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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48화 (48/164)

48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품에 만개한 장미로 만든 꽃다발을 안고서.

성큼 엘리사의 앞으로 다가온 리하르트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엄마가 된 걸 축하해, 엘리사.”

“아….”

“아직 서투르지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엘리사는 멋쩍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말하는 리하르트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이런 이벤트를 준비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자기 아이라고 책임감을 느끼나 봐.’

어찌 됐든 아이가 아빠에게 미움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동시에 희망도 생겼다.

서로를 이성으로 사랑하진 않더라도 친한 친구처럼, 가족처럼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고마워.”

엘리사는 웃으며 리하르트가 건넨꽃다발을 받았다.

다행히 꽃향기는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풀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엘리사의 표정을 살피던 리하르트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아빠랑 엄마가 같이 자는 게 아기한테도 좋다고 해서, 오늘부터는 같이 잘까 하는데.”

“아………. 그, 그래. 그러자.”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엘리사는 엉겁결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피곤할 텐데 어서 자자.”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침대로 이끌었다.

엘리사는 어쩔 줄 모를 어색함에 침을 꼴깍 삼켰다.

‘어색해…..’

성인이 된 그와 함께 자는 건 몇 밤이고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어색해도 아빠가 아빠 노릇을 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쭈뼛쭈뼛 먼저 침대에 누우려 했다.

그런데 리하르트는 눕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녀의 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엘리사가 물었다.

“만져 볼래?”

리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아기가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기는 여기 있어.”

엘리사는 그의 손을 잡고 조금 내렸다. 크고 따뜻한 손이 아랫배를 덮었다.

그 손은 제대로 닿지도 못한 채 떨고 있었다. 그의 미간 역시 집중한 듯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혹시라도 손에 힘이 실릴까 두려운듯이. 아직 미미한 아이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느껴 보려는 듯이.

엘리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아직은 엄청 작아서 별 느낌 없을 거야.”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곧바로 손을 뗐다.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해서 아기가 잘못될까 겁이 났다.

대신 배 속의 아이를 축복했다.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아가.

곧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그리고 엘리사의 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스킨십에 엘리사는 흠칫 놀랐다. 아이가 생겼던 그날 밤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리하르트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발광석의 은은한 빛을 머금은 잘난 얼굴이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그 얼굴을 계속 바라보다간 그대로 홀릴 것만 같았다. 꼭 그날 밤처럼.

“나, 피곤해. 이제 잘래.”

엘리사는 다급히 그의 시선을 피해 먼저 침대에 누웠다.

곧이어 리하르트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저를 등지고 누운 엘리사를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그에 엘리사가 파드득 놀랐다.

“리, 리하르트?”

“예전처럼 침대에서 떨어지면 위험하잖아.”

“나 이제 얌전히 자는데…….…?”

엘리사가 반박했지만, 리하르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새 잠들었나?’

하지만 돌아볼 수가 없다. 만약 그가 깨어 있다면, 조금 전 그 눈을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엘리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하나의 감각을 차단하자,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며 모든 것이 너무 잘 느껴졌다.

맞닿은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이라든가, 목덜미에 닿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라든가.

온몸의 세포가 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일 때마다 심장이 주체를 못 하고 팔딱거렸다. 그가 이 소리를 듣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이래서 잠이 오겠냐고!’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여정으로 고되었던 몸은 금세 수마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뒤척이던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아 리하르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상하게,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데도 불안했다.

‘……배가 불러 오면 더 이상 못달아나려나.’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자조했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그녀를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리하르트는 다시 조심스럽게 엘리 사의 배에 손을 얹었다.

그녀를 잠시라도 더 제 곁에 붙잡아줄 소중한 아이였다.

‘생각보다… 싶지 않아..’

예기치 못하게 생긴 아이였지만, 막연히 생각했던 것만큼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작고 여린 몸에 저와 그녀를 닮은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엘리사의 아이라서인가.’

아이에 대해 생각하던 그때, 갑자기 등 쪽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전에 느껴지던 것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의 아주 미미한 통증이었지만,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라 신경이 쓰였다.

리하르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거울로 다가갔다.

느슨한 잠옷을 끌어 내리고 통증이 느껴진 왼쪽 등을 비춰 봤으나,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아가일에게 물어봐야겠군.’

외관상으론 보이지 않는 상처이니, 일반적인 상처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일은 진리의 탑에서 수많은 지식을 습득했다고 들었으니, 그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사가 곁에 없을 때마다 통증이 심해지는 듯한 건 기분 탓인가.’

그때, 엘리사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으응…….”

그 소리를 들은 리하르트는 곧장 엘리사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창가에 햇살이 살랑이는 아침.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던 엘리사는 지척에 놓인 베개를 꼬옥 끌어안았다. 베개는 크고 단단해서 안기가 힘들었지만, 포근하고 좋은 향기가 나서 좋았다.

‘그런데… 무슨 베개가 나보다 크지? 게다가 숨도 쉬……… 고?’

잠에 취해 있던 엘리사는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떴다.

‘헉’

하마터면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끌어안고 있던 건 베개가 아니라 리하르트였다.

그는 엘리사를 끌어안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 좋은 꿈을 꾸는지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자는 얼굴이 뭐 이렇게 잘생겼담.’

옆으로 누워 있어도 얼굴이 쏠려 못생겨지긴커녕 오히려 살짝 흐트러진 흑발이 나른한 분위기를 더해 뇌쇄적으로 느껴졌다.

‘아침마다 이 얼굴 한 번 보면 태교 안 해도 되겠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태교를 하기엔 영 적합하지 않은 얼굴이다.

그는 마음에 평화를 주는 천사 같은 미남상보다는, 보고 있으면 홀려서 영혼이라도 넘겨야 할 것 같은 악마상에 가까웠으니까.

‘음, 애초에 하네스는 아빠를 닮았을 테니 태교가 따로 필요 없으려나.’

엘리사가 조각상을 감상하듯 그의 이목구비를 요목조목 뜯어보던 그때, 곱게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떠지며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엘리사는 놀란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자, 잘 잤어?”

“좋은 아침.”

리하르트는 아침 인사와 함께 엘리 사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설렁줄을 다급히 당겼다.

엘리사가 왜 그러냐 묻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고 앤이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주치의를 불러와. 당장. 엘리사가 열이 나는 거 같으니.”

리하르트의 말에 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엘리사의 고열로 누구보다 마음고생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당사자인 엘리사는 기함하며 앤을 만류했다.

“아냐, 앤! 그냥 평소에도 있던 미열이야.”

앤은 그제야 엘리사의 말을 이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리하르트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평소에도 있는 미열이라고?”

“임신 초기엔 다들 그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배운 적 있어도, 임신한 여자의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그것이 엘리사에게 못내 미안했다.

‘당장 도서관에 가서 임신에 관한 책부터 찾아봐야겠어.’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앤이 물었다.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응. 부탁해.”

“내 것도 같이.”

앤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방을 나갔다.

엘리사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배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좋은 아침.”

아이에게 건네는 아침 인사였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해.’

그가 배에 입을 맞출 때마다 그 배 속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이, 그와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저 아이에게 책임을 다할 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온전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마음에 큰 안정을 주었다.

“마님, 들어갈게요.”

잠시 후, 앤이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다.

엘리사의 식단은 빵이 아예 빠져 있었고, 리하르트의 식단에 샌드위치 같은 것이 추가되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냄새가 강한 음식은 없었다.

“고마워, 앤.”

엘리사는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시원하고 신선한 샐러드는 울렁거리는 속에 잘 받았다.

그런데 그때, 샌드위치를 먹으려던 리하르트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리하르트?”

“욱….”

하지만 그는 샌드위치를 먹지 못하고 침실을 뛰쳐나갔다.

엘리사와 앤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가 나간 방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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