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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27화 (27/164)

27화

북부의 겨울은 혹독했다.

보통 장례를 하면 망자를 땅에 묻는다.

루벨린에선 겨울철에 땅이 얼어 땅을 팔 수 없기에 미리 마을 묘지들을 파 두곤 했다. 시신을 넣고 흙만 덮으면 되도록.

그러나 본성에선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은 터라, 알버트의 시신은 땅이 녹는 봄이 올 때까지 루벨린 성의 지하 묘지에 안치하기로 했다.

장례에는 리하르트와 엘리사, 그리고 루벨린의 가신들이 자리했다.

“마지막으로, 망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장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온 신관이 기도문을 읊었다.

엘리사는 두 손을 포개어 잡고 기도문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떴다. 눈앞의 관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고, 정신적 학대를 가하던 이가 죽었다.

당연히 슬프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후련하지도 않았다.

‘나도 이런데, 리하르트는 더 기분이 묘하겠지.’

세상에 홀로 남은 루벨린의 직계.

이제 리하르트가 바랐던 대로 복수의 칼이 그의 손에 쥐어졌지만, 과연 그 기분은 후련할까.

엘리사는 슬쩍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기쁨도, 슬픔도 드러내지 않은, 감정 한 자락 읽을 수 없는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땐 그래도 까칠한 척 가시라도 세우면서 감정을 표출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표출하는 법이 잘없었다. 마치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전쟁이란 것은 참혹해서, 한 사람의 성격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어린 시절의 리하르트를 잘 알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성으로 막 귀환했을 땐 무감한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키가 훌쩍 커 버렸어도, 성격이 변했어도 그는 그였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내심 저를 신경써 주고 챙겨 주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

엘리사에게 그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안타까웠다.

‘당분간은 이혼을 미루는 게 좋겠어.’

리하르트가 돌아오고 자신이 성인 이 되면 곧바로 이혼하자고 할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알버트가 죽으며 본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이 상황에서 당장 떠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적어도 성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을 듯했다.

‘나도 여름까지는 별장이 완성되지 않을 테니, 그동안 머물 곳 생기고 좋지.’

장례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엘리사는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장례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가신들과 헤어지고 침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왔다.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리하르트의 침실이고, 왼쪽으로 가면 새로 배정된 엘리사의 방이 있었다.

엘리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리하르트와 함께 그의 방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를 불렀다.

“리하르트.”

평소보다 메마른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엘리사는 그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놀라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냥, 안아 주고 싶어서.”

체격 차 때문에 엘리사의 의도와 달리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지만, 엘리사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를 보듬어 안으려고 애썼다.

“고생했어.”

엘리사의 작은 손이 그의 넓은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저를 위로하는 작은 온기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굳어 있던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끌어안으려 팔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사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바람에 목적을 잃은 리하르트의 팔이 허공에 멈췄다.

그 팔을 보지 못한 엘리사는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푹 쉬어.”

리하르트는 돌아서 자신의 침실로 가는 엘리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제야 엘리사가 방을 옮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동안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차마 안지 못했던 제 손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제 품으로 파고들던 그 온기가 그리웠다.

하지만 이젠 두 사람의 합방을 추진하던 알버트가 죽었으니 같은 방을 쓸 명분이 없었다. 부부라고 해도 각자의 방을 사용하니까…

리하르트는 방으로 들어가는 엘리 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제 방으로 들어갔다.

*

황제는 모처럼 만에 펠리스 후작을 오찬에 불렀다.

그는 아직 붉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썰며 이야기를 꺼냈다.

“후작도 들었겠군. 알버트 루벨린이 하직했다는 소식 말이야.”

“예. 마치 제 손자를 기다리기라도한 것처럼 때맞춰 숨을 거두었더군요.”

“결국 그 애송이가 루벨린의 수장이 되었어.”

황제의 말에 스테이크를 썰던 펠리 스 후작의 손이 멈칫했다.

황제는 리하르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이고 싶어 했기에, 펠리스 후작은 꾀를 내어 리하르트를 전장으로 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리하르트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루벨린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제는 공작 위까지 이어받았으니.

황제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탓을 펠리스 후작에게 돌리고 있었다.

“최근에 외지인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라 그쪽에 정착하는 이들도 많다고 하고……. 야금야금 세력을 키우고 있는 거 같더군.”

그는 전쟁의 공을 치하한다는 말에도 황제의 성의를 무시하고 루벨린으로 곧장 돌아간 리하르트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언젠가 자신의 제국에, 현 황제인 자신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이유로 북부의 소식에 상당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엔 외지인을 거부하던 북부에서 외지인들에게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병환으로 누운 알버트 대신 영지를 경영 중이었던 엘리사가 영지의 정책을 바꾼 것이다.

‘그저 어린 계집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군.’

영지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

그것은 영지의 병력, 자본력, 영향력, 모든 것을 키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주들이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은, 외지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여러 변수를 통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직까지는 그 변수들을 훌륭하게 통제시키고 있었다.

제 딸의 자리를 빼앗은 계집아이가 꼴 보기 싫은 루벨린의 세력까지 순조롭게 키워 가고 있으니 못마땅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공작부인이 영지 경영을 꽤 잘하는 모양이더군요.”

그의 걱정을 알아챈 펠리스 후작은 슬그머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미리 손을 써 두었으니까요.”

#4. 첫날밤

앤은 간식거리가 든 쟁반을 가지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창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루벨린에도 서서히 봄이 오고 있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집무실 앞에 도착한 앤은 노크했다. 곧이어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앤은 간식을 들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집무실에 리하르트와 엘리사, 그리고 이젠 리하르트의 보좌관이 된 아가일이 영지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앤은 가져온 간식을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앞에 내려놓았다.

엘리사는 웃으며 앤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마워, 앤.”

엘리사는 다시 리하르트에게 업무를 알려 주기 시작했다.

“하겐 상단은 작년부터 북쪽 에스메랄다 산의 자원을 연구하는 기술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관세를 감면해 주고 있어.”

봄이 오고 땅이 녹으며 영지 내외의 교류가 늘어나고, 한 해를 시작하면서 처리할 일들이 부쩍 많아졌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그 업무를 하나씩 배우고 있었다.

‘두 분, 언제 봐도 잘 어울리네.’

앤은 함께 일하는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흔흔한 미소를 띤 채 지켜보았다.

엘리사는 앤이 태어나서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였고, 리하르트는 가장 강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일을 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항상 엘리사 혼자서 힘겹게 처리하던 일을 리하르트와 함께 처리하고 있으니 그제야 합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앤뿐만이 아니었다.

리하르트의 곁에서 서류를 건네는 아가일 역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앤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마님은……..’

리하르트와 이혼하려는 엘리사의 생각을 알고 있는 앤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자신은 엘리사가 어딜 가든 함께하기로 약속한 몸이고, 그녀가 어딜가서 무얼 하든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안전한 루벨린 성과 리하르트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다 문득, 앤은 잊고 있던 주머니 속 편지를 떠올렸다.

“아, 참. 마님, 이거 조금 전에 온 편지예요.”

“고마워.”

엘리사는 편지 접합부의 인장을 확인했다. 아르덴 백작가의 인장이었다.

그 인장을 알아본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아르덴 백작?”

“예전에 우리 제도에 있을 때, 백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갔었던 거 기억나? 그 친구야.”

“그 녀석이 왜 네게 편지를 보낸 건데?”

“아, 내가 부탁한 게 좀 있거든.”

엘리사는 들뜬 표정으로 편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나의 오랜 친구, 엘리사.

엘리사,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북부에도 봄이 왔겠지?

여긴 예상보다 일찍 날이 풀렸어.

그래서 내가 목수들에게 별장 건축을 좀 서둘러 달라고 닦달했지.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다음 달 중으로 별장이 완공될 것 같아.

그러니 그 시기에 맞춰 옮길 준비하면 될 거야.

이 기쁜 소식이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너에게 닿기를.

너의 절친한 친구, 안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엘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슬쩍 시선을 움직여 봤지만, 현재의 위치에선 편지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들어온 서류는 이게 끝입니다.”

아가일은 리하르트의 서명이 끝난 마지막 서류를 가져갔다.

‘그럼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겠다.’

편지를 다시 넣은 엘리사는 지금 리하르트에게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말해야 그도 준비할 것은 준비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리하르트, 잠깐 시간 괜찮아?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가일과 앤이 자리를 피하고, 집 무실엔 엘리사와 리하르트 둘만이 남겨졌다.

“무슨 일이야?”

“아, 급한 건 아닌데 미리 이야기를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리하르트의 물음에 대답하려던 엘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막상 이혼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남녀가 헤어지는 이혼이 아니라, 8년간 자신과 동고동락한 이 영지를 떠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음이 허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였다.

제 말을 가만히 기다리는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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