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7화 (37/164)

37화

“…이혼?”

되묻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언제 다정했었냐는 듯 싸늘했다.

그 눈빛에 잠시 주춤했던 엘리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8년 후에 이혼하기로 했었잖아.”

“……”

“그때, 8년이 지나면 내가 공작가를 나가기로 했으니까.”

“그 자식인가?”

리하르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엘리사는 그가 말한 ‘그 자식’이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셀 아르덴. 그 자식이랑 재혼하려는 거냐고.”

안셀을 언급하는 그의 눈빛에 어째 선지 살기가 어려 있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 이름에 엘리 사는 기함했다.

‘아니, 안셀이 여기서 왜 나와?’

그가 뭔가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오해가 깊어 지기 전에 다급히 정정했다.

“안셀은 그냥 친구일 뿐이야. 내가 이혼하려는 건 8년 그 약속 때문”

“기억 안 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사실은, 8년 전의 그 약속이 똑똑히 기억났다.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그 약속을 기억하기에 서둘러 전쟁을 종결시켰고, 황제의 부름을 무시한 채 곧장 루벨린 영지로 돌아왔다.

엘리사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없는 새 이혼을 하고 훌쩍 떠나 버릴까 봐.

다행히 엘리사는 별말 없이 자신의 곁에 머물렀고, 리하르트는 안심했다.

그 약속을 잊었나 보다, 이대로 루벨린에 살기로 마음을 바꿨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 엘리사가 자신에게 이혼을 말하기 전까지는.

“…내가 안일했어.”

함께 밤을 보낸 그날을 그저 ‘사고로 치부하는 그녀를 보고 그녀가 제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짐작과 실제로 듣는 건 확연히 달랐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혼’ 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엘리사가 제게 이혼을 말하는 건, 자신의 곁에 남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까. 제게 일말의 감정도 없다는 뜻이니까.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전해지기도 전에 외면당했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를 놓아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리하르트는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혼 안 해.”

“리하르 -”

“아니, 못 해.”

뜻밖의 매서운 반응에 엘리사는 놀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뺨을 감싸 쥐고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넌 내 아내고, 루벨린의 안주인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뺨을 감싸 쥔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고 살벌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진득하고 집요했다.

마치 눈빛으로 저를 옭아매려는 것처럼.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에게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것밖에는.

그런 엘리사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리하르트는 제 이마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그녀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매섭던 그의 눈빛이 한층 누그러들었다.

“……시간 늦었다. 오늘은 이만 가서 자.”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그녀의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그의 손에 이끌려 침실에 온 엘리사는 그가 방문을 닫기 전, 그를 불렀다.

“리하르트.”

“잘 자.”

하지만 그는 엘리사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그 행동이 꼭 그녀를 침실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도망갈까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한 마디라도 더 할까 무서워 도망치는 사람처럼…

엘리사는 일말의 여지없이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야?’

유쾌하게 이혼해 줄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

‘난 그저,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한 것뿐인데…….’

엘리사는 닫힌 문과 자신의 배를 번갈아 보다, 배를 감싸듯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야기하기엔 무리인 듯싶었다.

*

다음 날, 엘리사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마님, 오늘은 몸이 좀 어떠세요?”

엘리사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앤이 쪼르르 다가와 엘리사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

엘리사는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머리가 아팠지만, 거짓말했다.

사실대로 말해 봤자 이 증상이 사라지지도 않을 거고, 괜히 말했다간 앤만 걱정시킬 테니까.

“식사를 가져올까요?”

“응. 부탁해.”

엘리사는 가만히 누워 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속이 비어 있으니 평소보다 속이 더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앤은 늦기 전에 식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향료 없이 소금만 살짝 쳐서 구운 비스킷과 입덧 완화에 좋은 생강차, 갓 구운 부드러운 빵과 신선한 샐러드가 베드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리고 이건, 혹시 마님께서 드실 수 있을까 해서 가져왔는데요.”

앤은 저쪽 테이블에 두고 왔던 양송이 크림수프를 가져왔다.

“우웁….”

하지만 앤의 바람과 달리, 엘리사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그녀가 즐겨 먹던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반응을 본 앤은 수프를 황급히 치워 버렸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엘리사가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고, 빵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빵을 뜯는 순간, 버터 냄새가 강하게 나며 엘리사의 후각을 자극했다.

“읏!”

“마, 마님!”

앤은 화들짝 놀라며 근처에 있던 양동이를 가져왔다. 입덧을 하는 엘리사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었다.

엘리사는 몇 입 먹지도 못하고 연신 빈속을 게워 냈다. 신물이 올라와 속이 쓰리고, 게워 내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워 눈물이 맺혔다.

조금이라도 양분을 채우려 식사를 시도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비스킷 몇 조각으로 식사를 끝냈다. 먹은 것 없는 몸에 진이 빠져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엘리사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힘이 빠진 몸을 침대에 누였다.

‘오늘 할 일이 있는데……….’

가문의 힘에 관한 책도 읽고 꽃이 핀 정원을 모처럼 산책도 하고 싶었지만, 기력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통 때문에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가만히 누워 있어도 울렁거렸다.

앤은 그런 엘리사를 안쓰러워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님,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괜찮아. 입덧 때문에 죽었다.

는 사람은 못 봤어.”

“그때 갔던 의사한테 가서 입덧에 좋은 약이라도 지어 올까요?”

엘리사는 대답할 힘도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약이 효과가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앤은 엘리사를 살려야겠다는 결심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엘리사.”

리하르트의 목소리였다.

엘리사는 그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오늘은 일이 없나?’

공작저에 온 이후, 보통 이 시간이면 리하르트는 일이 있어 저택을 나가고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저를 찾아왔다.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힘없는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순없었다. 황급히 다가온 앤이 그런 엘리사를 부축해 문 앞으로 데려갔다.

엘리사는 옷매무새와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한 후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언제나처럼 눈부신 외모의 그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점심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 해서.”

“아………. 미안. 늦잠을 자는 바람에 조금 전에 아침을 먹었거든.”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그 눈이 제 상태를 살피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최근 들어 그의 앞에서 아픈 모습을 많이 보였고, 그는 줄곧 그런 저를 걱정했으니까.

엘리사는 애써 아픈 기색을 숨기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엘리사를 살피던 리하르트가 이번엔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점심 먹고 교외에 잠깐 바람 쐬러 가는 건 어때?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니까.”

리하르트는 모처럼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었다. 지난밤의 일도 만회할겸.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앤의 눈은 오히려 세모꼴이 되었다.

‘지금 마님이 누구 때문에 식사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는데……!’

기력이 떨어져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겠다니.

물론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상태를 알면서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니란건 알았다.

하지만 앤은 그가 엘리사의 임신 사실을 모르는 것부터가 영 마뜩잖았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의 제안을 두번이나 거절하기 어려웠던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좋아.”

“점심 먹고 데리러 올게.”

“응. 식사 맛있게 해.”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뒤로한 채 돌아섰다.

그때, 돌아서는 그의 눈에 엘리사의 어깨 너머 방 전경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먹지 않은 듯 김이 오르는 수프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