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막 동이 튼 아침, 리하르트는 아르덴 상단의 지부에 도착했다.
그 뒤를 따라온 톰슨의 표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엘리사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리하르트와 함께 이틀 밤낮을 달려 제도로 돌아왔다.
게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제 온종일 엘리사를 찾아 온 제도를 뒤 집느라 체력이 동났다.
내내 동행한 아가일 역시 톰슨과 같은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표정은 조금 더 밝았다.
이곳에서 엘리사를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얻은 까닭이었다.
‘그, 그분은 아르덴 상단 지부로 가셨습니다요.’
오늘 새벽 무렵, 엘리사를 아르덴상단 지부까지 태워 준 상마차의 마부를 찾아냈다.
그 길로 곧장 아르덴 상단 지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각하, 잠시만요.”
사람 여럿 죽일 기세로 상단에 들어서려는 리하르트를 톰슨이 불러 세웠다.
“마님을 만나시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세요.”
톰슨의 말에 리하르트의 서늘한 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그게 뭔 소리냐고 묻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세요.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했다고 하세요.”
“…….”
“우리 마님은 항상 옳으시니까요.
그렇지, 아가일?”
“모처럼 지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톰슨 경.”
리하르트는 입을 모아 잔소리하는 두 사람을 싸한 눈으로 흘겨보고 돌아서 상단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 -”
상단의 심부름을 하던 심부름꾼은 손님이라 생각하고 맞으러 오다 우뚝 멈춰 섰다.
등 뒤로 거느린 기사들과 리하르트의 서늘한 눈빛을 보니 일반적인 손님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루벨린 공작가……!’
기사의 제복에 새겨진 문양은 그 유명한 루벨린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눈앞에 있는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가 루벨린 공작이라는 뜻이었다.
아렌시아의 영웅.
그러나 적들에겐 잔악한 학살자.
그 의미는 곧, 루벨린의 적이 되면 멸망한 파이란 왕국과 같은 꼴이 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일꾼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심부름꾼은 리하르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덜덜 떨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지부장을 좀 만나고 싶군.”
“그, 금방 모셔 오겠습니다.”
곧장 지부장에게 가려던 심부름꾼은 몇 걸음 안 가 걸음을 멈췄다.
이미 지부장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부장은 리하르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이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급히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금발 머리에 연둣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이곳에 오지 않았나?”
엘리사의 외양 묘사를 들은 지부장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으나,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송구하오나, 하루에도 수백명이 드나드는 곳이라 행인 하나하나의 얼굴까지 기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지부장의 동요를 목격한 리하르트는 그녀에게 요구했다.
“잠시 상단을 살펴보고 싶군. 협조해 주겠나?”
말로는 협조를 구하고 있었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상단을 뒤엎을 기세였다.
지부장은 잠시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이내 순순히 물러났다.
“기꺼이.”
지부장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벨린의 기사들이 수색을 시작했다.
리하르트 역시 행상인들이 머무는 방들을 모두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엘리사는 없었다.
‘엘리사…….’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제게 남기고 간 편지를 떠올렸다.
[리하르트.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언제나 네가 행복하기를 빌게.
진심을 담아, 엘리사.]
네가 없는데 행복하라니.
도대체 얼마나 내 피를 말릴 생각인 걸까.
“각하.”
마침 수색을 마친 톰슨이 다가왔다.
“식당과 창고도 뒤져 봤지만, 없었습니다.”
리하르트는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삼마차의 마부가 엘리사를 마차에 태운 것이 나흘 전이란 걸 알고부터 기대를 버렸지만, 막상 직접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막막해졌다.
‘……지부장을 협박해 입을 열게 할까.’
극단적인 방법을 진지하게 고려하던 그때, 등 뒤에서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막 공작저에서 온 기사였다.
“각하. 이틀 전에 도착한 편지인데, 오늘 아침에 발견하고 가져왔습니다.”
“공작저로 돌아간 후에 읽겠다.”
그대로 기사를 지나치려던 리하르트는 발신인에 적힌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엘리사.]
하지만 필체는 엘리사의 것이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문득 어떤 예감을 느끼고 편지를 꺼냈다. 편지를 읽는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
“딸아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으니, 오늘 바로 제도로 가 볼까 해요.”
아침 식사를 마친 올리비아가 말했다.
그에 엘리사는 안도하며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언제든 떠날 채비가 되어 있었기에 딱히 챙길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외출용 로브를 입고 있던 그때, 마찬가지로 떠날 채비를 마친 올리비아가 찾아왔다.
“엘리사 양, 잠깐 시간 괜찮나요?”
엘리사는 앤을 잠시 내보내고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올리비아는 엘리사에게 다가가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녀가 내내하고 있던 루비 목걸이였다.
엘리사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 이건……?”
“내 마음이에요. 제도였다면 아기 용품이나 산모에게 필요한 것을 좀 사 줬을 텐데, 지금 이거 말곤 달리 줄 것이 없어서. 팔아서 자금으로 쓰든, 간직하든 상관없어요.”
“아니, 안 주셔도 돼요. 마음만 받을게요.”
“나한텐 정말 별거 아닌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올리비아는 목걸이를 풀려 하는 엘리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저지했다.
“역시 예뻐서 뭐든 잘 어울리네.”
흔흔하게 엘리사를 바라보던 그녀의 초콜릿색 눈동자가 빛바랜 기억을 더듬는 듯 아련해졌다.
“오래전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예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였죠.”
“……”
“그 친구가 임신을 하고 찾아왔었는데, 그때 내가 경황이 없어서 뭐 하나 제대로 챙겨 주질 못했어.”
“…….”
“그게 그 친구의 마지막 모습일 줄 알았다면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게 평생 마음에 사무치더라.”
올리비아는 그 시절의 친구와 비슷한 나이대인 엘리사의 손을 가만히 보듬어 잡으며 말을 이었다.
“엘리사 양을 보니까 그 친구가 생각났어요. 예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냥 친구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면 안 될까?”
그렇게 묻는 올리비아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 눈빛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이내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부인의 마음, 소중히 간직할 게요.”
올리비아는 그제야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마침 떠날 준비를 마친 벨테인의 마차와 엘리사가 타고 온 아르덴 상단의 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마차에 오르기 전, 엘리사에게 말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벨테인을 찾아와요.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해 둘 테니.”
“감사해요, 부인. 정말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네요.”
엘리사가 화답하자, 올리비아는 엘리사의 뺨에 가볍게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올리비아가 마차에 오르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안녕, 예쁜 언니.”
올리비아의 품에 안긴 그녀의 딸 리제가 마차 창문 너머로 자그만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인사했다.
엘리사도 웃으며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벨테인 후작가의 마차가 먼저 출발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갈까, 앤?”
“네, 마님.”
멀어지는 벨테인 후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던 엘리사도 마차에 올랐다.
이제 정말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음?”
별장 관리인은 엘리사가 떠난 별장을 정리하다, 엘리사가 머물던 방의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은 주머니 두 개와 짤막한 쪽지였다.
[덕분에 편히 쉬다 가요. 여러모로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옆의 주머니에는 각각 쿠키와 금화가 들어 있었다.
그저 지부장에게 봉급을 받고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지만, 자신의 노고를 치하해 주는 쪽지와 선물을 받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런 엘리사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1층 현관에서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관리인은 서둘러 내려갔다.
“누구십니까?”
“……사람을 찾고 있다.”
시릴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였다.
관리인은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서늘한 눈빛을 한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리하르트는 다짜고짜 관리인을 밀치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사는 어디에 있지?”
“엘리사…… 라니요?”
“모른 척해 봐야 소용없다. 여기 있는 걸 알고 왔으니. 말해. 엘리사는 어디 있나?”
관리인은 그제야 리하르트가 찾는 사람이 엘리사라는 걸 알아챘다.
“그, 그분은 좀 전에 떠나셨습니다.”
관리인의 말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관리인은 심기가 불편해진 리하르트가 기물이라도 파손할까 노심초사했으나, 리하르트는 나직이 욕설을 읊조리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진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송구하지만,거기까지는저도잘….”
그렇게 말하는 관리인의 눈은 거짓을 말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곧장 돌아서 별장을 나왔다. 그리고 날아올라 동남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엘리사가 이미 떠났을 상황을 예상하고 아가일과 톰슨을 비롯한 루벨린의 기사들을 동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보내 두긴 했다.
그러니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이미 짐작 가는 엘리사의 최종 목적지가 있으니 그리 걱정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제 품 안에 없으니 불안하고 초조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무사한 모습을 봐야 이 불안이 가실 것 같았다.
막 동남쪽 관문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러 마차들을 발견했다.
그중에 리하르트의 시선을 사로잡은 마차가 있었다.
‘아르덴 상단의 문양?’
그 마차에 아르덴 상단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리하르트는 다급히 그 마차의 앞에 내려섰다.
허공에서 내려오는 리하르트를 본 마부가 그 능력을 보고 단박에 그의 정체를 알아채며 놀랐다.
“루, 루벨린 공작 각하?”
리하르트는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