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8화 (38/164)

38화

점심을 먹은 리하르트는 약속대로 엘리사를 데리러 왔다.

“엘리사.”

노크를 하자, 마침 준비를 다 끝낸 엘리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하늘하늘한 원단의 드레스와 외출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루벨린에서는 좀처럼 입기 힘든 옷들이었다.

거기에 뽀얀 우윳빛 피부와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뺨과 입술, 그리고 눈부신 금발과 싱그러운 녹안이 어우러진 그녀는 봄이란 계절 그 자체 같았다.

“리하르트?”

멍하니 서 있는 리하르트를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엘리사가 그를 불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엘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큰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어릴 때도 스스럼없이 잡았고, 커서도 별 감흥 없이 잡았던 손인데 왜인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제 손을 감싸는 온기와 단단한 촉감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도 참, 오랜만에 외출이라 들떴나 봐.’

엘리사가 들뜬 감정을 억누르며 리하르트를 따라 방을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앤이 엘리사에게 두꺼운 숄을 둘러 주며 당부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마님.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응, 다녀올게.”

엘리사는 앤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엘리사와 함께 방을 나서던 리하르트는 시선을 느끼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앤의 눈에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리하르트는 앤의 그 눈빛이 의아했으나,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저택 현관으로 나오자, 루벨린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 그들을 집사 그레이슨과 하인들이 배웅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두 분.”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 안에는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엘리사는 슬쩍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리하르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어젯밤 일 때문이겠지………?’

지난밤, 엘리사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리하르트가 왜 자신과 이혼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그는 자신을 가족으로,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불편해서 피하다가도, 내가 아픈 기색을 보이면 걱정했던 거겠지.’

그 이유가 아니라면 그의 행동들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엘리사는 심란했다.

‘나도 좋아서 이혼하자는 게 아닌데.’

빙의하자마자 루벨린으로 와서 살게 된 엘리사에게 그곳은 고향이나다름없는 곳이었다.

엘리사는 춥지만 마음만은 따뜻해지는 루벨린을 사랑했다. 그곳에 그녀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 좋았던 기억들, 자신이 노력해서 일구어 낸 증거들.

그리고 그도.

리하르트에게 엘리사의 존재가 그렇듯, 엘리사에게도 리하르트는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불행해지는 미래를 피하려면 이쯤에서 헤어져야 한다고….’

이대로라면 둘 다 원작대로 죽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가능성은 애초에 멀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리하르트는 이혼을 해 줄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이제 어쩌지? 어디 멀리 도망이라도 가야 하나?’

엘리사는 한숨을 삼키며 쿠션에 몸을 기댔다.

입덧이 심해져 식사를 제대로 못한 탓인지, 그저 밖으로 몇 발짝 나와 생각을 좀 정리한 것뿐인데 몸이 급격히 피곤해졌다.

엘리사는 생각을 더 이어 갈 힘도 없이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엘리사의 머리가 정처 없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그러다 마차 벽에 콩 박았다. 그 소리를 들은 리하르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으응….”

엘리사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칭얼거렸으나, 이내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위태롭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머리를 감싸 안고 그녀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그러자 엘리사가 잠결에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어깨에 내려앉은 가벼운 무게감이, 맞닿은 자그마한 온기가, 귓가에 울리는 얕은 숨소리가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불안함도 가져왔다. 불현듯, 지난밤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이제 우리 이혼하자, 리하르트.’

7년간 떨어져 지내다 이제야 겨우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녀는 8년 전의 약속을 들먹이며 제 곁을 떠나겠다 한다.

적군도, 아군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그 전장에서 어떤 마음으로 악착같이 살아 돌아왔는지 너는 알까.

“하긴, 실질적으로 함께 지낸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으니.”

출정 전, 함께 보낸 시간은 제 마음을 다 보여 주기엔 턱없이 짧았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좀 더 여유 있게 함께 지내다 보면 그녀의 마음도 제게로 향하지 않을까.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향할 곳이 저밖에 없도록 만들 테니까.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머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집착으로 점철된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차 바퀴에 자갈이 밟히며 덜컹거렸다.

잠들었던 엘리사는 그 덜컹거림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

머리를 댄 마차 벽이 어쩐지 포근하다 했더니, 기댄 곳이 마차 벽이 아니라 리하르트의 어깨였다.

한마디로 그에게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놀란 엘리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저를 감싼 온기는 따뜻했고, 안긴 품은 포근하고 든든했다. 그에게서 늘 나던 특유의 체향도 났다.

‘그냥 이대로 좀 더 잘까.’

몸이 약해지니 본능적으로 강하고 안전한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 까무룩 잠들려던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곧이어 마부석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 마님. 도착했습니다.”

엘리사는 별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리하르트가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예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만개한 벚나무가 호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벚꽃잎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의 벚꽃잎은 살랑살랑 날아서, 하늘의 풍경을 담고 있는 맑은 호수에 떨어졌다.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엘리 사가 리하르트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내리는 벚꽃 바람 사이로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저 어여뻤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그녀가 저렇게 밝게 웃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 리하르트는 하려던 말을 잊고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꽃잎을 흩트리던 바람이 멎었다.

“아.”

그와 동시에 엘리사의 눈에 일말의 실망감이 비쳤다.

그것을 눈치챈 리하르트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곧이어 다시 불어온 바람이 벚꽃잎을 흩날렸다. 이번에 불어온 바람은 선선히, 그러나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꽃잎을 날렸다.

“가자.”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엘리사는 흠칫했으나, 뿌리치는 모양새가 이상하여 순순히 그를 따랐다.

무엇보다도 그 접촉이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은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슬쩍 이야기라도 꺼내 볼까.’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심중을 떠볼 적당한 질문을 고민했다.

그때, 그의 기색을 살피던 엘리사의 눈에 리하르트의 앞머리에 붙은 꽃잎이 보였다.

엘리사는 그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리하르트, 잠깐만.”

잠시 멈칫했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의중을 알아채고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이 훅 다가왔다.

엘리사는 가까워진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분홍빛 벚꽃을 배경으로 두고도 단연 돋보이는 얼굴이었다.

‘뉘 집 남편인지 얼굴이 국보급이 네, 아주.’

남들은 전쟁 통에 몇 년씩 구르다보면 얼굴이 많이 상해서 돌아온다던데.

리하르트는 손은 거칠긴 해도 얼굴은 햇빛 한번 닿지 않은 사람처럼 희고 부드러워 보였다.

“다 됐어?”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엘리사는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응.”

그때, 호숫가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엘리사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녀만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시선 역시 자연히 그 뒤를 쫓았다.

네댓 살 정도로 보이는 두 아이가 호숫가에 돌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자, 잠시 잊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엘리사는 마찬가지로 그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기색을 살피다 은근슬쩍 운을 뗐다.

“아이들 정말 귀엽지 않아?”

“잘 모르겠어.”

예상했던 대로 그의 반응은 무심했다. 그 대답에 엘리사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엘리사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럼 넌 아이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