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6. 붙잡히다
며칠 후, 리하르트가 저택을 비울 일이 생겼다.
악마의 영혼석에 연루된 로하스 자작을 잡으려 했더니, 마침 영지에서 제도로 오고 있던 그가 아들 필립의 소식을 듣고 리하르트를 피해 숨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의 위치는 금방 알아냈으나, 문제가 있었다.
그가 몸을 숨긴 곳이 알리타 상단의 지부 중 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루벨린의 기사들이 다짜고짜 그곳에 쳐들어가서 그를 잡아 오기에 그림이 좋지 않았다.
하여, 결국 리하르트가 직접 가서 그를 처단하기로 했다.
엘리사가 잠에서 깼을 때, 리하르트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겉옷을 입고 있었다.
엘리사는 새벽 어스름 속,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깬 것을 모른 채 예의 무심한 얼굴로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해가 뜨지 않아서인지 그 모습이 평소보다 서늘하게 느껴졌다. 아니,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그 눈에 있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졌다.
그는 성큼 다가와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모리스 경이랑 교대로 상주할 의사를 데려왔어. 혹시 아프면 참지 말고 부르도록 해. 그리고 입맛이 없어도 끼니는 거르지 말고.”
리하르트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 엘리사가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 부모님도 안 하던 잔소리를 하네.”
엘리사의 기억 속 부모님은 로엔그린 자작 부부가 아닌 전생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서로 싸우기 바빠 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딸은 끔찍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족쇄일 뿐이었으니까.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잔소리가 마냥 신기했다.
엘리사가 웃자, 리하르트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언뜻 입가에 미소가 번진 것도 같았다.
“아직 새벽이니까 더 자.”
“아니야. 잠 다 깼어. 남편 가는 길 배웅이나 해야지.”
엘리사는 기어이 일어나 리하르트를 배웅하러 나섰다.
저택 앞에 기사들과 리하르트의 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말에 오르기 전, 엘리 사를 돌아보았다.
“다녀올게.”
엘리사는 인사 대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그런 엘리사를 의아하게 보자, 엘리사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리하르트는 물론, 주변의 사용인들도 흠칫 놀랐다.
“마님 두고 가기 싫으시겠습니다, 각하.”
“아, 좀.”
옆에 있던 톰슨은 작게 야유했고, 아가일은 그런 그의 팔을 툭 치며 흘겨보았다.
다른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뻘쭘한 듯 시선을 내리깔며 헛기침했다.
“잘 다녀와, 리하르트, 무리하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행동이 의아했으나, 기분은 좋았다.
아니, 실은 애석했다.
다녀오라며 안아 주는 그녀의 행동이 어쩐지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처럼 느껴져 가기 싫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가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이번 일을 빨리 처리해야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있을 테니.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뒤로한 채 말에 올랐다. 그러고는 선뜻 가지 않고 엘리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엘리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다, 먼저 손을 흔들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돌아섰다.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 네.”
엘리사는 저택을 나선 리하르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돌아서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뒤따라온 앤에게 말했다.
“앤, 떠날 채비 하자.”
앤은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짐을 싸러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사실 짐이라고 해 봤자 별로 쌀건 없었다. 정착 자금으로 쓸 돈은 안셀의 상단에 맡겨 두었다.
옷들은 애초에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기에 초반 며칠 입을 옷을 제외하고는 다 두고 갈 생각이었다.
앤이 짐을 꾸릴 동안,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남길 편지를 쓰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막상 깃펜을 들자 뭐라고 적어야 할지 막막했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사라지면 리하르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겠지.’
그럼 저를 찾아 이유를 듣고자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의 능력이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테니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시간이라도 끌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할까?’
그에게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그 이유를 추측했었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해.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이 혼하겠다는데, 어쩌겠어.’
엘리사는 그런 내용의 편지를 적당히 꾸며 쓰기로 했다.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하기 싫을까.”
차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편지지에 잉크가 떨어져 번졌다.
왜 손이 움직이지 않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엘리사는 그렇게 몇 장의 편지지를 버리고서야 짤막한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리하르트.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언제나 네가 행복하기를 빌게.
진심을 담아, 엘리사.]
겨우 끝맺은 편지를 접는 순간,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왜 갑자기 눈물이……….’
엘리사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정든 곳을 떠나는 마음이 섭섭하고, 임신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진 탓인 듯했다.
엘리사가 눈물을 갈무리하자, 때마침 준비를 마친 앤이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마님, 짐은 다 쌌어요.”
“그럼 잠깐 기다려 줘. 난 리하르트의 방에 편지만 두고 올게.”
엘리사는 편지를 가지고 리하르트의 침실로 왔다. 침실은 당연히 텅비어 있었다.
엘리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 사이에 편지 귀퉁이가 보이도록 꽂아놓았다. 그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이랑 똑같네.’
리하르트의 방은 어린 시절,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함께 방을 쓰던 그 때와 같았다. 방에 밴 주인의 체향도 여전했다.
‘이 저택을 떠나면 이 방이 제일 많이 생각날 거 같아.’
찬찬히 방을 둘러보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리하르트가 전쟁에 출정한 이후, 엘리사가 가끔 제도에 내려올 때면 늘 사용하던 방이기에 엘리사에겐 익숙했다.
드레스룸은 이제 엘리사의 드레스가 아닌, 리하르트의 옷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여기 있는 옷을 입은 모습을 한번 봤어야 했는데. 아쉽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잘난 얼굴을 더 기억에 담아 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드레스룸을 배회했다.
그러다 한쪽의 보석함에서 브로치를 찾아냈다.
루벨린 공작가의 문양으로 조각된 백금 브로치였는데, 어릴 적 리하르트가 황실 사냥터로 가던 그날 달고 있던 브로치였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던 리하르트의 잘난 미모가 아직도 엘리사의 기억속에 또렷했다.
‘이거 하나 정도는 가져가도 되겠지?’
그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던 엘리사는 몰래 브로치를 챙겨 드레스룸을 나왔다.
어차피 브로치는 많고 많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리하르트의 방 전경을 한 번 더 눈에 새긴 후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레이 슨을 불렀다.
“생각을 좀 정리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북쪽 별채에 머물까 해요. 앤을 데려갈 테니, 그 외 다른 사람은 들이지 말아요.”
엘리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별채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 엘리사가 별채를 쓰겠다는 이야기에, 그레이슨은 심각한 일은 아닌지 걱정되었으나 캐묻지 않았다.
주인이 말해 주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도, 주제넘은 참견을 하지도 않는 것이 아랫사람의 미덕이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한 시간 후, 엘리사가 북쪽 별채에 머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엘리사는 앤과 둘이서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거의 사용하는 이가 없었지만, 관리는 늘 철저히 하고 있었기에 외관도 내부도 깔끔했다.
“이쪽이야, 앤.”
엘리사는 어릴 적, 리하르트와 함께 별채에 왔었던 기억을 되짚으며 2층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루벨린의 가주들만이 사용하는 방이 있었다.
방은 가주를 위한 방답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본채의 방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엘리사는 방 한쪽에 있는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 옷장 뒤엔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숲 근처로 연결된 비밀 통로가 있었다.
그것이 엘리사가 이 별채에 온 이유였다.
엘리사는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 비밀 통로를 여는 열쇠가 옷장 옆에 걸린 액자라는 걸 기억해 냈다.
기억 속의 어린 리하르트가 엘리사에게 말했다.
‘액자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열려.’
엘리사가 액자를 돌리려 하자, 앤이 화들짝 놀라 엘리사를 막아섰다.
“제가 할게요, 마님!”
앤은 잠시 끙끙하더니, 이내 액자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마법처럼 옷장이 저절로 움직여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이 비밀 통로는 리하르트가 전쟁에 출정하기 전, 엘리사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혹시라도 신변에 위협이 생기면 이 통로를 따라 달아나라고.
‘어디에 숨어 있든, 살아만 있어.
내가 반드시 찾아갈 테니.’
엘리사는 계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위해 알려 준 길을 네게서 도망치는 데 쓰게 되었구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앤이 엘리 사를 불렀다.
“마님?”
“가자.”
앤은 혹시 모를 위험 요소로부터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 내려갔다.
엘리사는 본채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안녕, 리하르트.’
그리고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 모습을 감추자, 액자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며 통로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