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제 우리…….”
엘리사가 말을 꺼내려던 그때, 갑자기 노크도 없이 누군가가 들이닥쳤다.
싸늘한 리하르트의 시선도, 놀란 엘리사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불청객은 톰슨이었다.
톰슨은 숨을 헐떡이며 다급히 소식을 전했다.
“각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서쪽 숲에서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했습니다.”
“몬스터들이?”
“네. 민가를 덮쳐서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리하르트와 엘리사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봄은 만물이 깨어나는 시기.
몬스터들도 봄이 되면 유난히 활동량이 늘어 피해를 끼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엘리사가 8년 전 서쪽 문근처에서 공격당할 뻔한 뒤로는 병력을 증원한 덕에 지금까진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런데 마을이 공격당했다는 건, 루벨린의 기사들이 감당 못 할 숫자의 몬스터들이 몰려왔다는 뜻이었다.
리하르트는 근처 의자에 걸어 두었던 겉옷을 입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엘리사, 이야기는 다녀와서 하자.”
“아, 그래. 조심해.”
겉옷을 입은 리하르트는 창가로 다가가며 톰슨에게 지시했다.
“난 먼저 가 볼 테니, 넌 기사들을 끌고 와라.”
“네, 알겠습니다.”
리하르트는 곧장 창문을 넘어 사라졌다. 뒤따라 톰슨도 집무실을 나갔다.
엘리사는 어느새 멀리 날아간 리하르트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요즘 부쩍 몬스터들의 출몰이 늘었어. 아무리 봄이라지만……….’
얼마 전에도 남동쪽 숲과 북서쪽 숲에서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했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다행히 인적이 드문 숲인 데다, 일찍 발견했기에 영지민들이 피해를 받기 전에 미리 처리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을 움직이게 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엘리사는 도서관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몬스터들의 습성에 관해 연구한 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가일이 노크 없이 들이닥쳤다. 그의 표정 역시 다급했다.
“마님! 루크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본디 루벨린엔 산지가 많고, 눈이 많이 내리기에 기온이 오르는 봄이 되면 종종 눈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엘리사가 루벨린에 온 이후로 두번째로 겪는 눈사태였다.
“다친 사람은 있나요?”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소리가 들려서 미리 대피한 덕에 큰 인명 피해는 없는 듯합니다.”
“피해 규모는요?”
“눈사태가 마을을 덮친 탓에 스무채 정도의 민가가 매몰되었다고 합니다.”
인명 피해가 크지 않다는 말에 엘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집이 매몰되면, 그 집에 살던 이들은 재산은 물론이고 당장에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어지니까.
“피해자들에게 공급할 식량이나 물자를 준비해 줘요.”
“알겠습니다. 금방 기사단을 편성해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서둘러 나가려는 아가일을 엘리사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나도 가겠어요.”
*
엘리사는 아가일, 기사들과 함께 물자를 가지고 눈사태가 덮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앞에서 있는 마을 사람들만이 그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눈더미를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엘리사와 기사들을 보고 만면에 반색을 비쳤다.
“마님!”
엘리사는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친 사람은 없나요? 혹시 매몰된 사람은요?”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만………”
마을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옆에 있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예닐곱 살 정도 된 여자 아이였다.
“오빠가… 오빠가 숲에 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요……….”
울음이 북받친 아이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마을 주민이 상황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오빠랑 둘이서만 사는데, 오빠가 아침에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다행히 서쪽 숲으로 갔다고는 하는데…….”
서쪽 숲이라면 눈사태가 난 곳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아이의 오빠가 눈사태에 휩쓸렸을 확률은 적었지만, 그래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엘리사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아이의 손을 잡았다. 바깥바람을 오래 쉰 탓인지 아이의 손이 찼다.
“이름이 뭐니?”
“……리아나예요.”
“그럼 오빠의 이름은?”
“조나단이요.”
그 이름을 들은 엘리사는 옆에 있던 기사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색을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루벨린의 기사들은 엘리사의 명령을 받고 흩어졌다.
엘리사는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리아나는 아주 용감한 아이구나.
오빠가 없어도 집을 잘 지키고 말이야.”
“……..”
“오빠는 기사님들이 금방 찾아올거야. 그러니까 이거 먹으면서 같이 기다리자. 응?”
아이는 엘리사가 건네는 육포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서 영지민들에게 물었다.
“다들 머물 곳은 있나요?”
“저희는 근처 마을에 동생이 살고 있어서 그쪽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은 엘리사는 옆에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로렌스 경, 성에서 마차를 가져와서 이들을 목적지에 데려다주세요.”
“네, 마님.”
“아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걸로 모자라 친히 이곳까지 와 살펴주시다니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영지민들을 돕는 건 영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답하고는 주변의 다른 영지민들을 돌아보았다.
“또 근처 마을로 갈 사람이 있다면 이쪽으로 와요.”
마을 사람들은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엘리사는 이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나눠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다른 마을로 이동할 이들을 제하고 나자, 이제 딱 네 가족이 남았다.
엘리사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제안했다.
“그대들은 정착지가 정해질 때까지 루벨린 성에서 지내도록 해요.”
“네, 네?”
엘리사의 제안에 마을 사람들은 물론, 기사들과 아가일도 놀랐다.
아가일은 기함하며 엘리사를 말렸다.
“마님,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성에 외부인을 들이시면 치안의 문제가…….”
“첩자라면 자신이 살던 마을에 눈사태를 일으키지 않고도 이미 성에 들어와 있을 거예요.”
아가일은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엘리사의 말이 맞긴 했다.
엘리사는 그런 아가일과 기사들을 보고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난, 루벨린 기사단의 철저한 호위를 믿는답니다.”
난데없는 칭찬이지만, 기사들은 자신들의 노고를 인정받아 기분이 좋은지 엘리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아가일 역시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더 이상 엘리사를 말리지 못했다.
대강 상황을 수습한 엘리사는 기사들과 함께 눈사태에 파묻힌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을의 위치도, 산의 경사도 눈사태가 일어나기 좋은 조건이야.’
눈사태는 아예 경사진 산이나, 완만한 산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을 뒤쪽에 위치한 루크 산은 경사가 적당해 눈사태가 일어나기 좋았다.
그 조건에는 협곡 지형도 한몫했다. 경사도, 협곡이라는 지형적 특성도 여러모로 눈사태의 위험을 유발하는 조건이었다.
‘지형을 바꿀 순 없으니, 마을이 이곳에 존재하는 한 눈사태의 위험은 또 있을 거야.’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아예 마을을 이전하는 것이 다음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엘리사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기사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
“마님. 잠시 이것을 봐 주시겠습니까?”
엘리사는 기사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곳에 흰 털 뭉치처럼 보이는 것네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엘리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건….”
“예티의 사체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눈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어지르고 사람들을 공격했다고 하더군요.”
예티는 눈으로 덮인 산에 사는 몬스터로, 사람을 무서워해 높은 산에 숨어 사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눈사태가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마을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사는 자신의 추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엘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사람을 무서워하는 몬스터들이니, 눈사태를 예감하고 내려온 것이라면 조용히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 있었을 거예요. 숲이라든가, 근처의 동굴이라든가.”
본디 사람을 무서워하는 습성을 가진 몬스터들이 갑자기 인간을 공격한다는 건 이상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의문을 품은 엘리사의 머릿속에 눈사태가 일어나기 전, 몬스터를 무찌르러 갔던 리하르트가 떠올랐다.
근래에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던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때, 루벨린의 기사들이 막 마차들을 끌고 돌아왔다.
엘리사는 우선 이곳의 상황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자, 다들 마차에 타요.”
근처의 다른 마을로 떠나는 사람들을 먼저 마차에 태워 보내고, 그다음으로 성으로 데려갈 사람들을 태웠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조나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사는 마차에 올라타 걱정 어린 눈으로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오빠를 기다리던 아이는 지쳐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가일이 말했다.
“마님, 이 아이와 함께 먼저 성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기사들과 함께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아뇨. 나도 살펴볼 것이 있어요.”
엘리사는 잠든 아이를 성으로 먼저 보내고 아가일과 함께 서쪽 숲으로 향했다.
아가일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곧 눈이 올 것 같습니다. 수색을 서둘러야겠군요.”
기사들은 조금 전까지 수색했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야속하게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북부의 기후적 특성상 한 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족히 반나절은 내릴 텐데.’
눈발이 거세지면 수색을 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수색하는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마님, 눈이 내리고 해가 지면 수색도 어려워집니다. 막사도 지었으니, 저희가 막사에 머물며 아이가 돌아오는지 수시로 확인하겠습니다.
마님께선 성으로 돌아가시지요.”
“로렌스 경의 말이 맞습니다. 눈이 멎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수색을 재개하도록 하죠.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아가일의 말에 엘리사는 입술을 꾹깨물었다. 하나뿐인 가족을 기다리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때였다.
“으악!”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변성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