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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3화 (33/164)

33화

저녁 식사 시간.

엘리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식당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리하르트, 아까 날 피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마음은 이해했다.

8년을 친구이자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상대와 그런 짓을 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충동적이었던 그날 밤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그럴 테지.

특히나 그는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알버트가 보낸 여자들도 밀어내며 관계를 거부해 왔던 사람이니까.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거겠지.’

엘리사 역시 그랬다. 단순히 하룻밤의 불장난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8년간의 정이 있는데-물론 거의 떨어져 지냈고 편지를 주고받은 게 다지만-저렇게 피하니 내심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그냥 사고라고 하자. 부부 사인데, 뭐. 그럴 수도 있지.’

곧 이혼할 부부긴 하지만, 어쨌든.

엘리사는 어떻게든 그와의 이 어색한 관계를 풀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런 식으로 그와 껄끄럽게 지낸다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식당 앞에 도착하자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또 그날 밤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엘리사는 식당 문을 열려는 그레이 슨을 다급히 불렀다.

“그, 그레이슨, 잠깐 -”

“네?”

그러나 식당 문은 이미 열린 뒤였다. 그런데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리하르트는 식당에 없었다.

‘아직 안 왔나?’

엘리사는 먼저 자리에 앉아 리하르트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하인들이 음식을 차리고 물러났다. 그의 자리엔 식기가 없었다.

그에 의아함을 느낀 엘리사가 그레이슨에게 물었다.

“그레이슨, 각하께선 식사를 안 하시나요?”

“아, 제가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그레이슨은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덧붙였다.

“오염된 땅에는 악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많은데, 간혹 그 악한 기운이 약한 사람에게 옮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여 당분간은 식사를 따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는 그레이슨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이밍이 타이 밍인지라 리하르트를 향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겠어요.”

엘리사는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집무실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리하르트는 제도로 떠나기에 앞서 영지 업무를 미리 처리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리하르트, 여기 있어?”

엘리사의 목소리였다.

청아한 그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심장이 뛰다가, 그녀에게 다가가선 안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가라앉았다.

리하르트는 검토하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잠깐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어. 바빠?”

“괜찮아. 얘기해.”

마음 같아선 그녀와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녀에게 악한 기운이 옮아갈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순 없었다.

대신 문 가까이로 다가섰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있지그날 일 말인데…….”

문으로 다가서던 리하르트의 걸음이 멈칫했다.

오염된 땅에 가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지만, 엘리사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자 리하르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다음 말은 그의 심장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네가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 같아서.”

“그날 일은 그냥… 사고 같은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우리는 부부니까, 그렇게 문제가 될 일도 아니고……….”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의 눈이 싸늘하게 침잠했다.

사고? 부부니까?

정말 그날 일을 그저 부부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라고 여기는 건가.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는 걸까. 너는.

“그러니까 없었던 일이라 생각하고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던 엘리사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주한 그의 눈은 엘리사가 봐 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난 그럴 마음 없어.”

단호하게 엘리사의 말을 자른 리하르트는 그제야 금기를 깨닫고 흠칫했다.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만 돌아가, 엘리사. 당분간 가까이 오는 건 위험하니까 오지 말고.”

문 너머의 엘리사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으니 그녀가 자신의 말뜻을 이해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그럼…잘 자, 리하르트.”

엘리사의 발소리가 차츰 멀어지더니,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놀라 동그래진 연둣빛 눈과 마주친 순간, 무심한 그녀에게 느끼던 야속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그녀의 앞에선 태양 앞의 눈처럼 허물어져 버리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한심한 놈……….”

이 와중에도 며칠 만에 가까이서 본 엘리사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제게, 그렇게 지독히도 잔인했다.

*

사흘 후, 리하르트의 지시대로 루벨린 공작가의 일원들은 제도로 향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와 서로 다른 마차에 탔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며칠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그럴 마음 없어.’

그 말을 들은 순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서릿발처럼 싸한 냉기를 풀풀 풍기는 리하르트의 표정을 보니, 그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자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여간, 악당 가문의 수장이면서 은근히 도덕적이라니까.”

그의 그런 면을 좋아하지만, 그가 괜한 데 감정을 쓰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이니까.’

엘리사가 제도로 향하는 데는 리하르트의 지시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혼 준비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제도에 도착하면 이혼 얘기를 꺼내고, 안셀을 만나 별장 이야기를 들을 생각으로 제도로 향했다.

마음은 뒤숭숭했으나, 그래도 간만에 루벨린을 벗어나 따뜻한 남쪽으로 가게 되어 기분이 새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길이 고통스러워졌다.

‘속이 울렁거려….’

처음엔 책을 읽거나, 앤과 카드놀이를 하며 지루한 마차에서의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 아카로아가 점점 가까워질 무렵이 되자, 멀미가 심해지고 잠이 늘었다.

거기에 감기 기운까지 겹쳐 털 이불을 덮고도 혼자 덜덜 떨기도 했다.

앤은 그런 엘리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님,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할까요?”

“아냐, 그러지 마. 자면 괜찮아질 거야.”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이야기하자는 앤을 말렸다. 괜히 자신 하나 때문에 여정에 차질이 생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앤은 엘리사가 잠들자마자 리하르트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리하르트는 곧장 마차를 멈추고 한달음에 엘리사의 마차로 왔다.

‘이제 한 달 가까이 지났으니 악한 기운도 다 빠졌겠지.’

리하르트는 걱정 어린 눈으로 엘리 사의 상태를 살폈다.

멀미가 심한 것인지 안색이 창백했다. 이마를 짚어 보니 미미하지만 열도 있었다.

당장이라도 의사에게 엘리사의 상태를 보이고 싶었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은 여기서 마차로 네 시간 거리에 있었다. 아픈 엘리사에겐 오히려 돌아가는 길이 더욱 힘들 터였다.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아가일에게 지시했다.

“오늘은 여기서 묵을 것이니 준비해.”

“네, 각하.”

루벨린 공작가의 사람들은 길가에 천막을 치고 야영지를 만들었다.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를 조심스럽게 안아 천막 안의 간이 침상에 눕혔다.

그 기척을 느낀 엘리사가 힘겹게 눈을 떴다.

“……리하르트?”

“말하지 그랬어. 좀 쉬다 가자고.”

“멀미는 계속 나는 건데, 계속 쉬자고 할 순 없잖아. 난 괜찮아.”

엘리사는 괜찮다고 했지만, 리하르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무어라고 말하려던 그때, 천막 밖에서 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식사를 가져왔어요.”

“들어와.”

앤은 빵과 포타주 등이 담긴 쟁반을 들고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그때, 식사를 하려고 일어나던 엘리사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여정 초반까지는 맛있게 먹던 포타주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입맛이 뚝 떨어지더니, 오늘은 급기야 역하게 느껴졌다.

창백하게 굳어진 엘리사의 표정을 본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엘리 사를 보았다.

“엘리사?”

“나 괜찮… 읍!”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대답하려던 엘리사는 결국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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