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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5화 (35/164)

35화

두 사람이 공작저에 돌아왔을 땐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엘리사는 입덧 증상을 숨기기 위해 침실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럼 식사를 가져올게요, 마님.”

엘리사의 환복을 도와준 앤은 잰걸음으로 침실을 나갔다.

그제야 방에 홀로 남겨진 엘리사는 심란한 얼굴로 아직 평평한 제 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나름대로 정해진 운명을 피하려고 애를 썼건만, 결국엔 원작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 아이가 하네스일까?’

원작의 하네스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엄마인 엘리사는 오직 남편의 사랑만을 갈구하며 하네스를 방치했고, 아빠인 리하르트는 하네스가 엘리사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끔찍하게 혐오했다.

심지어는 배 속의 아이를 유산시키려 하기도 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비틀린 사랑을 하는 서브 남주가 되었다. 여주인공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사랑을 갈구했다.

‘……나는 이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을 거야.’

하지만 리하르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아니, 원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그 존재를 기피할 것이다.

아이는 그의 ‘궁극적 목표’를 망치는 존재니까.

엘리사는 지금껏 평생 리하르트의 편에서 그를 도와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지 그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리하르트가 알버트의 강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었다. 복수에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고, 하지만 알버트의 장례식 다음 날, 엘리사는 우연히 리하르트와 애런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저는 비록 알버트 님을 모셨지만, 항상 마음 한편으로 소공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시길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알버트 님의 뜻이라서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요.’

‘혹,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이유라면 이제 혼약을 깨셔도………..’

‘………각하께선 참으로 충실한 충복을 두었군. 당신이 죽은 후에도 당신의 뜻을 따르려는 부하를 두었으니 말이야.’

‘……,’

‘절대 그 뜻대로는 살지 않아. 내 인생에 아이는 없을 것이다.’

엘리사는 혐오스러운 감정을 담아 짓씹듯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던 리하르트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리하르트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이와 함께하는 행복은 어디까지나 엘리사 자신이 중요시하는 가치일 뿐이다. 자신이 그에게 복수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그를 위해서도, 이 아이를 위해서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게 나을지도.’

전생의 엘리사는 가정불화가 있는 집에서 자랐다.

아빠란 자는 허구한 날 엄마를 때렸고, 엄마는 ‘너 때문에 참고 산다’며 자신의 박복한 삶을 딸의 탓으로 돌렸다.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엘리사는 생각했다.

함께해서 불행한 삶이라면, 꼭 셋이서 같이 살 필요는 없다고.

“아가야, 아직 서툰 엄마지만 내가 널 꼭 행복하게 해 줄게.”

엘리사는 아직은 평평한 제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러고는 편지지와 깃펜을 꺼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안셀.]

이혼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꿈속의 리하르트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 평야를 걷고 있었다.

눈 덮인 평야엔 오직 그의 발자국만이 새겨지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어디로 가는지, 왜 거기에 있는지 모른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늑대?’

한참을 걷던 리하르트는 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는 새끼 늑대를 발견했다.

생명체라곤 보이지 않는 이 허허벌판에, 늑대의 부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홀로 웅크린, 흰 털 뭉치 같은 녀석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엘리사에게 데려가면 좋아하려나..’

리하르트는 새끼 늑대를 엘리사에게 데려갈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새끼 늑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경계하기만 할 뿐, 좀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던 그때, 새끼 늑대가 갑자기 리하르트에게 다가왔다.

리하르트는 늑대를 안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새끼 늑대가 리하르트의 팔을 꽉 깨물었다.

그에 흠칫 놀란 리하르트는 그대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한 꿈이군.”

방은 어느새 새벽 어스름이 들어차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나가기 전, 엘리사의 방에 들렀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엘리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인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조용히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장시간 여행으로 체력이 떨어지셔서 그런 듯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사를 진찰한 주치의는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엘리사는 부쩍 야위었다. 그러잖아도 건드리면 부러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걱정이 될 정도로 왜소한 체격의 그녀인데.

제도에 도착한 이후 며칠 동안,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악마의 영혼석으로 사건을 일으킨 배후를 파헤치느라 매일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고, 저녁에 돌아오면 부쩍 잠이 많아진 엘리사는 이미 잠자리에 든 뒤였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옆에서 챙겨야겠어.’

몸에 좋은 것도 챙겨 먹이고, 같이 교외로 나가 바람도 좀 쐬면서.

‘그러려면 이 일을 빨리 처리해야겠지.’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의 얼굴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일어나 가죽 장갑을 꼈다.

가죽 장갑은 그가 몬스터는 사람이든, 무언가를 처리하러 갈 때 끼는 것이었다.

방을 나서는 리하르트의 눈빛은 엘리사를 바라볼 때와 달리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부쩍 잠이 많아진 엘리사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공작저의 도서관을 찾았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였다.

공작저의 도서관은 공작성의 도서관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고 다양한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찾았다.”

도서 목록을 둘러보며 배회하던 엘리사는 도서관 안쪽에서 원하던 책을 찾았다. 그런데 책이 애매한 높이에 꽂혀 있었다.

엘리사는 까치발을 들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앤이 놀라며 엘리사를 붙잡았다.

“제가 빼 드릴게요!”

엘리사와 키가 엇비슷한 앤은 까치 발을 들고 낑낑거리다가, 결국 사다리를 가져와 책을 꺼냈다.

엘리사는 그런 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앤은 거의 종일 엘리사의 곁에 붙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왔다.

호위 기사도 이렇게 든든한 호위 기사가 따로 없었다.

“고마워.”

“또 다른 책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좀 더 안쪽에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가문의 힘에 관한 서적들이 모여 있는 책장이었다.

‘하네스는 리하르트처럼 가문의 힘을 이어받았지.’

하지만 일찍이 부모를 잃은 원작의 하네스는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이 다치기도 했다.

‘리하르트도 그랬겠구나.’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왔을 그 역시 혼자서 부딪히고 다치며 능력을 다루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외로웠을 리하르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그를 닮았을 그의 아이만은 곁에서 지켜보고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가 미리 공부해야지.’

리하르트와 하네스, 두 사람 모두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이혼이다.

완전히 아빠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아빠의 빈자리를 느낄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엘리사는 『가문의 힘에 관하여』 라는 제목이 적힌 책을 뽑았다.

앤은 혹여 엘리사가 무리할세라 재빨리 책을 받아 들었다.

“이제 돌아가자.”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제일 먼저 가문의 힘에 관한 정보가 적힌 책을 펼쳤다.

그 바람에 책에 쌓여 있던 뽀얀먼지가 바람에 날려 기침을 유발했다.

“윽……”

엘리사는 손으로 휘휘 내저어 먼지를 걷어 내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렌시아 제국의 건국에 기여한네 개의 가문이 있다.

불꽃을 다루는 홍염의 카이로트, 대기를 다루는 폭풍의 루벨린, 대지를 다루는 녹음의 에스더, 물을 다루는 생명의 세리어트.]

엘리사는 도입부 첫 문단을 읽고 고개를 갸웃했다.

‘에스더 가문이랑 세리어트 가문이 어디였더라…?’

카이로트는 황실이고, 루벨린은 지금 엘리사가 몸담고 있는 가문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스더 가문이나 세리어트가문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은 있으나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엘리사는 답을 찾아 책장을 넘겼다.

[녹음의 에스더.

이 땅의 모든 기억을 읽고 미래를 예지하는 힘을 가졌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가문의 힘이 옅어졌고, 그에 따라 자연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어 지금은 사라졌다.

진리에 통달한 에스더 가문의 초대 가주 라르딘 에스더는 대륙의 중심부로 가 스스로 세계수와 한 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설명을 보니 어릴 적, 한참 이 세계에 대해 공부할 적에 읽었던 기억이 났다.

‘사람이 세계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꽤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지.’

엘리사는 다음 장으로 넘겼다.

[생명의 세리어트.

신에게 신성력을 받아 물을 다루며, 정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초대 가주인 아리엔 세리어트는 치유의 힘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오직 정화의 힘만이 발현되고 있다.

오염된 땅을 봉인했던 아리에 세리 어트는 자신의 모든 신성력을 쏟아그곳에 정화의 호수를 만들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제야 세리어트 가문에 대해서도 기억이 났다.

세리어트 가문은 신으로부터 신성력을 받아 대대로 신의 사자인 교황을 배출해 온 집안이었다.

“하지만 세리어트 가문은 이십여 년 전에 쇠락했다지.”

현 교황 이후부터는 방계가 가문을 이어받기로 했다고 들었다.

‘뭐, 에스더 가문도 세리어트 가문도 나랑은 무관하니까 넘기자.’

엘리사는 루벨린의 힘에 대해 설명한 챕터를 찾아 책장을 휙휙 넘겼다.

그렇게 막 원하던 페이지를 찾은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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