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마님, 아르덴 백작께서 보내신 편지가 왔습니다.”
집사 그레이슨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엘리사의 얼굴에 반색이 비쳤다.
앤은 엘리사 대신 편지를 받아 엘리사에게 가져왔다.
편지를 뜯자, 편지와 함께 바닷가 별장의 풍경이 그려진 엽서 하나가 나왔다.
[친애하는 친구, 엘리사.
네가 부탁했던 것들은 전부 준비됐어. 별장도 지난주에 수리를 마쳤고, 첨부한 엽서는 화가에게 네 별장을 그리라고 한 결과물이야.
실제로 보면 더 아름다우니, 분명네 마음에 들 거야.
네가 원하는 날을 말해 주면 그쪽으로 사람을 보낼게. 조만간 소르네 티에서 보자.
네가 바라는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르네티에서, 안셀.]
어릴 적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안셀은 현재 수완이 좋은 사업가가 된데 이어 백작위도 물려받아 동부 해안에 머물고 있었다.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간 로엔그린 자작가의 별장을 구매할 수 있었던건 그 덕분이었다.
엘리사는 동봉된 엽서를 살펴보았다.
엽서에 바다를 풍경으로 작은 별장이 그려져 있었다. 하늘빛 바다와 새하얀 별장이 어우러진, 그림으로 봐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예쁘다…….”
엘리사는 배에 손을 얹으며 생각했다.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배가 불러 오기 전에.
그때,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엘리사.”
리하르트였다.
뜻밖의 목소리에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라면 그는 아직 귀가 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들어와.”
엘리사는 안셀의 편지와 엽서를 내려놓고 리하르트를 맞이했다.
그는 막 저택에 돌아온 듯 외출복 차림 그대로였다.
“오늘은 일찍 왔네?”
“일이 빨리 끝나서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아….”
“매일 방에서 먹는다던데,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엘리사는 뜨끔했다.
입덧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줄곧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리하르트는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서곤 했으니 모를 줄 알았는 데, 아무래도 집사나 다른 하인들이 그 사실을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 그냥 식당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랬어. 어차피 혼자 먹는 거니까.”
“그럼 오늘은 같이 먹자.”
리하르트의 대답에 엘리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의 제안이 싫진 않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입덧 증상을 그가 알게 된다면 의심할 것이다. 그와의 식사는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묘수를 떠올렸다.
“그, 그럴까? 그럼 어서 씻고 와.
저녁 먹자.”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보낸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설마 하니 자는 사람을 깨워 식사를 하자고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엘리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리하르트는 그대로 돌아서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테이블에 놓여 있는 엽서와 편지가 눈에 띄었다.
리하르트는 바닷가 별장이 그려진 그 엽서에 잠시 시선을 두었으나, 이내 방을 나섰다.
*
며칠 후, 로하스 자작가를 조사한 리하르트는 뱃지의 주인을 찾아냈다.
뱃지의 주인은 로하스 자작의 사생아이자 차남인 필립 로하스였다.
‘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이번 일을 해내면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게 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저, 저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요!’
필립의 자백을 받아 낸 리하르트는 악마의 영혼석을 들고 그 길로 황제를 찾아갔다.
그를 마주한 건 정확히 8년 만이었다.
8년 전, 전쟁에 출정하던 그날 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난 8년 동안 리하르트는 열다섯소년에서 스물셋의 장성한 성인이 되었고, 황제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황제는 성큼 제게 다가오는 리하르트를 보며 위기감을 느꼈다.
장성한 리하르트가 마치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 가는 루벨린가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고 리하르트를 맞이했다.
“이거, 실로 간만이군. 소공. 아니, 아니지. 이제 공작이라고 불러야지.”
“아렌시아의 타오르는 불꽃을 뵙습니다.”
리하르트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황제는 그런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공을 치하하는 연회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오지 않더니, 어쩐 일인가?”
전쟁 직후, 공로를 치하하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루벨린으로 돌아가버린 리하르트를 못마땅해하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무심하게 받아쳤다.
“아렌시아에 위험을 가져올 뻔한 일이 생긴지라, 폐하께 보고를 드려야 할 듯하여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위험? 무슨 위험?”
“루벨린의 북서쪽에 있는, 선대들께서 봉인하셨던 오염된 땅을 기억하십니까?”
“알다마다. 거기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최근 영지 근처의 몬스터들이 난폭해지기에 조사해 보니, 누군가가 악마의 영혼석을 몬스터들에게 주입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협곡을 지키던 병사들 역시 습격을 받은 상태였죠.”
“이런, 악질이로군. 협곡을 넘다니.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아냈나?”
“거의 근접한 것 같습니다.”
리하르트는 제 눈앞의 그 ‘배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묻고 있는 그 얼굴이 역겨웠다.
그 역시 자신이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리라.
아니,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진실을 알아도, 황제를 직접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공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이 일은 크게 터트리지 않는 게 좋겠군. 괜히 루벨린 영지민들의 불안만 가중될 수 있으니 말이야.”
“그걸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겠죠.”
리하르트는 서늘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루벨린은, 누군가가 이런 조잡스러운 짓거리로 음해를 가하려 할 만큼 위협적이고 강력하다.”
“…….”
“그러니 루벨린을 두려워하고 선망하라.”
리하르트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조잡스러운 짓거리로 음해를 가하려는 누군가’는 바로 황제 자신을 일컫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는 굳어진 황제의 표정을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바라보았다.
“그럼 배후를 찾으면, 루벨린의 이름으로 처벌하겠습니다.”
황제는 처벌할 수 없지만, 황제의 수족은 잘라 낼 수 있었다.
황제는 말없이 리하르트를 내려다 보기만 했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예를 갖추고 돌아서 알현실을 나왔다.
그 순간, 어깨 뒤쪽의 등에서 살갖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뭐지?’
하지만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스치듯 느껴졌던 통증이 사라졌다.
리하르트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이른 아침에 나갔던 리하르트는 황제를 만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공작저로 돌아왔다.
루벨린의 집사와 하인들은 주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각하.”
리하르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하인 하나가 그의 겉옷과 가죽 장갑을 받으며 뒤따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리하르트는 제 방 앞에서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하인은 하마터면 그의 넓은 등에 부딪힐 뻔했다.
의아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올려다 보니, 리하르트의 시선은 그의 정면에 서 있는 엘리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아직 깨어 있었네.”
“할 이야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그의 뒤에 선 하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하인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두 분,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두 사람은 리하르트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둡던 복도에서 빛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자, 실루엣이 비치는 얇은 잠옷을 입은 엘리사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는 미간을 설핏 찡그리고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아침에 일어나면 네가 없는걸. 돌아오면 이렇게 늦은 밤이고.”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목소리는 그를 원망하거나 힐난하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그가 바쁜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너도 준비해야 할 것 같고.”
엘리사는 말간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 이혼하자, 리하르트.”
결혼 8년 차, 그녀는 자그마치 8년을 준비해 온 제 계획을 이야기했다.
배 속엔 그의 아이를 가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