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4화 (34/164)

34화

#5. 임신

엘리사는 근처 풀숲에서 속을 게워냈다. 그 고통에 눈물이 찔끔 났다.

“엘리사, 괜찮아?”

뒤따라온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아….”

속을 다 게워 낸 엘리사는 진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조차 못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재빨리 끌어안아 제게 기대게 했다.

제 등을 쓸어내리는 그의 커다란 손은 따뜻했고, 저를 감싸 안은 품은 든든했다.

엘리사는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겨우 숨을 돌렸다.

굳은 표정으로 그런 엘리사를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말했다.

“내일 마을에 가서 의사를 데려올게.”

“그냥… 오늘따라 유독 멀미가 심한 거야. 괜찮아.”

“앤의 말로는 멀미만이 아니라 입맛도 떨어졌다던데. 계속 미열도 있고.”

“그럼 아카로아에 도착해서 진찰받을게. 난 하루라도 빨리 저택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리하르트는 여전히 불안한 듯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더 이상 제 주장을 피력하지 않았다.

엘리사의 말대로 여정을 빨리 끝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 이제 괜찮아. 어서 가서 식사해.”

“같이 먹자.”

리하르트의 말에 엘리사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아, 아니. 난 앤이랑 먹을게. 간단하게 먹고 쉬고 싶어.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먹어.”

엘리사는 가지 않으려는 리하르트를 안심시키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천막에 데려다주고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리하르트가 나감과 동시에 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쪼르르 다가왔다.

“마님, 괜찮으세요……?”

“앤, 미안하지만 그 포타주 좀 밖으로 치워 줄래?”

엘리사는 천막에 번진 포타주 냄새에 다시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고 앤에게 부탁했다.

“아, 네!”

앤은 서둘러 그것을 가지고 나갔다.

천막 안에 혼자 남겨진 엘리사는 텅 빈 천막 안을 멍하니 둘러보다가 제 배에 손을 얹었다.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배에 얹은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나…….’

리하르트에겐 멀미라고 둘러대었지만, 엘리사는 자신의 증상을 알고 있었다.

이번 달엔 아직까지 달거리가 없었다.

*

“주치의를 데려와라.”

리하르트는 제도에 있는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주치의부터 데려오라고 했다.

그에 엘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정말 임신이라면…… 리하르트가 이 아이를 좋아할까?’

리하르트는 반평생 자신을 종마 취급하는 알버트에게 시달리며 살아왔다.

나는, 내 손으로 이 가문의 대를 끊으려고 여기 온 거야.’

그런 그에게 ‘아이’는 그가 평생 꿈꿔 온 복수를 망칠 존재일 것이다.

게다가 원작에서의 그는 원치 않게 생긴 아이를 끔찍이 혐오하여 배 속의 아이를 죽이려고 했었지 않나.

‘그렇게는 안 돼.’

아직 존재조차 불분명하지만, 본능적으로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만류했다.

“나 오늘은 좀 피곤한데, 진찰은 내일 받으면 안 될까?”

“잠깐이면 돼. 진찰만 받고 자.”

평소 같으면 엘리사의 말을 따라 줄 리하르트가 이번엔 단호하게 나왔다.

엘리사는 제 걱정을 해 주는 그가 내심 고마웠지만, 이번만큼은 답답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결국 주치의 모리스가 엘리사를 진 찰하러 왔다.

리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명령했다.

“요즘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군. 상태를 살펴보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해 주었으면 하는데.”

“그럼 마님, 잠시 손을.”

엘리사는 사색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리하르트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 어쩌지……?’

엘리사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사?”

그때였다. 신이 그녀를 도운 것인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각하, 급히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톰슨의 목소리였다.

리하르트는 미간을 설핏 찡그리더니,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리스에게 말했다.

“진찰하고, 내게 다시 보고해라.”

“예, 각하.”

리하르트가 방을 나가고, 모리스는 다시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몸이 어떻게 안 좋으신지 증상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모리스 경이 알게 되면 분명 리하르트에게 이야기하겠지.’ 재빨리 상황 판단을 마친 엘리사는 그를 만류했다.

“진찰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모리스 경.”

“예?”

“그냥 멀미가 심했을 뿐인데, 아무 래도 각하께서 과한 걱정을 하시는 것 같아요. 며칠 푹 쉬면 나을 거예요.”

“음…….”

모리스는 리하르트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 난감한 눈치였으나, 엘리사는 애써 웃는 얼굴로 그를 설득했다.

“며칠이 지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그때 진찰받을 테니, 우선 각하께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말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 증상이 있으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마님.”

다행히 모리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엘리사는 방을 나가는 모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임신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고, 만약 맞다면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됐다.

‘우선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생각해 보자.’

무거운 몸을 누인 엘리사는 생각을 더 이어 갈 틈도 없이 금세 잠들었다.

*

다음 날, 엘리사는 앤과 함께 제도 외곽의 의사를 찾아갔다. 저택 내 사용인들 모르게 찾아가느라 꽤 애를 먹긴 했지만, 어찌 됐든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잠시 엘리사의 맥을 짚어 보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임신입니다.”

의사의 진단에, 엘리사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진찰을 받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소식을 들으니 충격이 컸다.

덩달아 엘리사와 리하르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앤역시 놀라 입을 쩍 벌렸다. .

엘리사는 놀란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확실한가요?”

“예. 아직 희미하지만 분명 심장소리입니다.”

의사는 일말의 기대에 못을 박으며 임신 초기의 주의할 점 등을 설명해 주었다.

‘아니, 겨우 한 번이었는데!’

그 한 번도 리하르트가 나름의 피임을 한 것이었는데….

억울했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사는 금세 감정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

“아, 네! 여기.”

예상치 못한 엘리사의 임신 소식에 놀라 얼어 있던 앤은 한 박자 늦게 엘리사의 부름을 이해하고 금화 주머니를 의사에게 내밀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앤과 함께 의사의 집을 나온 엘리 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삼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엘리사는 그제야 로브 후드를 벗었다. 의사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것이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리사를 따라 로브 후드를 벗은 앤이 물었다.

“마, 마님. 대체 언제 합방을 -”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묻던 앤은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혹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신 그날…?”

앤의 말에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린 엘리사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엘리사는 앤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으응. 어쩌다 보니……….”

엘리사는 앤이 자신의 불같은 하룻밤에 기함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혼할 거라고, 앤과 둘이서 함께 살 이혼 후의 계획까지 세웠는데 한 순간에 이런 사고를 쳤으니.

하지만 앤은 엘리사에게 실망하긴 커녕,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엘리사의 두 손을 잡았다.

“많이 힘드셨죠?”

“응?”

“저는 마님이 달거리를 안 하시는 게 그냥 여행길이 힘드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배 속에 아기님이 자라고 계신 줄도 모르고…”

급기야 앤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제가 더 신경 써서 챙겨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마님.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엘리사는 당황하여 앤의 손을 붙잡았다.

“아, 아니야. 그 상황에서 네가 뭘 더 어떻게 잘해 주겠어? 넌 충분히 신경 써 줬어, 앤.”

엘리사가 앤의 손을 쓰다듬으며 달래자, 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그치고는 엘리사에게 물었다.

“그럼 이혼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묻는 앤의 눈이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님은 이혼하실 거라고,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두 분이 같이 사시면 좋을 텐데. 어쩌면 배 속의 아기님이 마님의 마음을 돌려 주지 않을까?’

엘리사는 앤에게 자신이 이혼하려는 이유가 그저 리하르트를 위해서라고만 말했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앤에게 이곳이 책 속이고, 자신은 리하르트에게 집착하다 죽을 엑스트라라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엘리사가 리하르트와 이혼하려는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앤은 내심 그녀가 공작가에 남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리하르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아이를…… 끔찍하게 싫어하거든.”

엘리사의 대답에 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이를 싫어하신다면서 마님과 밤을 왜 보내? 그래 놓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마님 혼자 이 고민을 하게 하시다니…….’

앤은 처음으로 리하르트가 미웠다.

어려서 가족을 잃은 앤에겐 엘리사가 은인이고, 친구고, 언니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엘리사를 힘들게 하다니!

하지만 앤에겐 리하르트를 혼내 줄힘이 없었다. 물론 그럴 대담함도 없었다.

앤은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예정대로 이혼할 거야. 그가 알아채기 전에.”

그러자 앤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담담하게 말하는 엘리사의 손을 꼭 잡으며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제가 마님을 지켜 드릴게요. 아기 님도요.”

“고마워, 앤.”

“그리고 엄마가 되신 걸 축하드려요, 마님.”

그러고는 엘리사의 배를 보며 속삭였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기뻐요, 아기 님.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열달 후에 뵈어요.”

아렌시아 제국에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혹은 절친한 친구가 배 속의 아이에게 축복을 내리는 관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축복이 아이와 산모를 열 달 동안 지켜 준다고 믿었다.

엘리사는 아이에게 축복을 내리는 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 자신조차도 기뻐하기보다는 걱정부터 앞섰던 아이다.

그런 자신의 아이에게 축복을 내려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네가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엘리사의 진심 어린 말에 앤은 멋쩍은 듯 웃었다.

엘리사 역시 그런 앤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심란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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