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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24화 (24/164)

24화

“목말라….”

다음 날 아침, 엘리사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쓰렸다.

‘몸이 왜….’

자신의 몸 상태에 의구심을 가지던 엘리사는 불현듯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심하게 취했던 것, 방으로 가자는 리하르트에게 어린아이처럼 떼를 쓴 것, 그러다 그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온 것…….

거기까지 떠올린 엘리사는 기겁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리하르트는 방에 없었다.

‘내가 못살아…….’

엘리사는 제 뺨을 찰싹 때리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몇 년 동안 성을 비웠다 돌아온 사람한테 첫날부터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그걸 보고 리하르트가 뭐라고 생각했겠어?’

그동안 이상해졌구나, 저 없는 동안 허구한 날 술이나 퍼마셨구나,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좀 솔직히 억울했다.

늘 바쁘게 살다가 어제야 겨우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대 본 건데.

‘빨리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지.’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과를 시작할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좀 어지럽고, 목이 마르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그 소리를 들은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다시 침대에 도로 누웠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엘리사는 자는 척하며 실눈을 뜨고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리하르트였다.

‘씻고 왔나 보네.’

리하르트는 목욕 가운을 입고, 젖은 머리엔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을 때마다 느슨하게 묶인 가운 사이로 언뜻언뜻 가슴 근육이 보였다.

완만하게 굴곡진 근육 사이로 맺혀 있던 물방울이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이 몹시 뇌쇄적으로 느껴졌다.

거기에 물기를 머금은 하얀 얼굴과, 그에 대조되는 불그스름한 입술이 야릇한 분위기를 더했다.

머리를 닦던 리하르트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하의를 입고 다시 나왔다.

물론, 상체는 헐벗은 채로.

헉.

실눈을 뜬 채 넋을 놓고 감상하던 엘리사는 자는 척하고 있었던 것도 잊고 소리를 낼 뻔했다.

‘아, 아니. 왜 남의 방에서 훌렁 벗고 다니고 그래!’

아. 여기가 네 방이지, 참.

‘그, 그래도 그렇지…….’

엘리사는 낯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얇은 잠옷 차림일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벗고 있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고 다부진 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그의 몸 군데군데에 크고 작게 새겨진 흉터들이었다.

‘저 바보…….’

저렇게 다치고도 또 제대로 치료하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무심하게 그 상처들이 흉터로 남도록 내버려 두었겠지. 안 봐도 뻔했다.

아픈 것도 모른 채 끝 모를 싸움을 반복했을 그를 떠올리자 마음 한편이 쓰렸다.

리하르트는 머리를 털고 좀 전에 가지고 나온 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단추를 잠그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엘리사는 흠칫 놀라 일부러 자는 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으음….”

돌아누운 탓에 다가오는 리하르트가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인기척과 함께 특유의 체취가 그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엘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치챘나………?’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는 척했다.

똑똑.

그런 그녀를 돕듯,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리하르트의 인기척이 멀어졌다.

리하르트는 문가에서 잠시 머무는 듯하더니, 방문자와 별다른 대화 없이 문을 닫고 다시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엘리사가 긴장하고 있던 그때, 등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자는 척할 거야?”

둘 사이에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잠시 얼어 있던 엘리사는 이내 체념하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자, 자는 척한 건 아니고 잠이 덜 깨서 그냥 누워 있었던 거야.”

리하르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들고 있던 잔을 엘리사에게 건넸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잔에 든 액체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붉은색의 액체였다. 그 속에 말린 꽃잎으로 보이는 것들이 떠 있었다.

“이게 뭐야?”

“숙취에 좋은 약.”

“아………. 고마워.”

엘리사는 얼떨떨해하며 잔을 건네받았다. 좀 전에 방으로 왔던 사용인이 준 것이 이것인 모양이었다.

엘리사가 약을 마시려는데,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엘리사가 토끼 눈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자,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고 재빨리 손을 뗐다.

“마시고 좀 더 자.

그리고 돌아서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닫히는 문을 멍하니 보다가, 그의 손이 닿았던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엔 종이 포장지에 쌓인 과일 맛사탕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걸 왜 준 거지?’ 사탕이나 쿠키 같은 간식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어디서 사탕을 구했는지, 왜 이걸 제게 주는지 의아했으나 일단 받아 두기로 했다.

“속 쓰리다……….”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주고 간 약을 벌컥 마셨다. 하지만 평온하게 마시던 표정이 차츰 일그러졌다.

엘리사는 괴로운 표정으로 약을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으아, 써!”

그가 사탕을 주고 간 이유를 바로 알 것 같은 맛이었다.

*

점심을 먹은 엘리사는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방으로 왔다.

막 테이블에 책을 내려놓는데, 창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리하르트?’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발견했다. 멀리서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단연 눈에 띄는 외모였다.

리하르트는 말 앞에 모인 기사들과 함께 있었다.

‘영지 시찰 가나 보네.’

엘리사는 걸음을 멈추고 기사들과 이야기 중인 리하르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누구 남편인지 참 잘생겼네. 아주 잘 컸어. 그런데……….’

낯설었다.

선이 굵어진 얼굴도, 훌쩍 커 버린 키와 몸도, 변성기가 끝난 중저음의 목소리도, 그리고…….

‘성격도 묘하게 변한 느낌이고.’

하긴,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나흘째 같은 방을 쓰고, 끼니마다 같이 식사를 하는데도 어색했다.

‘이제 장난도 못 치겠고, 막 대하지도 못하겠고…….’

언뜻 보이는 어릴 적 얼굴을 발견할 때면 오랜 친구가 돌아온 것 같아 애틋해지다가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억 속 사춘기 소년이 사라진 거 같아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엘리사는 이 알다가도 모를 기분을 어찌할지 모른 채 자꾸만 그를 어색하게 대하게 되었다.

‘뭐, 곧 남남이 될 사이니까 아무 래도 상관없나.’

가끔 보는 친구 사이가 된다면 좀 어색해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섭섭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리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창문 아래로 몸을 숙였다.

‘봐, 봤나?’

창문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데, 등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왜 그러고 계세요?”

앤이었다.

앤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엘리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앤의 물음에 엘리사는 당황하여 떠듬떠듬 대답했다.

“채, 책에서 뭔가 떨어진 것 같아서 살펴보고 있었어.”

“드레스에 먼지가 묻겠어요. 제가 찾아볼 테니 그냥 계세요.”

“고마워, 앤.”

앤은 엘리사 대신 몸을 숙여 바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사이, 엘리사는 슬쩍 몸을 일으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리하르트는 이미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성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 리하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사는 문득 제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근데 나 왜 숨었니…?”

비록 어색한 사이이긴 해도 손이나 한번 흔들어 주었으면 되었을 일을, 왜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숨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앤, 이제 됐어. 아무래도 내가 잘못 봤나 봐.”

엘리사는 앤을 일으켰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앤이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애런이었다.

“각하께서 작은 마님을 찾으십니다.”

엘리사는 한숨을 삼켰다.

그가 조만간 자신을 부르리란 것도, 불러서 무슨 말을 할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

달빛이 훤히 비추는 밤.

엘리사는 몸의 실루엣이 다 비치는 얇은 슬립을 입고 침실 앞에 서 있었다. 방문을 붙잡고 있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슬립을 입으라고 한 건 알버트의 명령이었다.

‘내 말을 거역하면 네가 수족처럼 부리는 그 아이들을…….’

그는 앤을 비롯한 하녀들을 두고 엘리사를 협박했다. 그 명령 앞에선 엘리사도 거역할 도리가 없었다.

리하르트는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를 믿고 방문 앞까지 왔지만, 막상 그의 앞에 서려니 불안해졌다.

‘만에 하나라도 리하르트가 생각을 바꾼다면…..’

자의로든, 충동적으로든 그가 생각을 바꾼다면 저로서는 그를 당해 낼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도망갈 수도 없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자고 있길 바라며 천천히 방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발코니 앞에 서서 밖을 보고 있던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일렁거렸다.

엘리사는 급한 대로 팔로 몸을 감싸고 뒤돌았다. 몸을 가릴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주위에 그럴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 엘리사의 등 뒤로 성큼 다가온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에 놀란 엘리사가 돌아보자, 어느새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한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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