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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45화 (45/164)

45화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마차에 탄 사람은 엘리사가 아닌,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남자였다.

졸고 있었던 듯 그의 눈은 풀려있었고, 입가엔 허연 침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이를 사리물었다.

괜스레 큰소리치던 남자는 살벌한 리하르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곤 얼어붙었다.

“누, 누구십…… 꼭!”

급기야는 그 싸한 기세에 눌려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던 리하르트는 입술을 짓씹으며 문을 닫았다.

“실례를 범했군.”

그런 리하르트의 곁으로 톰슨과 아가일이 다가왔다.

“각하, 마님은 -”

“못 만나신 거군요.”

톰슨과 달리 아가일은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리하르트 역시 그의 말을 듣고 이쪽의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엘리사는 이쪽 관문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잠시 고민하던 톰슨이 물었다.

“그 마을에서 소르네티로 가려면 반드시 이쪽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신 걸까요? 중간에 행선지가 바뀌셨나?”

“그럼 기사들을 서둘러 다른 쪽으로도 보내서…….”

“……아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던 리하르트의 뇌리에 전혀 다른 가능성이 스쳤다.

톰슨과 아가일의 의아한 시선이 리하르트에게로 향했다.

“소르네티로 가는 길은 또 있다.”

“다른 길이요? 그럼 산을 타고 가야 할 텐데.”

리하르트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돌아서며 덧붙였다.

“땅이 아니라 물길을 통해서 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러고는 곧장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북쪽 선착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에게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시각, 엘리사가 탄 마차는 별장으로부터 북쪽에 있는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제 손에 쥔 승선권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저녁, 엘리사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으로 찾아온 지부장이 엘리사에게 준 것이었다.

토브 강 선착장으로 가면 저희 상단에서 운영하는 배가 있습니다.

‘배요?’

“네. 예정보다 일정이 지체되었기도 하고, 아무래도 약해진 몸으로긴 시간 여행을 하시는 게 부담이 되실 것 같아서요.”

제도에 토브 강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동쪽 바다로 흘러갔다.

소르네티까지 마차를 타고 가면 보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토브 강을 통해 배를 타고 가면 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상단주님이나 몇몇 귀빈들께서도 종종 배를 타셔서, 호화 객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뱃멀미만 아니면 마차로 가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게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엘리사는 그녀가 건네는 승선권을 냉큼 받았다.

편안하고 빠른 것도 좋았지만, 이 세계에서 배를 타 보는 것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선착장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선착장에는 거대한 선박이 대어 있었다. 무역품들과 사람을 함께 실어 나를 수 있도록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진 배였다.

엘리사는 호기심에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졸리다….’

좀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은 임신한 후 언제나 그랬듯 졸음을 호소했다.

아직 배가 출발하려면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엘리사는 어서 배에 타서 몸을 누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엘리사를 앤이 붙잡았다.

“마, 마님. 저 간식거리를 좀 사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금방 다녀올게요.”

앤은 종종걸음으로 근처 가판대로 다가갔다.

가판대에 타 지역에서 들어온 과일이나, 뱃사람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간식들을 팔고 있었다.

엘리사는 근처 의자에 앉아 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앤은 가판대를 둘러보다가, 가판대 주인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즉석에서 팬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앤은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앤의 표정이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주위에 관심을 가지고 둘러본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치였다.

‘왜 저러지?’

엘리사는 그런 앤의 행동에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때마침 팬케이크를 받은 앤이 다가오는 바람에 잊어버렸다.

“배……… 바로 타실 거죠?”

“응. 좀 피곤해서. 객실에서 쉬고 싶어.”

“죄, 죄송해요. 기다리시게 해서.”

“괜찮아. 어서 가자.”

엘리사는 승선권을 들고 앞장섰다.

하지만 앤은 곧장 따라오지 않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미적미적 엘리 사의 뒤를 따랐다.

“앤?”

“아, 죄송해요.”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살던 곳이랑 먼 곳으로 가게 돼서 섭섭한 걸까.’

나 하나 믿고 낯선 땅으로 가는 아이이니, 내가 더 잘해 줘야지.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배에 올랐다.

두 사람이 배에 오르고 한 시간 후, 마침내 배가 출발했다.

*

“으음….”

배가 출발하기도 전에 잠들었던 엘리사는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창문으로 스며드는 환한 달빛을 보니 저녁 시간은 훌쩍 지난 야심한 시간인 듯했다.

엘리사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내받은 객실은 특등석답게 호화로웠다. 침대도 컸고, 여러 지역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는 작은 책장에, 체스판과 테이블도 있었다.

거기에 바다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창문과 개인 욕실까지 딸려 있었다.

앤은 옆 침대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겠지.’

엘리사는 앤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 준 후, 숄을 두르고 방 밖으로 나왔다.

방문 옆에 앉아 방을 지키고 있던 용병이 엘리사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잠깐 바람 좀 쓰려고요. 멀리 가지 않을 테니까 그냥 있어요.”

“아직은 강이라 물길이 잠잠합니다만, 혹시 모르니 난간 가까이는 다가가지 마십시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엘리사는 저를 걱정해 주는 남자에게 생긋 웃으며 답하고 돌아섰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나왔다. 그러자 제법 거센 강바람이 엘리사를 덮쳤다.

엘리사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한쪽으로 정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후에 제도를 떠나올 때 보았던 마지막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보였다.

좌우의 높고 낮은 산 사이로, 넓은 강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고요한 강에 엘리사를 태운 이 거대한 배만이 홀연히 떠 있었다.

그 배를 환한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피곤해도 마지막 풍경을 좀 더 기억에 새겨 둘걸.’

엘리사는 제도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것이 뒤늦게 아쉬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지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또렷한 건 이상하게도 리하르트였다. 함께 지낸 시간만 따지면 1년도 채 되지 않는데도.

엘리사는 주머니에 있던 브로치를 꺼냈다. 떠나기 전, 리하르트의 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달빛을 받은 브로치가 영롱하게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엘리사는 그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되새겼다.

그때, 강바람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그에 묘한 기시감을 느낀 순간, 브로치를 비추던 달빛이 가려졌다.

엘리사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리하르트?”

달빛을 등진 리하르트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눈을 하고서.

‘내가 반드시 찾아갈 테니.’

이 순간에, 왜 하필 그 말이 생각 나는지.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도 못했다.

움직이지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이 자리를 피한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어딜 가든,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저 남자에게.

탁 -

리하르트는 가뿐히 난간을 밟고 갑판으로 내려왔다.

그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엘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도망가면, 내가 못 찾을 것 같았어?”

그렇게 말하며 성큼 다가오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했다.

엘리사는 그제야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물론 의미 없는 뒷걸음질이었다.

한 발짝 떼기가 무섭게, 성큼 거리를 좁혀 온 그가 엘리사의 허리를 끌어당겼으니까.

엘리사가 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는 속절없이 끌려가 넓은 품에 폭 안겼다.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게 속박하듯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리고 다른 손은 엘리사의 뺨을 감싸 쥐고 올려 시선을 맞췄다.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은 따뜻했지만, 마주한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리하르트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제 품에 갇힌 엘리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애를 가지고 어딜 가려고.”

성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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