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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9화 (39/164)

39화

엘리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를 갖고 싶은 건가?’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알버트가 일평생 간절히 염원했던 것이기에 반감이 컸다.

하지만 알버트의 의사를 제하고 생각하면, 딱히 아이란 존재에 반감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이가 생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리는 미래에는 항상 엘리사만이 존재했다.

그는 그녀 하나로 족했으니까.

게다가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여체에 엄청난 무리를 준다고 들었다.

가뜩이나 작고 약한 엘리사에게 그런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

“딱히 갖고 싶었던 적 없어. 하지만…….”

엘리사가 원한다면, 그리고 그녀를 닮은 그녀의 아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싫었다.

당분간은 저 혼자서만 그녀를 오롯이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덧붙이려던 순간, 뒤에서 호위하고 있던 톰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요 녀석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자, 막 걸음마를 시작한 듯한 아기가 톰슨에게 붙잡혀 있었다.

“꺄우! 아우!”

아기는 엘리사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엘리사에게 다가오려다 톰슨에게 저지당한 모양새였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녀석이 마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부모에게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해야죠. 놓아주세요.”

톰슨은 엘리사의 말에 잠시 놀랐으나, 영지민 아이들과도 곧잘 어울리던 엘리사를 떠올리곤 아이를 놓아주었다.

톰슨의 손에서 벗어난 아이는 엘리 사를 향해 걸어오다, 다리의 힘이 풀린 것인지 털썩 주저앉았다.

엘리사는 흠칫 놀라 아이를 안아일으켰다.

“괜찮니, 아가야?”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아기는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도 모른 채 엘리사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녀의 팔을 붙잡고 꺄우!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구, 넘어져도 울지도 않고 씩씩 하네.”

엘리사는 피식 웃으며 아이의 흙묻은 엉덩이를 털어 주었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한발 늦게 뒤따라온 젊은 남자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부인. 우리 아이가 실례를 끼치진 않았는지요?”

“괜찮아요.”

아이의 아빠로 추정되는 남자는 혹여나 귀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았을지 노심초사하며 고개를 꾸벅거리다 아이를 안고 멀어졌다.

아빠에게 안긴 아이는 거리가 멀어질 때까지 등 너머의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그런 아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무심한 눈으로 멀어지는 아이와 아이 아빠를 보고 있었다.

그런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왔다.

리하르트가 급한 업무를 처리하러간 사이, 목욕을 마친 엘리사는 홀로 정원의 그네에 앉아 있었다.

손은 아직 주먹만 한 수준인 아랫배를 감싼 채로,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정원의 꽃향기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 좋은 향기도 엘리사의 근심을 덜어 주진 못했다.

‘딱히 갖고 싶었던 적 없어.’

엘리사는 낮에 들었던 리하르트의 대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서둘러 후사를 보라는 알버트의 정신적 학대에 평생 시달려 왔으니까.

‘역시 리하르트에겐 말하지 말아야겠어.’

그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이지만, 그래도 그 입으로 직접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배 속의 아이가 가여워 마음이 쓰렸다.

그러다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던 책 내용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생각을 바꿨다.

‘걱정하지 마, 아가. 엄마가 아빠몫까지 많이 사랑해 줄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때 마침 외출했던 앤이 돌아왔다.

“마님, 약을 받아 왔어요.”

나날이 입덧이 심해지는 엘리사를 걱정하던 앤이 ‘이대로는 죽겠다’며 의사를 찾아가 지어 온 입덧 약이었다.

앤은 엘리사의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투명한 약병에 녹색의 환이 들어 있었다.

“증상 완화에 효과가 있는 약초로 만든 환이에요. 식전에 한 스푼씩 드시면 된대요.”

“고마워.”

엘리사는 앤이 건넨 약병을 받으며 화답했다.

그러자 앤은 안쓰러운 눈으로 엘리 사를 바라보았다.

“사실 같은 약이라도 사람마다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대요. 그럼 그저 버텨 내시는 수밖에는…….”

“약이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산책도 자중하시는 게 좋겠어요. 각하께서 나가자고 하셔도 거절하시고요. 저는 마님께서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실까 봐 걱정돼요.”

앤은 걱정 어린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엘리사의 가느다란 손을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그 순간, 아치문 바깥쪽에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리, 리하르트?”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조금 전 대화를 들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엘리사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떡하지……?’

엘리사가 얼어 있는 사이, 리하르트는 성큼 다가와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싸늘히 침잠한 눈으로 앤에게 말했다.

“엘리사가 걸린 병이 뭔지 말해라, 앤.”

“…병?’ 당황한 채 굳어 있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임신한 걸 알아챈 게 아니라, 병에 걸렸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다행…… 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했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표정을 보고서 제 판단을 바꿨다.

앤을 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흡사 원수를 보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앤이 엘리사를 병에 걸리게 한 장본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그게…….”

앤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어떻게 할지를 묻고 있었다.

엘리사는 다급히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리하르트.”

“그럼 이 약은 뭔데.”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으니까, 방에 가자. 가서 설명할게. 응?”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이 못 미더웠지만, 가뜩이나 야윈 그녀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신 엘리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리,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얼어 있는 앤을 뒤로한 채 엘리사를 안고 아치문 밖으로 나왔다.

엘리사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놓아 달란 의미로 발을 살짝 바둥거렸다.

“내려 줘. 내가 걸을 수 있”

“…너는.”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낮게 내리깐목소리를 듣고 말을 멈췄다.

리하르트가 충혈된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죽을 생각이었어?”

“…….?”

엘리사는 당황했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 리하르트? 뭔가 오해가 - “

“난 널 보낼 마음 없으니까, 죽어도 내 품에서 죽어. 엘리사.”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눈에서 눈물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지만 우는 얼굴과는 반대로, 내리깔린 목소리는 늪처럼 진득하게 저를 옭아매는 듯했다.

‘내가 울렸어!’

엘리사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우는 모습이 이렇게 예쁠 일이냐…..’

감정 한 자락 없이 건조하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반짝거렸고, 촉촉이 젖어 든 긴 속눈썹이 애처로움을 더했다.

그 모습은 예뻤지만, 그가 저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우선 그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먼저였다.

엘리사는 심장이 묵직해지는 죄책감을 느끼며 리하르트의 눈물을 닦아 냈다.

“나, 죽을병에 걸린 거 아냐. 그냥……… 소화 기관에 염증이 좀 생긴 거고, 음식만 잘 가려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입덧을 숨길 수는 없기에,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위염이라고 대충 둘러대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눈이 엘리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이었다.

엘리사는 그런 그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다고, 믿어 달라고,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내가 간호할게. 네 곁에서.”

‘네 곁’을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어쩐지 묘하게 불안했다.

*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운 엘리사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간호한다며 겹겹이 덮어 준 이불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천장의 캐노피만 멀뚱히 쳐다보던 엘리사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의 붉은 눈동자가 여전히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해?”

“아, 아니야. 내 걱정하지 말고 얼른 자.”

엘리사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삼켰다.

‘불편하지. 불편하고말고!’

정원에서 엘리사의 방으로 온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저녁 식사도 엘리사와 함께 침실에서 하며 그녀의 식단을 살폈다.

다행히 앤이 가져다준 입덧 약이 효과가 있어 조금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밤에도 곁에서 간호하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옆에서 간호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냐고….’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침대에서 자겠다고 했다.

‘아내가 아픈데, 당연히 남편이 밤새 간호해야지.’

실제로 아픈 것도 아니고, 설령 아프다 해도 그는 의사가 아니니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제 옆에서 자겠다 했다.

괜찮다며 만류해도 기어이 침대에 올라와 제 옆에 누웠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 마음은 고마웠기에 더 이상 등을 떠밀어 보낼 수가 없었다.

‘이러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야.’

입덧은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낫겠지만, 그쯤이 되면 서서히 배가 불러와 숨기기가 어려워질 터였다.

몰랐다면 모른 채로 살 수 있겠지만, 리하르트가 아이의 존재를 알고 나면 몰랐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네가 증오라는 아픈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건 마음 아프지만,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는데…….’

그리고 배 속의 아이 역시, 아빠에게 미움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랐으면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결단을 내린 엘리사는 어느새 눈을 감은 리하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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