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처음엔 영혼을 잠식당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의 형태로 검은 오라를 띠던 병사들과 달리 그것은 사람의 형태만 하고 있을 뿐,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리하르트는 다가가려는 기사들을 멈춰 세웠다.
“내가 가 볼 테니,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해.”
“저희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설불리 다가가시면 위험합니다.”
“아니. 너희들보다 내가 더 빠르다.”
기사들은 리하르트의 처사가 불안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공격을 피하는 공격을 하는 자신들보다는 가문의 힘을 가진 리하르트가 압도적으로 더 빠를 터였다.
리하르트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사람의 형태를 띤 괴물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것 역시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리하르트는 걸음을 멈췄다.
그것에겐 눈이 없지만, 마치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는 사람인가?”
괴물체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리하르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던 리하르트는 주위에 바람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지를 지닌 자라면 멈춰라.”
“…….”
“멈추지 않는다면, 이지를 상실한 것으로 판단하고 안식을 주마.”
하지만 괴물체는 리하르트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다가왔다.
리하르트는 폭풍을 만들어 그것을 허공에 띄웠다가, 가차 없이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강한 충격을 받은 괴물체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그것이 말을 하지 못하는 괴물체라 생각하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괴물체에게서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 기다… 렸다. 나의…… 염원……….”
리하르트가 그 말에 의문을 가진 그 순간, 괴물체의 몸이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톰슨과 기사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래.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지.”
리하르트는 기사들과 함께 돌아섰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의 뇌리에는 조금 전 괴물체가 남긴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나의…… 염원……….’
이상하게도, 그 말이 마치 자신을 향한 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감기 몸살에 시달리던 엘리사는 꼬박 나흘을 앓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엘리사는 아침을 먹으며 앤에게 물었다.
“앤, 그동안 무슨 일 있었니?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 것 같은데.”
“최근에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했던게 악마의 영혼석 때문이라고 밝혀졌어요. 그래서 각하께서 직접 오염된 땅을 조사하러 가셨어요.”
“악마의 영혼석이라고?”
엘리사의 표정이 놀라 굳어졌다.
악마의 영혼석이 몬스터에게서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그것을 가져와 몬스터에게 주입했다.
는 뜻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루벨린의 몬스터가 흉포해지면 루벨린의 영지민들은 필연적으로 공포에 떨게 된다.
그럼 루벨린이 위험한 땅이라는 소문이 날 것이고, 그 소문을 듣고 영지를 떠나는 사람들도 생길 터였다.
‘루벨린의 인구가 줄어들면 루벨린의 영향력이 약해지겠지.’
그런 사람은 많겠지만, 가장 바라는 사람은 아마……….
‘황제인가.’
엘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쟁에서 죽길 바랐던 리하르트가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것으로 모자라 루벨린의 수장이 되었으니, 불안한 것이리라.
자격지심을 느끼고 루벨린과 리하르트를 무너트리려는 황제의 수작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우쭐하기도 했다.
아렌시아의 황제가 견제하는 건 수많은 귀족들 중에서도 오직 리하르트 하나뿐이다.
즉, 그만큼 루벨린이 강하다는 방증이 되었다.
‘아무튼 그래서 리하르트가 안 보였던 거구나.’
고열을 앓는 와중에도 언뜻언뜻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리하르트를 볼 수 있길 바랐다.
오두막에서의 일이 그와 자신의 사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고, 예전과 같은 그의 태도를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뜰 때마다 리하르트는 곁에 없었다. 그것이 내심 엘리사를 불안하게 했었다.
그런데 일이 있었던 것이라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이것도 드세요.”
식사를 마친 엘리사의 앞에 붉은색 꽃이 떠 있는 찻잔과 해바라기 씨처럼 생긴 씨앗들이 담긴 작은 그릇이 놓였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앞에 놓인 것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뭐야?”
“이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차래요. 몸에 스며든 찬 기운이 몸을 약하게 할 수 있다고, 각하께서 마님께 꼭 먹이라고 하셨어요.”
“이 검은 건?”
“떨어진 기력을 회복시켜 줄 약이래요. 뭐라더라, 엄청 희귀한 꽃의 씨앗이라던데. 아무튼 다 드셔야 해요!”
앤은 엘리사가 약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볼 기세였다.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챙겨 주고 간차와 씨앗을 물끄러미 보다가 찻잔을 들었다.
‘내 걱정 했구나…….’
어릴 때도 늘 아닌 척 자신을 생각하던 그였다. 그런데도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챙겨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차를 다 마신 엘리사는 앤에게 은근슬쩍 리하르트의 동태를 물었다.
“앤, 각하의 기분은 어때 보였어?”
“음……. 나빠 보이셨어요.”
“……나빠?”
“네. 혼잣말로 ‘미친 새끼’라고 욕하시다가 나가셨어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 말에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그 일이 마음에 걸렸던 거야.’
침울해졌던 엘리사는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치만! 저도 좋아서 막, 막…… 그래 놓고는!’
물론 술 때문에 기억은 조각조각났지만, 그래도 그 기억 속의 리하르트는 오히려 울먹이는 저를 달래며 능숙하게 이끌었었다.
엘리사가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삐쭉이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던 그때, 하녀가 노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소식을 알렸다.
“마님,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 소식에 엘리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리하르트의 침실로 향했다.
막 계단 쪽에 다가서는데, 때마침 방으로 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하르트!”
뒤돌아보는 리하르트를 마주한 엘리사는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오두막에서의 일 이후 그를 제정신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잔뜩 흐트러져 있던 그날 밤의 얼굴이 떠오르며 열이 확 올랐다. 잘 다녀왔냐고 늘 하던 인사조차 건네기가 부끄러워졌다.
“잘 다녀왔다”
엘리사가 가까스로 인사를 건네며한 발짝 다가서자,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한 박자 늦게 무언가 깨달은 듯 걸음을 물렸다.
“…다음에.”
“응?”
“다음에 이야기하자.”
“아……. 그래.”
그에게 다가가던 엘리사의 걸음이 멈췄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잠시 바라보다, 그대로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엘리사는 닫힌 문을 멋쩍은 듯 바라보다 돌아섰다.
*
리하르트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벗어 던진 겉옷에 정체 모를 기분 나쁜 검은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잠식당한 병사들과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묻은 것들이었다.
그 시신과 사체들을 살펴본 아가일이 당부했다.
당분간은 타인과의 접촉에 유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들은 별문제 없겠지만, 약한 사람에겐 나쁜 기운이 옮은 적 있다는군요.
사실 리하르트는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엘리사를 만나고 싶었다.
제일 먼저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미처 하지 못한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가일의 당부 때문에 엘리 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감기에 시달리다 며칠 만에야 겨우 일어날 정도로 약한 그녀에게 혹시라도 악한 기운이 옮아갈까 봐 겁이 났다.
그녀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악한 기운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당분간은 거리를 두는 게 나을 듯했다.
안쪽 셔츠까지 벗자, 굴곡이 진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몬스터들의 피가 안쪽까지 스며든 건지 피부에도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불현듯 협곡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
‘오래…… 기다…… 렸다.
의…… 염원………..’
그것의 정체는 도대체 뭐였을까.
그곳에서 마주쳤던 괴물체를 떠올리자,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리하르트는 물을 끼얹어 악한 기운을 씻어 내렸다.
하지만 그가 보지 못한 사이, 검은 기운은 씻겨 내려가지 않고 그의 등 한쪽에 스며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오자, 아가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협곡 근처에서 발견된 깨진 뱃지를 살펴봤는데, 뒷면의 핏자국을 지워 보니 로하스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로하스라면 로하스 자작가인가?”
로하스 자작가는 황제파의 귀족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정확히는, 황제의 사돈인 펠리스후작가의 잔심부름을 하기로 유명했다.
연결고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도로 사람을 보내어 로하스 자작가를 염탐하게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제도로 갈 거니까.”
“그럼 채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는 언제쯤 마치면 될까요?”
“사흘 안으로.”
“명 받들겠습니다.”
아가일은 리하르트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런 아가일의 뒷모습에 리하르트가 뒤늦게 덧붙였다.
“엘리사도 제도로 데려갈 테니, 준비하라고 전해.”
황제가 자신만이 아닌, 루벨린 전체를 노리기 시작한 이상 엘리사를 자신이 없는 곳에 두고 갈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