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른 아침, 에이든은 신전 주변의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가 손을 움직이면 어느새 손바닥에 고인 맑은 물이 쪼르륵 흘러 땅을 적셨다.
물을 머금은 새싹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이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여름쯤엔 네 꽃을 볼 수 있겠구나.”
매일 아침, 화단을 관리하는 것이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때, 평화로운 새소리만이 울리던 신전에 무거운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그쪽을 돌아보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성기사단장 루펠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에이든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가져온 소식이 어떤 것일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성하.”
“어찌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서쪽 테아릴 영지 부근과 제도의 북쪽 선착장 부근을 살펴봤습니다만, 딱히 수상한 자나 수상한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에이든은 여상한 표정으로 다시 화단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성기사단장이 돌아오기 전부터 그가 자신이 바라는 소식을 가져오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선착장에 도착할 예상 시간보다 훨씬 전에, 선착장 부근에서 느껴지던 악한 기운이 사라졌으니까.
“좀 더 범위를 넓혀 수색해 보겠습니다.”
성기사단장은 며칠 밤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가 이끄는 성기사단은 제국이 아닌, 오직 신전에 귀속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겉으론 신께 귀의한 신실한 자들만이 모이는 곳이었지만, 실상은 가문에서 아무런 작위도 받지 못했으나 명예를 지키고 싶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쭉정이 기사단’이라며 조롱했으나, 에이든은 그들을 차별 없이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고 아껴 주었다.
그러한 탓에 에이든을 향한 성기사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루펠의 피곤한 기색을 본 에이든은 성기사단장의 뜻을 만류했다.
“아닙니다. 그만하면 되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는 주변을 경계하라 하세요.”
“신성하신 뜻을 받듭니다.”
성기사단장은 에이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런 그의 뒤로 다가서는 또 다른 인영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에이든의 얼굴에 반색이 비쳤다.
어느새 에이든의 앞까지 다가온 올리비아가 마찬가지로 만면에 반색을 내비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간만에 뵙습니다, 성하.”
“실로 간만이군요, 부인.”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에이든은 그녀의 드레스뒤에 숨은 리제를 발견하곤 미소를 지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올리비아를 지난 몇 년간 만나지 못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에이든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제 양.”
“안녕하세요……….”
리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에이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올리비아의 뒤로 숨었다.
그러나 호기심과 두려움이 담긴 시선만은 에이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에이든은 근처에 있던 심부름꾼 아이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한 후, 신전 안으로 올리비아와 리제를 안내했다.
신전을 살펴보며 에이든의 뒤를 따르던 올리비아는 신전 구석구석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의 기부금은 오직 신전을 위해 써 달라고 부탁드렸었는데, 또 사람들에게 나눠 주신 건가요?”
“더 급히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을 돕는 것이 곧 신전을 위한 일이니까요.”
“그리 그들을 위하신다면 신의 증서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귀족들에게 파세요. 그 돈이면 그들도 돕고, 신전도 새 단장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다른 왕국의 신전에선 그리 하는걸요.”
‘신의 증서’는 소지자가 생전에 덕을 많이 쌓아 신의 곁으로 갈 자격을 얻었다는 것을 알리는 증서였다.
사람들은 관에 그것을 함께 묻으면 죽어서 신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주변 왕국의 신전에서는 그것을 돈주고 팔아 부를 축적하곤 했는데, 왕실에선 그 치솟는 값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에이든은 그런 올리비아의 말에 피식 웃었다.
“황녀께서 제도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방법을 말씀하시다니, 참으로 여전하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목에는 여전히 율리아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올리비아는 오랜 친구의 유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그러는 성하께서도 참으로 변함없으시군요.”
마침내 신전 안쪽의 응접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를 마셨다.
그동안 에이든에게 낯가림을 푼 리제는 두 사람의 티타임이 끝날 즈음에는 에이든이 주는 과일 말랭이를 곧잘 받아먹게 되었다.
차를 말끔히 비운 에이든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기도를 올리러 갈시간이었다.
“오늘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러 오셨습니까?”
에이든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당연하게 자신의 가문을 언급하려다, 다른 이를 떠올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늘은 새로운 친우를 위해 기도 할까 해요.”
*
아르덴 상단의 배는 이른 아침, 가까운 선착장에 정박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 그리고 앤은 온종일 마차를 타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공작저에 도착했다.
막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집사 그레이슨을 비롯한 모든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엘리사를 반겼다.
“마님!”
그중에서 목소리가 제일 큰 건 당연히 톰슨이었다.
“마님, 루벨린에 각하는 없어도 되지만 마님은 없으면 안 됩니다.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
“맞습니다. 각하께선 아직 영지 업무도 서투르십니다.”
“마님이 없으면 아마 평생 서투르실걸요.”
톰슨의 말에 아가일이 옳다구나 맞장구쳤다.
리하르트는 면전에서 자신을 까 내리는 건방진 부하들을 싸한 눈으로 보았지만, 엘리사의 앞이어서인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간 것이 머쓱하기도 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반겨 주는 이들이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저 역시,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이 반가웠다.
“미안해요. 다들 걱정하게 해서.”
“무탈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마님.”
그레이슨은 빙긋 웃으며 엘리사를 반겼다.
“아직은 저녁 바람이 찹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들어가시지요. 간단하게 드실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몇 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리코타 치즈와 토마토가 곁들여진 샐러드와 새콤달콤한 청포도, 사과주스, 버터를 바르지 않고 구운 빵등 입덧으로 고생하는 엘리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엘리사는 속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준비한 이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식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샐러드와 과일류는 입에 맞았다.
문제는 빵이었다.
입덧을 시작한 후로 빵은 냄새조차 맡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배 속의 아이는 빵을 거부했다.
“우욱….….”
엘리사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식당을 뛰쳐나갔다.
“엘리사!”
“마님!”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사를 지켜보던 리하르트도, 옆에서 대기 중이던 앤도 엘리사를 쫓아 나갔다.
엘리사는 앤이 양동이를 내밀자마자 속을 게워 냈다.
리하르트는 지친 듯 무너지는 엘리 사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엘리사.”
엘리사는 잠시 기진맥진해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식사 마저 해, 리하르트. 난 먼저 올라가 볼게.”
엘리사는 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과정을 혼자 감당하려고 했다니.’
그녀를 놓치지 않은 것에 안도했으나, 반대로 곁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음에 자책감을 느꼈다.
그런 리하르트를 지켜보고 있던 톰슨과 아가일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언제 저희 몰래 후사까지 만드신 겁니까?”
눈치 없는 톰슨의 장난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 기색을 눈치챈 아가일이 톰슨을 팔꿈치로 퍽 쳤다.
톰슨은 그제야 장난칠 타이밍이 아님을 알아채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튼 제 말의 요지는 그게 아니고, 마님께 힘이 되어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
“각하께서 대신 아파해 주실 순 없으니 파티라든가, 선물이라든가, 그런 걸로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고요.”
모처럼 톰슨의 정상적인 이야기에 리하르트가 관심을 기울였다.
“축하한다거나, 기쁘다거나 그런 말은 하셨습니까?”
“……정신이 없어서.”
“어허, 그럼 안 되죠. 임신했을 때 못 해 주면 평생 갑니다.”
톰슨의 열변을 잠자코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되물었다.
“넌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지?”
갑작스러운 리하르트의 공격에 톰슨은 흠칫하더니,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직이 대꾸했다.
“그야, 전 준비된 남자니까요.”
그에 옆에 있던 아가일이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톰슨은 그런 아가일을 흘겨보았다.
“뭘 웃어? 너도 똑같으면서.”
톰슨의 반격에 아가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물여덟의 톰슨 레이트, 스물다섯의 아가일 리체스터. 둘은 지금껏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는 노총각이었다.
잠시 싸한 표정으로 톰슨을 흘겨보던 아가일이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하지만 마님은 아직 안정기도 아니셔서, 너무 성대하게 파티를 여는 건 좀 부담스러우실 것 같은데요.”
“게다가 식사도 거의 못 하시지요.”
가까이 있던 그레이슨도 그 대화를 듣고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톰슨은 그들의 우려가 별거아니라는 듯 검지를 내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이번 파티에 필요한 건 음식이나 물건이 아니니까.”
리하르트와 아가일, 그레이슨은 의아한 눈으로 톰슨을 쳐다보았다.
톰슨의 능청스러운 눈빛은 리하르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
엘리사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앤은 엘리사의 몸에 향유를 바르고 하늘하늘한 잠옷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평소보다 좀 더 고른 듯한 잠옷도, 한쪽으로 곱게 땋아 주는 머리도.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엘리사는 의문을 품은 채 침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앤이 잠자리 복장에 평소보다 신경 쓴 이유를 바로 알아챌수 있었다.
어둠으로 덮인 침실 곳곳에 반짝거리는 발광석이 놓여 있고, 그 주위에 꽃잎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예쁘다…….”
엘리사가 침실 입구에 멈춰 서서 방 안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