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리하르트가… 알았어?’
리하르트의 말에 엘리사의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설마하니 그가 배를 쫓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임신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서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내 아이를 가진 이상 아무 데도 못 가, 엘리사.”
“…….”
“또 달아나고 싶으면 달아나 봐.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테니.”
그의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쳤다. 그에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몸을 떨었다.
그런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지더니,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그녀를 감쌌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
엘리사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체향이 묻어나는 긴 로브가 마치 저를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게서 떼지 못하는 그의 눈빛처럼.
*
“으음….”
깊이 잠들었던 앤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하려던 앤은 옆자리의 빈 침대를 보고 번쩍 눈을 떴다.
“마님?”
앤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두리번거렸다. 불 꺼진 욕실에는 당연히 없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신 거지?’
배 안에선 달리 갈 곳도 없는데.
늦은 시간에 홀연히 사라진 엘리사가 걱정이 된 앤은 엘리사를 찾아 나설 요량으로 로브를 입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엘리사가 들어섰다.
“마님, 이 시간에 어디 다녀오셨…”
엘리사에게 성큼 다가서던 앤은 엘리사의 뒤로 따라 들어서는 리하르트를 보고 놀라 멈춰 섰다.
“가, 각하?”
“잠깐 산책하고 왔어.”
엘리사는 앤에게 짤막하게 대답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감싸 안고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엘리사의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나갔다 올게.”
객실을 나온 리하르트는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실은 배 갑판의 가장 위쪽, 강과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리하르트가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자, 견습 선장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최고 책임자와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군.”
리하르트의 서늘한 눈을 보니 안된다고 했다간 목이 뎅겅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견습 선장은 서둘러 선장을 깨웠다.
“서, 선장님.”
“지금이 몇 신데, 적당히 타일러서 돌려보냈어야 할 것 아니냐.”
숙면을 취하다 강제로 침대에서 일어나게 된 선장은 견습 선장을 타박하며 문 쪽으로 다가오다, 리하르트를 보고는 눈을 번쩍 떴다.
싸늘한 눈빛과 언뜻 보기에도 값깨나 나가 보이는 옷들을 보니 새벽 몇 시에라도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상대였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뭔가 불편하신 것이라도?”
“가까운 선착장에 배를 정박했으면 하는데.”
엘리사를 데리고 날아서 강을 건널수도 있었지만, 강 너머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과 산이었다.
그나마 가까운 마을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거니와, 바람이 너무 거셌다.
가뜩이나 몸이 약해진 엘리사에겐 그 바람도 좋지 않을 것이다.
선착장이라면 마차를 빌리거나, 혹은 루벨린의 마차가 올 때까지 머물거처가 있을 터였다.
“예…?”
리하르트의 황당한 요구에 선장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 배는 승객을 태우는 배이기도 하지만, 상단의 물품을 수송하는 배이기도 했다.
그 물품들 중에는 한시바삐 도착해야 할 것들도 있기에, 원래 상단의 배는 선착장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아르덴 영지로 가곤 했다.
그런데 배를 대라니.
“소, 송구하오나 저희 배에는 급히 전달해야 할 물건들이 있어 중간에 정박하지 않습니다.”
“……..”
“늦어지면 저희 측에 막심한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지라……. 죄송하지만 정박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손해, 루벨린에서 전부 두 배로 물지.”
리하르트의 말에 선장은 물론, 그의 뒤에 있던 견습 선장의 입도 떡 하니 벌어졌다.
두 배로 물겠다는 이야기도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루벨린’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루벨린가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광산을 보유한 거부이니, 두 배로 물겠다는 그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전쟁 영웅이자,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가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가문이 아닌가.
그의 뜻은 황명만큼이나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정박해.”
선장과 견습 선장은 돌아서 유유히 멀어져 가는 리하르트의 뒷모습에 대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리하르트가 객실을 나간 후, 엘리 사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런 엘리사의 눈치를 살피던 앤은 조용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마님. 제가… 각하께 편지를 보냈어요.”
엘리사가 고열로 앓아누웠을 때, 앤은 혹여나 엘리사가 이대로 잘못 되기라도 할까 겁에 질려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 끙끙 앓던 엘리사가 바싹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리하르트…….
신음처럼, 구원처럼 흘러나온 이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앤은 망설임없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와 준다면 이 모든 상황을 해결될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지금 엘리사에게 가족이라곤 리하르트뿐이지 않나.
“멋대로 마님과의 약속을 어겨서 정말 죄송해요……….”
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엘리사에게 용서를 구했다.
엘리사는 그런 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에게서 멀어지려던 것도, 아이의 존재를 숨기려던 것도.
하지만 어째서일까.
화가 나기보다는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그 당시의 너에겐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
“그래도 이번 한 번뿐이야. 다음부 턴 내게 먼저 의논해 주렴.”
“네….”
앤이 눈물을 막 갈무리했을 때, 리하르트가 객실로 돌아왔다.
앤은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채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다가온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앞에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제 아이까지 가지고 제게서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내 아이를 가지고도 도망갈 만큼, 나와 이혼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나 내가 싫을까.
하지만 막상 두려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를 마주하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던 분노가 억눌러졌다.
대신 그 분노보다 더 큰 감정이 샘솟았다.
다시 그녀를 되찾았다는 안도감과, 그녀를 향한 지독한 감정이.
그녀가 자신을 두고 도망쳤음에도 결국 그녀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랑이.
잠시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도망갔어?”
“……”
“내 아이까지 가지고.”
엘리사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에게 여기가 책 속이니, 죽을 운명을 피하려고 그랬단 이야기들은 할 수 없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배를 감싸듯 덮었다.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그런 엘리사의 행동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동요했다.
“네가 아이를 싫어하는 거 알아.”
“………”
“이 아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내가 잘 키울게. 그러니까 -”
“……싫어하지 않아.”
일전의 대답과 달라진 리하르트의 반응에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미안한 기색이 내비쳤다.
자신이 싫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란 사실에 대한 안도감과, 그녀가 도망치는 데 원인을 제공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괴로운 탄식을 내뱉던 리하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엘리사.”
리하르트는 얼떨떨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녀를 안은 그의 눈빛이 집착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다신 도망가지 마.”
애원하는 듯 간절한 목소리였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일전의 대답과 달리 그는 아이를 딱히 기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원작의 리하르트는 아이의 존재를 극도로 혐오했었는데.
‘원작이랑은 달라진 건가?’
그럼, 우리가 함께해도 그런 불행한 엔딩은 맞이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 가능성에 기대해도 되는 걸까.
‘아직 우리가 죽는 시점까지는 몇 년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내가 리하르트를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그에게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언제든 원작과 비슷해지는 낌새가 보이면 그때 도망가도 늦지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단단히 먹었던 마음이 풀어지며 울컥 눈물이 났다.
사실은, 혼자서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고 겁이 났었다.
그 두려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안도감이 몰려왔다.
“미안해.”
리하르트는 울음을 터트리는 엘리 사를 가만히 다독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동안, 좀 전까지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 오르던 검은 기운이 사그라들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