내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이 돌아왔다.

리하르트는 횡설수설하는 엘리사의 말을 해석하지 못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가 눈앞에 놓인 리하르트의 큰 손을 덥석 붙잡았다.

리하르트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굳어졌다.

“손만…… 잡고 자겠다고…”

말끝을 흐리던 엘리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곧이어 살짝 벌어진 작은 입술 새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두 손은 그의 큰 손을 꼭 쥐고 있었다.

“……..”

잡힌 손을 차마 빼지 못한 채 무방비한 상태로 잠든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어쩌지.”

그리고 엘리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손만 잡고는 못 자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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