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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43화 (43/164)

43화

그곳엔 붉은 머리를 곱게 올린 귀부인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를 따라온 호위 기사와 함께.

“안녕하세요, 영애.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엘리사는 귀부인의 옆에 선 기사의 제복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확인했다.

제국에 수많은 귀족 가문이 있지만, 영지 업무를 위해 가문의 문양을 외워 둔 엘리사는 그 문양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벨테인 후작가.

현 황제의 이복 여동생인 황녀가 시집을 간 가문이었다.

엘리사가 알기로, 벨테인 소후작은 아직 미성년이며 미혼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이 올리비아 황녀구나.’

지금은 벨테인 후작 부인이기도 하고,올리비아 황녀는 이복 오라비인 현황제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녀의 친오빠인 선황제를 폭군이라며 몰아내고 황위에 앉았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벨린 공작가의 사람인 제게 우호적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난 지금 도망치는 신세라 이렇게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데.’

그러나 다행히 올리비아는 엘리사가 누군지 모르는 듯 엘리사를 ‘영애’라고 지칭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루벨린에서만 생활해 온 엘리사는 어릴 적에만 그녀를 보았을 뿐 자라서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저렇게 절박한 표정을 한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무슨 일이신가요?”

그러자 올리비아는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의사를 데리고 오셨나요?”

“아, 네.”

“딸아이가 많이 아파요. 늘 건강하던 아이인데, 밤부터 갑자기 열이 끓기 시작해서……. 괜찮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가까운 마을이 이곳이었는 데, 마침 마을 의사가 근처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왕진을 갔다고 합니다.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옆에 있던 기사가 덧붙였다.

엘리사는 그제야 그들이 한적한 곳의 이 별장까지 찾아온 이유를 파악했다.

‘근처 마을에 가서 의사에게 보일수도 있겠지만, 가뜩이나 아픈 아이를 돌림병이 도는 마을에 데려가긴 너무 위험했겠지.’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던 차에 이 별장에 귀족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것이다.

보통 귀족들이 이런 작은 마을의 별장에 오는 건 보양 목적이거나,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휴양을 많이 가는 여름이 아니니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요양을 하러 오는 경우엔 주치의를 데려왔을 확률이 높으니, 그 확률에 희망을 걸었으리라.

엘리사는 그 희망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이죠, 부인. 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엘리사의 대답에 올리비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사이, 기사가 마차에서 아이를 안고 나왔다.

그의 품에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열이 오른 얼굴로 가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고마워요, 영애. 정말 고마워요…….”

올리비아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엘리사는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세틸에게 지시했다.

“세틸 경, 아이의 상태를 살펴봐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리사는 올리비아와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세틸은 아이를 눕히자마자 곧장 진료를 시작했다. 앤은 세틸의 지시에 따라 물수건을 준비해 왔다.

“열이 너무 높습니다. 일단 열부터 내리면서 좀 더 상태를 지켜봐야 할 듯한데….”

잠시 아이의 상태를 살핀 세틸이 진찰 결과를 말하다 말끝을 흐리며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러니 이 별장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데, 출발이 지체되어도 괜찮겠느냐며’ 눈으로 엘리사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엘리사는 마음이 급했지만, 그래도 한 아이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놓고 고민할 거리는 아니었다.

엘리사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겨우 하루 정도로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 별장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부장과 이 별장의 사람 들밖에 없기도 했고,

“미안해요, 영애. 다른 급한 일이 있을 텐데 이렇게 붙잡아서…….”

“아니에요. 저도 좀 더 쉬고 싶었는걸요. 잘됐죠.”

엘리사는 웃으며 미안해하는 올리 비아를 다독였다.

그런 엘리사를 지켜보는 앤은 어딘가 초조한 표정이었으나, 엘리사는 올리비아에게 신경을 쓰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

마침 세틸에겐 엘리사에게 쓰고 남은 해열제가 있었다. 세틸은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고 몸을 닦아 주었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자, 열이 내리며 아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아이가 한결 편한 표정으로 잠든 것을 본 올리비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앤은 그런 올리비아의 앞에 샌드위치와 주스 등 간단한 식사거리를 내려놓았다.

엘리사는 올리비아에게 식사를 권했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저녁도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병간호하는 사람은 더욱 몸을 챙겨야 해요.”

“아……. 고마워요.”

올리비아는 뒤늦게 밀려오는 허기를 느끼고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엘리사는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올리비아는 입가심으로 주스를 말끔히 비운 후,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은인의 이름도 듣지 못했네요.”

“아….”

엘리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 이름을 말하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될 텐데.’

혹시라도 올리비아가 자신을 알아챌까, 앤에게도 그녀의 앞에선 ‘아가씨’라고 부르라 일러둔 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어차피 앞으론 안 볼 사이니,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엘리사 테아리트예요.”

“아, 테아리트 자작가의 영양이었군요?”

역시나 그녀는 엘리사가 가문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바로 알아맞혔다.

유력한 황족답게 얼굴은 몰라도 가문의 이름은 전부 꿰고 있었던 것이다.

테아리트 자작가는 동쪽 변방의 약소한 귀족가로, 중앙에선 존재감이 없었다.

그랬기에 올리비아는 자신이 엘리 사를 모른다는 사실에 크게 의문을 품지 않는 듯했다.

“난 올리비아 벨테인이라고 해요.”

“아, 많이 본 가문의 문양이라 했더니 황녀 전하셨군요? 제가 제도에는 오래 있지 않아서 몰라뵈었네요.”

엘리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알게 된 척했다. 그래야 상대 방의 기분이 좋아지니까.

엘리사의 예상대로 한결 표정이 밝아진 올리비아가 엘리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요, 엘리사양.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요.”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아픈 아이를 봤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내심 뿌듯해하며 웃는 엘리사를 흔흔하게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엘리사에게 물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올해로 성년이 되었어요.”

“어머. 우리 아들이랑 나이가 비슷하네.”

“아, 맞아요. 아드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일등 신랑감이라고, 그리고 소후작님을 훌륭히 키워 내신 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익히 들었고요.”

엘리사는 올리비아의 기분을 띄워 줄 요량으로 그녀의 아들과 그녀를 추켜세웠다.

실제로 그녀의 아들 세드릭은 귀족들이 꽤 탐내는 신랑감이기도 했으니,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그래요? 그럼 그 일등 신랑감을 만나 볼 생각은 없나요?”

“네?”

그런데 대화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적잖이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 아들이 엘리사 양보다 한 살 어리긴 하지만, 외양은 성인이나 다를 바 없거든. 내년이면 성인이 되니까, 한번 만나 보는 건 어때요?”

“아, 그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우리 아들이 내 밑에서 조신하게 자라서 외조는 내조는 잘할 거예요.”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엘리사가 마음에 들었다.

저도 급한 일이 있었을 텐데 흔쾌히 이곳에 남아 주었고, 싫은 기색을 내비치긴커녕 곁을 지키며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게다가 외양 또한 제도의 그 어느 미인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으니 더욱이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남자는 한 살이라도 어린놈이 좋아요. 살아 보니 그렇더라구.”

엘리사는 어떻게든 아들과 엮어 주려는 올리비아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아이가 있어서요.”

“아이?”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보던 올리 비아는 엘리사의 손이 배로 가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한 박자 늦게 그 의미를 깨달은 올리비아의 눈이 놀라 커졌다.

“어머, 미안해요. 아직 어려서 당연히 미혼인 줄 알고, 엘리사 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만, 내가 주책을 부렸네.”

“아니에요. 귀한 아드님을 소개해 주려고 하신 마음만으로도 감사하죠.”

“흐음,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부군이 될 분은 아내를 혼자 두고 어디 가신 거죠?”

“아, 그게……. 이혼하자고 했어요.”

엘리사의 대답에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금세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 욕해도 되나요?”

하지만 올리비아는 엘리사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리하르트를 욕했다.

“내 아들이었으면 아주 그냥, 먼지가 나도록 때리고 가문에서 내쫓았을 거예요. 아니, 어떻게 자기 아이를 가진 아내랑 이혼을 해?”

“이혼은 제가 먼저 하자고 했는 데….”

“그럼 남편이 더 잘못했지! 임신 중인 아내가 오죽하면 이혼하자고 했겠어?”

마치 딸의 일처럼 얼굴에 열을 올리며 격분하는 올리비아를 보며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저에서 달아난 이후, 처음으로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엘리사의 웃음에 그제야 격분한 것이 머쓱해진 올리비아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럼 부군은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나요?”

“아뇨. 아마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를 거예요.”

엘리사는 희게 웃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몰라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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