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부인!
각하!
“으응…….”
꿈속을 헤매던 엘리사는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문틈 새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과 낯선 천장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려 애쓰던 엘리사는 멈칫했다.
‘으, 기억이…….’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또렷이 기억났다.
몬스터를 피하려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 그런 자신을 리하르트가 구해 준 것,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그리고, 술로 조각조각 난 기억 속에 새겨진 온통 살색의 향연.
‘꾸, 꿈이겠지?’
엘리사는 믿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떨쳐 내려 했지만, 지우려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차라리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나으련만. 뜨문뜨문 남은 기억은 그녀를 더욱 괴롭게 했다.
리하르트, 빨리…….
그의 입술을 훔치고, 그것으로 모자라 최대한 저를 배려해 주려는 그를 재촉하며 절박하게 매달리기까지했다.
‘말도 안 돼! 진짜 미쳤나 봐! 어떻게 그럴 수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려 고개를 내젓던 엘리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발견했다.
저를 품에 안은 채 잠들어 있는 리하르트를.
그 기억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는 헐벗고 있었다.
게다가….
‘온몸이 아파…..’
조금만 움직여도 격통이 느껴졌다.
특히나 허리가 많이 아팠다.
그뿐만 아니라, 어제 찬물을 잔뜩 뒤집어쓴 탓인지 감기 기운마저 있는 듯했다.
그래도 이대로 현행범이 될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옷이라도 입을 생각으로 리하르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팔은 엘리사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더욱더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잖아도 가깝던 그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며 몸이 밀착됐다. 그에 엘리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는 사람 힘이 왜 이렇게 세? 자는 거 맞아?’
엘리사가 그의 팔 하나를 붙잡고 낑낑거리던 그때, 그 움직임을 느낀 리하르트가 눈을 떴다.
그와 눈이 딱 마주친 엘리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은 좀 어.”
“미안해, 리하르트!”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엘리사의 몸 상태부터 살피려던 리하르트는 멈칫했다.
엘리사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입술을 짓씹었다.
“어젠 내가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
“미안하다는 말로 될 일이 아니지만…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일 없을 거야.”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엘리사는 그것이 오늘 일로 그의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일은 분명, 그가 원한 일이 아닐 테니까.
“엘리사.”
리하르트가 한숨을 삼키며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였다.
“마님! 각하! 근처에 계십니까?”
멀지 않은 곳에서 톰슨과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는 흠칫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저들이 자신과 그를 발견하기 전에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열이 오른 머리가 핑글 돌며 몸에 힘이 풀렸다.
“……엘리사?”
엘리사는 저를 끌어안는 리하르트의 온기를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
성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그대로 앓아누웠다.
의사는 단순한 감기 몸살이라고 했지만, 리하르트는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열에 시달리는 엘리사를 보며 자책했다.
‘내 잘못이다.’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았던 엘리사인데 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저질러 버렸다.
그걸로 모자라, 처음이라 힘들었을 그녀를 배려하지 못하고 밀어붙였다.
자그마치 8년을 억눌러 왔던 감정이었다. 한 번 터지고 나니 도무지 자제가 되지 않았다.
문득 언젠가 엘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은 그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말고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
‘왜?’
‘어? 그야… 사랑하는 사람이랑은 모든 소중한 순간을 나누고 싶으니까?’
엘리사가 매달렸어도 밀어내야 했다. 천천히 그녀의 마음부터 얻고 그다음에 그녀를 안았어야 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고, 그랬어야 했는데….
‘이 얼굴을 어떻게 밀어내.’
저를 필사적으로 끌어안던 그 손길도, 제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작은 온기도, 애원하듯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도, 눈물로 젖어 든 눈도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와 서로 처음을 나누었으니 순서는 틀렸더라도 서로의 마음이 맺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될 일이 아니지만…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일 없을 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리하르트는 그녀와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열이 오른 엘리사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는 그녀에게 느꼈던 야속한 마음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변했다.
동시에 그 자괴감과 별개로 자꾸만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고 욕망을 주체 못 하는 제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미친 새끼.”
엘리사를 간호하며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피던 앤은 갑작스러운 리하르트의 욕설에 흠칫 놀랐다.
아까부터 아픈 엘리사를 보며 서릿발 같은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더니, 이젠 욕까지 했다.
‘무, 무서워……..’
물론 앤에게 리하르트는 무서울 수밖에 없는 상전이지만, 그래도 엘리 사가 옆에 있을 땐 그리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엘리사 옆의 리하르트는 항상 묘하게 누그러져 있었으니까.
앤은 리하르트가 방에서 빨리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런 앤의 바람을 누가 듣기라도 한 것인지 노크 소리가 울렸다.
“각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하르트는 그 목소리를 듣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열에 달뜬 엘리사의 얼굴을 잠시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돌아서 방을 나왔다.
밖엔 톰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께선 좀 괜찮으십니까?”
“조금씩 열이 떨어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다. 용건은?”
“아, 다름이 아니고 어제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했었던 일 말입니다.”
톰슨은 리하르트에게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최근에 부쩍 몬스터들이 단체로 날뛰는 일이 많은 게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어제 몬스터의 몸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리하르트는 톰슨이 내민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엔 붉은빛으로 빛나는 검은 돌이 들어 있었다.
“악마의 영혼석이군. 이걸 어디서 발견했지?”
“어제 대치했던 다이어울프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다이어울프뿐만이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의 몸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엔 영혼이 완전히 잠식되기 전이라 티가 나지 않았던 것 같고요.”
악마의 영혼석은 루벨린 영지의 북서쪽에 있는 협곡 안쪽의 땅에서 나는 돌이었다.
그것을 흡수한 자는 영혼을 서서히 잠식당하여 목숨을 잃고, 몸만이 남아 주위의 생명체를 공격하는 괴물이 되었다.
협곡에 사는 몬스터들 역시 그것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오염된 땅에서 빼 온 악마의 영혼석을 루벨린 영지 근처에 사는 몬스터들에게 주입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결계가 쳐져 있을 텐데.’
협곡 안쪽의 땅은 오염된 땅으로, 몇몇 식물과 몬스터들만이 살고 있었다.
선조들은 루벨린 영지의 평화, 나아가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오염된 땅으로 향하는 협곡에 결계를 쳐 두었다.
일반인들은 협곡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그런데, 누군가가 그 결계를 넘어가 악마의 영혼석을 가져왔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리하르트는 서늘한 눈으로 악마의 영혼석을 바라보다, 톰슨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협곡을 조사하러 가야겠다. 준비해.”
*
리하르트는 기사들과 함께 이틀을 쉬지 않고 꼬박 달려 협곡에 도착했다.
오염된 땅으로 향하는 길목은 협곡의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곳은 생존력이 강한 몇몇 식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이었다.
사시사철 안개가 가득한 황무지 위에 성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협곡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 병사들이 있습니다.”
마침 주위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이 보였다. 협곡 주위를 지키던 이들이었다.
무심코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톰슨은 멈칫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주변을 서성이는 병사들의 몸에서 검은 오라가 흘러나와 넘실대고 있었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정화의 검은 부서지거나 사라져 있었다.
정화의 검은 정화의 힘이 깃든 검으로, 평소에 일반 검과 다를 바 없으나 악마의 영혼석에 잠식당한 생명체를 정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세리어트의 선조 중 하나가 협곡을 지키는 루벨린을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모두 악마의 영혼석에 영혼을 완전히 잠식당했군요.”
그들은 이미 서로 죽고 죽인 탓에 거의 전멸한 상태였고, 주위의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배회하는 병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저들에게 안식을 주어라.”
리하르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영혼을 잠식당한 병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루벨린의 기사들은 정화의 검을 빼내 들고 그들에게 맞섰다.
정화의 검으로 영혼이 잠식당한 병사들을 찌르자, 그들의 안에 흡수되었던 악마의 영혼석이 깨졌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은 평범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한 리하르트는 협곡으로 다가갔다.
협곡 안쪽은 땅으로 막힌 듯 보였지만, 이는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협곡의 입구를 가려 놓은 결계였다.
리하르트가 강풍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안개를 몰아내자, 결계를 이루던 마나가 약해지며 협곡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리하르트는 기사들과 함께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자욱한 물안개를 헤치고 한참 들어가자, 황폐한 평야가 나왔다.
그 평야의 한편에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땅도 공기도 탁한 곳에 있는 맑고 깨끗한 호수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호수를 본 아가일은 단번에 알아챘다.
“저곳이 정화의 호수군요.”
아렌시아를 건국한 네 개의 가문중 하나인 세리어트 가문의 선조 아리엔은 이곳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넣은 호수를 만들었다.
자신의 힘이 이 협곡을 넘어 제국으로 나가려는 악한 기운들을 막길 바라며.
삿된 힘에 눈이 먼 자들이 간혹 결계를 넘어 오염된 땅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오염된 땅의 마물들이 결계를 넘어 제국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이 호수는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협곡의 문을 지켜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누군가가 결계를 넘어 이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악마의 영혼석을 가지고 나가 그 힘을 악용했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모두 주위를 경계해라.”
“예.”
리하르트는 기사들과 함께 오염된 땅 안쪽으로 향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리하르트 역시 오염된 땅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기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하지만 경계를 한 것이 무색하게도, 한참을 들어가도 아무 일이 없었다.
그에 슬슬 기사들의 긴장이 풀어지던 그때였다.
“각하.”
무언가를 발견한 톰슨이 다급히 리하르트를 불렀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리하르트의 시선은 이미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리하르트의 시선 끝에 검은 인영이 멀거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