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타닥, 타닥….
엘리사는 모닥불이 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사위에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모닥불의 불빛이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
엘리사는 천장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늘 보던 공작성의 고풍스러운 천장이 아닌, 거미줄이 가득한 낡은 나나무 천장이었다.
놀라 시선을 돌리던 엘리사는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더 크게 놀랐다.
‘뭐, 뭐야?’
단단한 남자의 몸이 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도 헐벗은 채로, 놀란 엘리사가 그 품에서 벗어나려 꼼지락거리는데, 머리 위에서 나지 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네.”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저를 내려다보는 리하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몸은 좀 어때.”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 누가 날 안아 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고, 그런 저를 안아 준 사람이 리하르트인 듯했다.
엘리사는 그제야 리하르트와 자신이 왜 헐벗고 있는지 알아챘다.
‘벼랑 아래 강으로 떨어진 모양이구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가슴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하며 대답했다.
“괘, 괜찮아.”
하지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나, 조금만 움직여도 닿는 체온 같은 것들이.
거기에,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엘리사는 다시 슬그머니 눈을 내리 깔아 그의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굵고 매끈한 목선과 중심에 불거진 목젖, 그 아래로 곧게 뻗은 쇄골은 오히려 섹시함을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마께에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긴장으로 곤두섰다.
‘으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엘리사는 그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그런 엘리사를 알아챈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다시 제 품에 가두며 말했다.
“……싫어도 오늘은 이러고 자. 너, 아직 몸이 차.”
엘리사는 그 말을 듣고 알아챘다.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의식을 잃은 내내 제 곁을 지키며 온기를 나누어 준 이가 누구였는지도.
“싫지 않아. 좋아.”
엘리사의 대답에 리하르트의 얼굴에 드물게 당황한 빛이 내비쳤다.
그 반응을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그제야 자신의 대답이 이상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 말이 이상하잖아!’
벗고 안고 있는 게 좋다는 말 같잖아! 그냥 네 호의가 좋고 고맙다는 뜻인데!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정정하기도 이상했다.
뻘쭘해진 엘리사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배회하다, 그냥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잠이 올 리 없었다.
눈앞에 자꾸만 리하르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이 어른거렸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 존재를 상기시킬 때마다 심장이 쿵쿵 난리를 쳤다. 심장 소리가 마치 귀에서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차, 착한 생각. 착한 생각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따뜻함을 넘어 이젠 더울 지경이었다. 그 탓인지 갈증까지났다.
결국 엘리사는 모포를 여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왜?”
“모, 목말라서. 마실 것 좀 찾아보게.”
“아까 봤는데 없었어.”
엘리사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버려진 집에 마실 것이 있을 리만무했고, 있다 해도 그것을 마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리하르트가 무언가 생각난 듯 벗어 둔 옷 더미에서 가죽 물병을 찾아냈다.
“술은 있는데.”
북부의 남자들은 항상 독한 술을 가지고 다녔다. 추운 겨울, 체온 유지를 위한 생존 물품인 셈이었다.
“마실래.”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술을 받아 벌컥 들이켰다. 독한 술답게 넘기자마자 목구멍부터 윗배까지 홧홧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목을 축인 엘리사는 술을 다시 리하르트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리를 모아 접고 앉아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히끅…….”
멍하니 벽난로의 불빛을 바라보던 엘리사의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늘 생기가 가득하던 두 눈도 반쯤 풀린 채였다.
고작 술 몇 모금에 취해 버린 것이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는 물 마시는 것처럼 마실 수 있다더니.”
“그거언, 맥주였고 이건 다른 거잖아아…….”
엘리사는 혀가 꼬인 소리로 리하르트의 말에 불만을 토로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직 몸이 차가운 엘리사가 걱정이 된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위로 모포를 한 겹 더 둘러 주었다.
그러자 반쯤 풀어진 엘리사의 눈이 리하르트에게로 향했다.
“고마워, 리하르트.”
“…….”
“나 구해 줘서.”
“…….”
“이렇게 잘 커 줘서. 그리고…….”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친 엘리사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마워.”
그런 엘리사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진 줄도 모른 채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자 딸꾹질이 완전히 멎었다.
잠시 말없이 있던 리하르트가 엘리 사에게 말했다.
“더 자. 아직 아침이 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그동안 체력을 회복해 두는 게…….”
“싫어.”
“……그럼 안 자려고?”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랑 알몸으로 부둥켜안고 자야 하는데. 잠이 올 리가 없잖아.”
엘리사의 솔직한 말에 리하르트는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안 오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와는 서로 다른 감정으로, 엘리사는 그저 사심 없이 현 상황에 대한 불편을 토로하는 것이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위험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체온을 나눠 주고 있는지,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는지.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무방비하게 투정을 부리는 저 말간 얼굴에 심술이 났다.
“그래 보여?”
“응?”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냐고.”
아무런 위기감 없이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멈칫했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던 리하르트의 눈빛이 욕망으로 짙어져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술에 취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눈을 피하지 않으면, 저 눈빛에 집어삼켜지리란 것을.
엘리사는 도망치듯 그 시선을 피했다.
“나, 난 이제 잘래.”
그리고 일어나려 발에 하중을 실었다. 그 순간, 술기운에 균형을 잃은 몸이 옆으로 휘청 넘어갔다.
“아.”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바닥에 머리를 찧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머리를 받쳐 안았다. 그 바람에 리하르트가 위에서 엘리사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엘리사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고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조금 전과 달리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짐승의 그것처럼.
엘리사는 그 눈빛에 숨을 멈췄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제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눈이었다.
그렇게, 조금 전까지 익숙한 친구였던 그는 삽시간에 완벽히 낯선 남자가 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당장 이 눈을 피하지 않으면 돌이 킬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루비색의 아름답고 위험한 그 눈에서 시선을 뗄수가 없었다. 그 눈을 바라볼수록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엘리사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리하르……….”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부르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엘리사의 입술을 덮었다.
말캉하고 촉촉한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 온다. 그 틈으로 뜨거운 숨결이 넘어왔다. 그 숨결이 달콤했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왔던 입술은 금세 떨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맞붙었다.
이번엔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에 놀란 엘리사의 몸이 움찔떨렸으나,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아니,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는 그의 단단한 품에 갇힌 채 얌전히 그를 받아들였다.
난생처음 맞닿은 타인의 숨결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리고 지독했다.
그는 제 숨결을 모두 빼앗고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집요하게 달려들어 파헤치고, 먹어 삼켰다.
“으응…….”
숨이 막힌 엘리사가 몸을 떨자, 리하르트의 움직임이 멎더니 곧장 엘리사에게서 떨어졌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핏빛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어리더니, 이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술기운이 오른 엘리사의 눈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물기 어린 붉은 입술.
부드럽고 다디달던 그의 입술만이 보였다.
리하르트는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사의 시선을 피하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안, 난…….”
그렇게 말하며 엘리사를 눕히고 떨어지려던 순간, 엘리사의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쥐며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금 전 제 입술을 앗아간 그 얄미운 입술을 도로 빼앗았다.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리하르트의 몸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한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무방비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의 조심스럽던 입맞춤과는 달랐다.
그의 거친 호흡이 온통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았다. 입안도, 머릿속도. 전부.
그럼에도 그 입술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해서, 잠시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조차 아쉽고 아까웠다.
찰나의 순간 마주치는 눈빛도, 입술 위로 탄식처럼 흩어지는 한숨마저도 달았다.
호흡이 가빠질수록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엘리사를 괴롭게 했다.
엘리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그만이 줄 수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그의 달콤한 입술이 그녀의 차가운 몸을 부드럽게 녹이기 시작했다.
한평생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베어 온 손이었으나, 그녀를 어루만지는 손길만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저가 그녀를 다치게 할까 부드러웠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리하르트…….”
젖어 든 연둣빛 눈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엘리사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애원하듯 저를 바라보는 그 눈을 본 순간,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리하르트의 이성이 날아갔다.
그저 제 품 안의 작은 체온을, 체향을 탐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움직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이윽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달콤한 감각과 함께 몰아친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언 몸을 완전히 녹였다.
“……엘리사.”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눈과 입술 언저리에 가볍게 쪼듯이 입을 맞추며 그녀를 불렀다.
엘리사는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색색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뒤늦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 작고 여린 몸으로 저를 기어이 받아 내게 한 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한 것도 미안했다.
“미안해.”
그때, 그의 입맞춤에 답하듯 엘리 사가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흠칫 놀란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말갛게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녹안이 마찬가지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언젠가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랐다.
‘처음은 그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말고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
그 말을 들었던 그날부터, 단 한 순간도 너를 욕망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그래서 이 순간이 마냥 가슴 벅차고 기뻤다. 수 년간 간절히 꿈꿔 왔던 순간이었으니까.
“엘리…..”
리하르트는 수 년간 간직해 온 제 감정을 고백하려 입을 열었다, 도로 다물었다. 그새 엘리사의 눈꺼풀이 굳게 닫혀 있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잠든 그녀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한숨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엘리사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누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