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고, 공작 각하. 살려 주십시오!”
로하스 자작은 꺾인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진땀을 흘리며 벌벌 기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구름을 흩트렸다.
“이제야 이야기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제, 제가 아는 건 다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오염된 땅에 들어갔던 게 그대인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맞지만 제가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들어갔지?”
“그건….”
자작이 입을 열려던 그때, 리하르트의 등 뒤에서 괴한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검을 들고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리하르트가 훨씬 빨랐다.
리하르트는 그들과 거리를 벌린 후, 재빠르게 낙뢰를 내리쳤다.
괴한들은 아슬아슬하게 낙뢰를 피했다. 그러고는 곧장 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그들의 뒤를 쫓으려다 걸음을 멈췄다. 상대가 고작 둘로 자신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파악했다기엔 너무 허술한 공격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리하르트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목표는 내가 아니었어.’
상대 입장에서는 리하르트를 제압하는 것보다는, 약한 자작을 죽여 입을 막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리하르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자작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괴한들이 자작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재빨리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나, 갑자기 등 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집중력이 흐려졌다.
공작저를 나서 이곳에 오기까지 이틀간 점점 심해지던 통증이었다.
‘하필, 이런 때……!?’
괴한들은 검을 들고 자작에게 다가섰다.
리하르트는 그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괴한들의 발밑에서 올라온 검은 오라가 그들을 삼켰다.
“이, 이게 뭐……… 커헉!”
“770.9……..”
검은 오라가 잠식된 괴한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버둥거리더니, 이내 그대로 축 늘어졌다.
리하르트는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는 자작을 지나쳐 괴한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의 몸에 상처 하나 없었지만,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내가 죽인 건가?’
리하르트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오라는 사라져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에 의문을 품은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한발 늦게 도착한 톰슨이 숨을 헐떡이며 리하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톰슨은 가빠진 숨을 골랐다.
리하르트는 톰슨이 평소처럼 왜 자꾸 혼자 사라지느냐며 잔소리를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톰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마님께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
아렌시아의 수도, 아카로아의 외곽빈민가에는 거대한 신전이 있다.
‘신은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는 말대로, 아렌시아 각지의 모든 신전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사는 외곽 지역에 세워져 있었다.
가장 신이 필요한 이들이 언제든 신을 찾을 수 있도록.
그렇기에 신전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게 항시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고 해서 무법 지대는 아니었다. 황제조차도 신전에서는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 신전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교황이었다.
“성하. 새벽 기도를 올릴 시간입니다.”
신관의 목소리에 기도실 중앙에 앉아 있던 눈부신 금발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갓 신전에 들어온 수습 신관들이 교황의 법복 겉옷을 가져와 입혀 주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를 지닌 그가 새하얀 법복을 걸치자, 마치 신에게 사명을 받고 땅에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교황 에이든 세리어트.
세리어트 가문의 마지막 남은 핏줄이자, 신전의 현 지도자였다.
그를 처음 본 외지인들은 놀라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을 머리가 희끗한 노인일 거라 생각했지만, 에이든은 기껏해야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미남이었으니까.
“가죠.”
에이든은 신관들과 함께 개인 기도 실을 나왔다.
세리어트 가문은 ‘생명의 세리어 트’라고 불리는 역사 깊은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은 대를 이어 교황을 배출해 왔다.
여러 자식이 태어나면 그중 제일 신성력이 강한 아이가 다음 대의 교황이 되었고, 다른 자식이 가문을 이었다.
때때로 자식이 하나뿐이면 교황이 되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그들은 신성력을 후손에게 물려주어 신을 모시게 하는 것이 신을 위하는 일이라 여겼기에 가정을 꾸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평화의 시대에 신의 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면 되었다.
게다가 황실은 세리어트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던 차, 또 한 번 협곡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도 에이든은 당대 유일하게 가문의 힘을 이어받은 가주이자 교황이었다.
그런 이유로 제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협곡으로 향했으나, 괴한의 습격을 받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사이, 선황제가 독살당했다.
현 황제 로암은 범인으로 지목된 이복형을 처단하고, 황위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그의 아내 율리아가 역모죄에 엮이게 되었다.
형제의 맹약에 따라 세리어트 가문이 멸문하진 않았으나, 가문의 내부는 초토화되었다.
에이든이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이미 율리아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도망치다 행방불명이 된 뒤였다.
에이든은 그녀를 찾아 헤맸으나, 그녀는 얼마 후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그의 품에 돌아왔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에이든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다.
가문을 잇기 위해 새 아내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복수뿐이었으나, 신관들과 제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저희에겐 아직 성하가 필요합니다.
‘성하,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에이든은 차마 그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사랑했던 여자, 가진 것 없지만 베풀 사랑은 많았던 고아소녀 율리아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에이든은 남은 평생을 그들을 위해 살기로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지키며 살아온 이 십 년이었다.
그동안은 특별할 것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조금 전, 그들의 안위를 위협할 기운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신관들과 함께 새벽 기도를 올리던 에이든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방금 그건………?’
아카로아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다 사그라들었다.
찰나이긴 했지만, 에이든은 분명히 느꼈다.
그것은 이십 년 전, 협곡 너머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기운이었다.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챈 신관이 에이든에게 다가왔다.
“성하? 왜 그러십니까?”
에이든은 굳은 표정으로 다급히 성전을 나서며 말했다.
“실리카 신관, 성기사단장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
창밖에서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엘리사는 며칠 만에 모처럼 가뿐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 모습을 본 앤이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마님, 오늘은 좀 어떠세요?”
“음, 아주 좋아.”
앤은 기쁜 마음 반, 못 미더운 마음 반으로 엘리사의 이마를 짚었다.
엘리사의 말대로 근 며칠 엘리사를 괴롭히던 열이 떨어져 있었다.
앤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울먹거리며 말했다.
“천만다행이에요. 엊그제 밤에 열이 많이 나서, 저는 정말 마님이 잘못되는 줄 알고……….”
“마음고생 많이 했겠구나.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미안했던 엘리사는 훌쩍거리는 앤을 토닥여 주었다.
금방 울음을 그친 앤은 엘리사에게 물었다.
“시장하진 않으세요? 식사를 가져올까요?”
“그래. 그리고 세틸 경도 불러 줄래?”
“네!”
앤은 곧장 방을 나갔다.
세틸은 엘리사가 이곳 별장으로 올 때 상단 지부장이 붙여 준 여의사였다.
사흘 전, 엘리사의 상태를 알게 된 지부장은 산 밑의 작은 마을에 있는 이곳 별장으로 엘리사를 안내했다.
“아무리 급해도 이런 몸으로 여행길에 오르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가벼운 감기라도 제때 조치를 하지 않으면 크게 앓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제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별장이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며칠 정도는 몸을 숨길 수 있을 겁니다.
워낙 작은 산골 마을이라, 외지인들도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거든요.”
엘리사는 마음이 급했으나, 결국 그녀의 말을 따르는 쪽을 선택했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무리를 해선 안 되었다.
그녀의 우려대로 엘리사는 그날 밤, 열에 시달리며 크게 앓았다.
앤은 걱정했지만, 엘리사는 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길바닥에서 앓아눕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몸 상태도 좋아졌으니, 어서 떠나자.’
이미 시간을 오래 지체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더 이상 배 당김 증상도 없었고, 의사의 소견도 좋았다.
“아기님도 괜찮으신 듯하니 조만간 출발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출발해야겠어요.”
“그래도 오늘까지는 쉬시면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무리하시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웅덩이도 마르지 않았고요.”
엘리사가 앓아누운 이틀 내내 봄비가 내려 땅이 질척했다. 마차가 다니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알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그녀의 제안을 수긍했다.
대신 앤에게 언제든 당장 떠날 수 있도록 채비하게 했다.
엘리사는 의사의 당부대로 식사와 간식을 챙겨 먹고 낮잠도 자며 안정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날씨가 좋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로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고 선선한 봄바람이 부는, 떠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엘리사는 떠날 채비를 마치고 앤과 함께 현관으로 내려갔다.
지부장이 붙여 준 용병 두 명과 의사 세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죠.”
엘리사가 먼저 마차에 오르려던 그 때였다. 별안간 별장 입구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