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둠이 내려앉은 으슥한 밤.
욕실에 모인 하녀들은 풍염한 여체를 부지런히 단장시키고 있었다.
라벤더를 띄운 물에 새하얀 몸을 씻기고, 꽃잎에서 향을 추출한 향유를 몸에 발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게끔 얇은 천으로 만든 배스 가운을 입혔다.
하녀들은 그녀를 리하르트의 방 앞까지 데려다준 후 사라졌다.
방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여자는 이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켜진 촛불 하나 없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여자는 인기척을 죽이고 침대로 다가갔다.
“..…!”
그런데,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리하르트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남자가… 아니야?’
다시 보니 실루엣이 남자의 실루엣이 아니었다. 실루엣은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여리여리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제야 캐노피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 순간, 달을 지나가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방 안에 달빛이 들었다.
그러자 스며든 달빛에 침대에 앉아 있는 엘리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런 여자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있어서 놀랐겠네.”
“소, 소공작님은…….”
“산책 갔어. 내가 그러라고 했거든.”
엘리사는 알버트가 무슨 일을 벌이 리란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늘 리하르트와 합방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갑자기 각방을 쓰라고 하다니. 이상할 수밖에.
물론 그는 엘리사가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를 방해하진 못하리라 여겼으리라.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엘리사는 그가 리하르트에게 해코지하도록 둘 마음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엘리사는 금화가 든 묵직한 주머니를 여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떠나. 이 돈이면 앞으로 10년은 배꿇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여자는 금화 주머니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 돈에 제가 흔들릴 것 같으세요? 무려 차기 공작 부인의 자리예요. 아이를 낳으면 그 자리가 제 것이 된다고요.”
“그 아이, 리하르트는 원하지 않아.”
“그건 소공작님의 마음이 아니라 부인의 시기심 아닌가요?”
감히 부인이 있는 남자의 방에 찾아온 주제에, 그 부인의 앞에서 하기엔 다소 건방진 소리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이 자리에 온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야.”
하지만 그에 대답하는 엘리사의 목소리는 화가 난 기색도, 비웃는 기색도 없이 담담했다.
“공작 각하는 내가 잘 알아. 누구보다도 루벨린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시지. 그런 사람이 과연 평민 출신 며느리를 받아들일까?”
“…….”
“그분은 네 가치를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신단다.”
거름망 없이 날카로운 지적에 여자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엘리사를 노려보았다.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엘리사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엘리사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 가치는 고작 그런 게 아닐 거야. 그렇지?”
“…….”
“이 돈이면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 사고 싶은 옷, 먹고 싶은 음식,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있지.”
어느새 여자의 곁으로 다가온 엘리 사는 제 또래인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운을 여며 주었다.
“아직 네 가치를 모른다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며 네 가치를 생각해 보렴.”
“…….”
“너를 모르는 남들이 정해 놓은 네 가치가 아닌, 네가 생각하는 너의 가치를.”
엘리사의 말에 여자는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엘리사는 그런 그녀의 손에 금화주머니를 쥐여 주고 일어났다.
*
다음 날 아침, 엘리사는 새로 배정된 제 방에서 눈을 떴다. 리하르트와 서로 다른 방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아침이었다.
엘리사는 앤이 방으로 가져다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리하르트에게 먼저 가야겠어.’
리하르트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아직 몰랐다. 그를 산책 보내는 진짜 이유는 말해 주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으니까.
늦은 밤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여자를 보낼 때마다 그들을 매수할 순 없어. 매수가 먹히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고.”
알버트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룰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일 것이다.
그에 대응하려면 리하르트가 알버트의 계획을 알고 있어야 했다.
식사를 마친 엘리사는 곧장 리하르트의 방으로 향했다.
“리하르트.”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자, 리하르트가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사?”
“잠깐 들어가도 되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성큼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문부터 닫았다. 그런데 문을 닫고 나서야 보였다.
막 씻고 나온 듯, 가슴골이 언뜻언뜻 보이게 목욕 가운을 입은 리하르트의 모습이.
‘흠, 흠…….’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에 향했던 시선을 황급히 얼굴에 고정하며 말을 꺼냈다.
“리하르트, 사실 어젯밤에 너한테 산책 다녀오라고 했던 거 말이야..….”
엘리사가 막 말문을 트던 그때였다. 복도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크 소리로 이어졌다.
“리하르트 님! 안에 계십니까?”
하인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다급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을 느낀 건 비단 엘리사만이 아닌 듯, 리하르트의 표정 역시 미묘하게 굳어졌다.
리하르트는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지, 지금 당장 공작 각하께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온 것인지, 잠시 가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께서…… 위독하십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하인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알버트의 방으로 향했다.
알버트의 곁엔 주치의와 집사 그레이슨, 그리고 보좌관인 애런이 지키고 있었다.
“소공, 마님.”
세 사람은 엘리사와 리하르트에게 예를 갖추며 알버트에게서 물러섰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그 사이로 알버트에게 다가섰다.
알버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운 숨을 쉬고 있었다.
병상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형형히 빛나던 두 눈은 이제 빛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생명을 산화하던 불이 꺼진 것처럼.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주치의는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주치의가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리하르트는 주치의를 돌려보냈다.
이윽고 소식을 들은 가신들이 하나둘 차례로 도착했다. 그들은 알버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물러났다.
이제 방엔 엘리사와 리하르트, 애런과 그레이슨만 남겨졌다. 고요한 방엔 꺼질 듯한 알버트의 숨소리만이 울렸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기색을 살폈다.
리하르트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알버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은 내가 지키고 싶군.”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이었다.
애런과 그레이슨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알버트의 앞에 섰다.
“각하를 모신 것은 제 평생의 영광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다음은 엘리사의 차례였다.
엘리사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죽음이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딱하다 생각했다.
그는 무엇을 위해 평생을 바쳐 아득바득 가문을 일구었을까.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결국, 그도 죽고 나면 흙이 되어 사라질 인간인 것을.
편히 쉬세요.”
엘리사는 한평생을 불살라 살아온 이에게 연민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뜻대로 애런, 그레이슨과 함께 방을 나갔다.
탁.
리하르트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알버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때 저를 죽이려 했고, 평생 자신을 손자가 아닌 대를 이을 종마로만 봐 온 이가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좀 더 오래 사시길 바랐습니다.”
리하르트의 말에 흐릿하던 알버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꺼지기 직전의 불씨 같은 눈빛이었다.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래야 닿을 듯 닿지 않는 염원을 희망하고 좌절하며 끔찍하게 괴로워했을 텐데.”
“…….”
“그런데 이리 서둘러 편하게 가시겠다니.”
잔인한 말을 하는 목소리가 지극히 담담하여 더욱 섬뜩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알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덩달아 미약하던 숨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에도 일순간 감정이 깃들었다.
짙은 혐오가 섞인 증오.
“이제, 나의 루벨린입니다.”
짓씹듯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짙은 감정이 묻어났다.
그런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알버트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네…… 놈이……….”
안간힘을 내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던 알버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숨을 헐떡거렸다.
눈은 충혈되어 붉어졌고, 메마른 입술은 소리를 내뱉지 못한 채 뻐끔거렸다.
그러나 끝내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숨이 멎었다. 동시에 손이 툭 떨어졌다.
리하르트는 채 감지 못한 알버트의 눈을 감겨 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옥에서 지켜보세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