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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25화 (25/164)

25화

“리, 리하르트, 이, 이건 그러니까…..”

긴장한 엘리사는 뒷걸음질했다. 포식자의 앞에 선 먹잇감처럼.

겁먹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등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감기 걸리겠어.”

놀라 몸을 움츠리는 엘리사의 어깨를 따뜻한 무언가가 덮어 감쌌다.

새하얀 털로 만든 담요였다.

“먼저 자. 공작이 한 얘기는 신경쓰지 말고.”

엘리사에게 담요를 덮어 준 리하르트는 돌아서 발코니로 향했다.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엘리사는 얼어붙었던 것이 머쓱해졌다.

“리하르트는 아무 생각 없는데 나 혼자 호들갑 떨었나 봐.”

뒤늦게 고맙다고 전하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하르트?”

그가 향한 발코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얇은 옷을 입고 있었던 탓에 온몸이 얼어 있었다.

엘리사는 적당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따뜻한 이불 속에 언 몸을 파묻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그가 사라진 발코니로 향해 있었다.

‘추울 텐데….’

돌아오지 않는 리하르트를 기다리던 엘리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렇게 엘리사가 잠들고 얼마 후, 리하르트가 돌아왔다.

그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엘리사는 발코니 쪽을 보는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이불을 여며 주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 앞에 엘리사의 가느다란 손이 놓여 있었다.

그 손을 가만히 보던 리하르트는 조심스레 그 손 위에 제 손을 얽었다.

평온한 엘리사의 얼굴 위로 조금 전, 잔뜩 겁먹은 채 저를 올려다보던 얼굴이 겹쳐졌다.

엘리사는 저를 어색해하고 무서워했다. 스치듯 손이 닿는 것조차 꺼리는 듯했다.

‘그런 애한테 무슨 소리를…’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합방을 종용했을 알버트를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사실, 그런 옷을 입고 침실로 들어서는 엘리사를 본 순간, 참기 힘든 욕망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제 품에 가두고 그녀의 전부를 탐하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자근자근 씹어 삼키고 싶었다.

눈물도, 숨결도 전부 다.

하지만 겁먹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를 보자, 한 가닥 남아 있던 이성이 욕망을 막아 냈다.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 왔던 순간이지만, 이런 식으로 이뤄져서는 안되었다.

다시 자제력을 잃은 자신이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돌아섰다.

“…기다릴게. 엘리사.”

네가 옆에 있는 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때까지, 내 온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그 옆에 누웠다.

이윽고 그에게도 밤이 찾아왔다.

*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목욕을 마치고 온 엘리사는 침실로 들어섰다. 역시나 리하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나갔나 보네.’

일주일 전의 그 사건 이후, 리하르트는 밤마다 침실을 비웠다.

엘리사가 깨어 있을 시간에 돌아오지 않다가, 잠들면 조용히 돌아왔다.

그리고 엘리사가 깨기 전에 방을 나가곤 했다.

처음엔 그가 난감할 자신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마냥 고마웠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걸까? 가뜩이나 날도 추운데, 밖에 오래 있어도 괜찮은 걸까…….’

엘리사는 그에 대한 걱정으로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발코니 쪽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 우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그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리하르트.”

막 침실로 들어서던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깨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밤마다 나가는 거면 그러지 마.”

엘리사는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방을 따로 쓰는 게 어때?”

알버트는 엘리사와 리하르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노기를 터트렸으나, 협박한 대로 하녀들을 쫓아내진 못했다.

이제 성안에는 그보다 리하르트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리하르트가 원하면 각방을 쓸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리하르트에게 각방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가 각방을 쓰지 않는 건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잠든 그녀를 지켜보고, 옆에서 함께 잠들고 싶어서.

잠시 당황했던 리하르트는 그럴싸한 이유를 둘러댔다.

“그래도 당분간은 같은 방을 써야 조용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럼 네가 불편하잖아.”

“불편하지 않아.”

“그럼 왜 밤마다 나가는 건데?”

“그건 그냥…… 산책하는 게 좋아서.”

얼버무리듯 내뱉은 변명에 엘리사의 눈이 반짝였다.

“날아서 하는 산책은 느낌이 달라?”

“…가 볼래?”

“지금?”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 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쪼르르다가왔다.

흥미로운 주제가 생기자, 언제 저를 경계했냐는 듯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일단 옷부터 따뜻하게 입고.”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시키는 대로 드레스룸에 가서 두꺼운 털이 달린 로브를 입고 나왔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어깨에 두꺼운 담요를 한 겹 더 둘렀다. 상공의 겨울바람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겐 많이 매서울 터였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발코니로 나왔다. 침실은 성에서도 높은 층에 있었다.

처음엔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던 엘리사가 두려운 기색을 내비쳤다.

“……떨어지지는 않겠지?”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나를 안고 있으면 그럴 일은 없어.”

그 말은 즉, 비행을 하려면 그를 놓치지 않고 안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서 그의 팔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리하르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대꾸했다.

“그 정도론 금방 떨어질 텐데.”

그러고는 엘리사를 안아 들었다.

잠시 놀란 듯 얼어있던 엘리사는 눈앞에 펼쳐진 고층의 높이를 실감하고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으며 당부했다.

“저,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어느새 스스럼없이 먼저 안겨 오는 엘리사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그녀를 놓친다고 위험해질 비행이었다면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을 한 보람이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준비를 마친 리하르트는 주위에 바람을 일으켰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진 않지만, 뺨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이 자신이 바람 속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엘리사의 뺨이 얼얼해질 때쯤, 귓가에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엘리사. 눈 떠 봐.”

그 목소리에 엘리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우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만년설들이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고, 그 아래로 드넓은 설원과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 드문드문 작은 마을들과 얼어붙은 호수가 보였다.

그리고 고요한 어둠 속 불빛이 반짝이는 성의 전경도.

이 고요한 풍경이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아름다운 풍경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꼭 꿈꾸고 있는 것 같아.”

이 기분을, 감상을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어서 울컥 속상해질 정도로,

“나, 이 풍경 영원히 못 잊을 거 같아.”

내가 루벨린을 떠난 후에도.

엘리사는 기록해 둘 수 없는 풍경을 제 두 눈과 기억 속에 오래오래 담았다.

리하르트는 제 품 안의 작은 온기를 한껏 끌어안으며 그녀의 눈동자 속 루벨린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알버트는 마음이 급했다.

지금까지는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버텼으나,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염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당사자들에겐 소식이 없었다.

알버트는 답답함과 하루하루 갉아먹는 수명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다.

더 이상 가만히 누워 기다릴 순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해 봐야 했다.

끔찍한 무력함과 좌절감을 느끼며 죽어 가던 그는 보좌관인 애런을 불렀다.

“준비해라.”

태어난 아이까지는 보지 못해도, 배 속에 루벨린의 씨를 품었다는 걸 알아야 눈을 감을 수 있을 터였다.

*

다음 날 저녁.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리하르트는 텅 빈 화장대를 보고 오늘 낮의 일을 떠올렸다.

오늘 낮, 잠시 방으로 돌아왔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드레스들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는 하녀들과 마주쳤다.

‘그걸 어디로 가져가는 거지?’

‘각하께서 마님께 새로운 방을 배정해 주셨어요.’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은 엘리사와 각방을 쓰게 된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무슨 꿍꿍이지?’

엘리사와 자신을 어떻게든 붙여 놓으려고 기를 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방을 배정하다니. 뭔가 수상했다.

의뭉스러운 알버트의 태도 변화에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누가?’

리하르트는 의아해하며 방문을 열었다.

야밤의 방문자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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