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점심 무렵, 아가일은 리하르트의 집무실에서 그의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수도에 오고 얼마 안 되었을 시점부터 등에 통증이 있으셨다는 겁니까?”
“그래.”
“그럼 통증이 느껴지시는 부위를 좀 보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아가일의 말대로 셔츠를 벗고 등을 보였다.
아가일은 눈앞에 드러난 리하르트의 등 근육을 보고 흠칫 놀랐다.
셔츠 너머로 두드러지는 윤곽만으로도 잘 단련된 몸이라는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감탄이 나왔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큰 골격위에 탄탄한 근육들이 다져져 있어 위압적이고 단단해 보였다.
그가 살짝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등 근육은 남자인 아가일까지 압도할 정도였다.
잠시 흠칫했던 아가일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리하르트의 등을 살폈다.
리하르트의 말대로 외관상으론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군요.
혹시 언제 통증이 심해지십니까? 특정 행동을 할 때 통증이 심해졌다거나…… 뭐 그런 거요.”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엘리사가 옆에 없으면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더군.”
근육통을 예상했던 아가일은 리하르트의 대답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건 그냥 마님에게 분리 불안을 느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말하자면, 상사병 같은.
톰슨이라면 생각한 그대로 이야기했겠지만, 아가일은 돌려서 말했다.
“실질적으로 마님이 그 통증을 완화시켜 주시진 않을 겁니다. 마님께 정화나 치유의 힘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심리적인 작용이겠죠.”
“그렇겠지.”
“혹시 다른 경우가 더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엘리사에겐 말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그레이 슨이 들어왔다.
“각하, 먹기 편한 음식들로 점심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가일은 그레이슨이 말하는 ‘먹기 편한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미 오전에 루벨린 공작가 사람들 사이에 리하르트의 입덧 소식이 다 퍼진 지 오래였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들은 사용인들과 기사들은 적잖이 놀랐다.
‘각하가 입덧을?’
그도 그럴 것이, ‘남편 입덧’은 금실이 좋은 부부 사이일수록 임신한 아내의 심리에 동화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속설이 있었으니까.
다들 만인에게 무심하고 매사에 냉정한 리하르트가 입덧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반면 톰슨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박장대소했다.
‘요만하던 소년이 훌쩍 커서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귀엽단 말이지.’
하지만 아가일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렇게 덩치 큰 성인 남자를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나.’
톰슨이야 리하르트가 그보다 작던 시절부터 봐 왔다지만, 아가일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리하르트를 처음으로 봤다.
톰슨에겐 동생 같을지 몰라도, 아가일에게 리하르트는 아직 낯설고, 때때로 싸한 표정을 지을 때면 섬뜩한 상관일 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가일이 동생처럼 여기는 쪽은 갓 만난 리하르트보다는, 지난 8년간 보필한 엘리사 쪽이었다.
그래서 리하르트가 무서운 한편으로, 못마땅하기도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엘리사가 도망가게 했으니까.
이번 일은 어찌 잘 해결되긴 했지만, 아가일은 계속해서 리하르트가 엘리사에게 잘해 주는지 주시할 생각이었다.
“그럼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십시오.”
리하르트는 아가일의 인사를 받고 식당으로 왔다. 식당에 먼저 내려온 엘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
“아냐. 나도 금방 왔는걸.”
리하르트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 자극적이지 않은 샐러드와 새콤달콤한 과일 등이 놓여 있었다.
썩 내키지 않은 음식들이었지만, 그래도 엘리사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엘리사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곤 포크를 들었다. 샐러드와 과일은 언제나 그랬듯 잘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리하르트가 아침에 입덧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를 살폈다.
그 순간, 마찬가지로 엘리사를 살피고 있던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아.’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니, 정확히는 엘리사만이 그렇게 느꼈다.
리하르트는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 시선의 끝이 그녀만을 향해 있었다는 듯이.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시선에 붙잡힌 듯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뒤늦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 로하스 자작 일은 어떻게 됐어?”
“생포했는데 딱히 소득은 없었어.
오늘까지만 심문해 보고, 별다른 정보가 없으면 내일 풀어줄 생각이야.
그럼 펠리스 후작 측에서 죽……….”
죽이겠지, 말하려던 리하르트는 말간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 사를 보고 말을 멈췄다.
“그녀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 잔인한 말은 태교에 좋지 않을 터였다.
리하르트는 최대한 말을 순화했다.
펠리스 후작 측에서 처리하겠지.”
황제의 앞에서 루벨린의 이름으로 처형하겠다”고 했던 건 황제를 면전에서 도발하기 위함이었지, 실제로 죽일 마음은 없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황제에게 말했던 대로 다른 귀족들에게 루벨린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황제의 말대로 영지민들에겐 불안감을 심어 주게 될테니까.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살려 주는 건 어때?”
“왜?”
“내가 알기로 로하스 자작은 펠리 스 후작 아래에서 꽤 오래 일했어.
하지만 그와의 긴밀한 접점은 없지.
그저 이득을 위해 심부름을 하고 있을 뿐.”
엘리사가 말하는 ‘긴밀한 접점’은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나,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를 뜻했다.
하지만 펠리스 후작과 로하스 자작은 철저한 상하 관계로 이루어진 가벼운 관계였다.
“그 말은, 그 가벼운 접점만 없애면 쉽게 끊어질 관계라는 뜻이기도 해.”
“접점을 없앤다……….”
“일단은 풀어 주고, 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살려 주면 펠리스후작이 완전히 자길 버렸다는 걸 깨달을 거야. 그때가 회유하기엔 적기지.”
“하지만 로하스 자작이 그만큼 쓸모가 있을까?”
“오랜 시간 펠리스 후작 밑에서 일한 만큼, 자신도 모르게 핵심 정보를 꽤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우리 쪽으로 돌아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잠자코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던 리하르트는 새삼 실감했다.
엘리사는 문제를 가장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영지 업무를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새 훌륭한 안주인이 되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엘리사.
그렇게 해 볼게.”
엘리사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았다.
평소에 즐겨 먹던 샐러드였지만, 입덧을 시작한 이후 줄곧 샐러드만 먹고 있으니 물렸다. 다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마지못해 먹고 있을 뿐이었다.
설핏 미간을 찡그린 채 그런 엘리 사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뭔가 먹고 싶은 건 없어?”
자신이야 좀 못 먹어도 상관없지만, 가뜩이나 약한 엘리사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걱정이 되었다.
책에서 말하기를, 산모들은 보통 한두 가지 정도 강하게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했다.
엘리사가 원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떻게든 구해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엘리 사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아직은 속이 안 좋아서 아무 생각도 안 드네. 생각나면 이야기할게.”
엘리사는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표정은 걱정으로 굳어졌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본 엘리사는 그가 아이를 걱정한다 생각하며 안심시켰다.
“입덧이 심하면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뜻이래. 식사를 못해도 아기한텐 영양분이 잘 가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어.”
그러나 그를 안심시키려던 엘리사의 의도와는 달리, 리하르트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굳어졌다.
그때, 노크와 함께 그레이슨이 들어왔다.
“각하, 마님. 황궁에서 두 분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레이슨은 리하르트에게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건넸다.
편지의 내용은 뜯어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맘때 황궁에서 올 편지의 내용은 단 하나뿐이었다.
리하르트는 편지지를 뜯고 편지를 꺼냈다. 예상대로 편지는 황궁에서 열리는 수렵제 초대장이었다.
상투적인 초대장을 빠르게 확인한 리하르트는 그레이슨에게 말했다.
“나는 참석할 거고, 공작 부인은 감기로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답장을 보내.”
임신 초기인 엘리사는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엘리사는 곧장 나가려는 그레이슨을 불러 세웠다.
“그레이슨, 나도 참석하겠다고 전해요.”
“엘리사?”
리하르트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엘리사를 불렀지만, 엘리사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배 속의 아이가 루벨린의 이름을 이어받기로 한 이상, 황제가 루벨린을 견제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마음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 지난 8년간 가꾸어온 루벨린이니까.’
이제 루벨린의 영향력을 보여 줄때였다.
*
봄을 맞이한 소르네티는 만개한 꽃들로 가득했다.
이따금 바닷바람이 불어와 꽃잎들을 휘날리면 푸른 바다와 녹음, 그리고 오색의 꽃잎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그 절경 속에 갈색 머리의 미남이 서 있었다.
어느덧 훌쩍 자라 아르덴 상단과 아르덴 백작가를 이끌게 된 안셀이었다.
“슬슬 엘리사가 올 때가 됐는 데…….”
안셀은 짐꾼들이 별장 안에 새 가구들을 들여놓는 것을 지켜보며 의미 없이 회중시계를 딸깍이고 있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이 저택에도 사람이 오는군요.”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자, 머리가 다 센 백발의 노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낡은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를 품위가 느껴졌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안셀이 응대용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 저택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단걸 아시는 걸 보니, 선생께선 이곳에 오래 사셨나 봅니다.”
이 작은 마을에 백작인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귀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안셀은 신분 모를 노신사를 ‘선생’이라며 높여 주었다.
낯을 가리고 말을 더듬던 어린 소년은 그 어떤 상대를 만나는 능수능란하게 사업을 진행할 줄 아는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선생’이라는 호칭에 노신사는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평생을 이 마을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살았지요.”
그 말은 즉, 노신사가 왕년에 이 마을의 의사였음을 뜻했다.
안셀은 눈을 반짝였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이는 사이를 다져 두어 나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인맥도 넓을 것이고, 여러모로 도움이 될 터였다.
안셀은 엘리사를 위해 인맥을 터놓을 요량으로 노신사를 추켜세웠다.
“얼굴에 덕이 많이 보이신다 했더니, 의사셨군요.”
“그리 봐 주시니 쑥스럽군요. 제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이나다름없는 곳이랍니다.”
“그렇습니까? 어쩌면 조만간 이 저택에 살게 될 제 친구도 알고 계시겠네요.”
“오호, 이 마을에 사시던 분인가요?”
안셀의 예상대로 노신사는 엘리사에게 관심을 보였다.
안셀은 기다렸다는 듯 엘리사의 이야기를 꺼냈다.
“십 년쯤 전에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로엔그린 자작가의 외동 따님인데, 혹시 아십니까?”
하지만 안셀의 예상과 달리, ‘로엔 그린’의 이름을 들은 노신사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혹시 엘리사의 부모님과 원수라도진 사이인 건가………?’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안셀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눈빛으로 안셀을 바라보던 노신사가 되물었다.
“……방금, 로엔그린 자작가의 외동 따님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무슨 문제라도………?”
“그럴 리가……. 그럴 리가요.”
노신사의 표정은 원수를 상대하는 표정이 아닌,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사 아가씨는 분명 8년 전 그때 폐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어진 그의 말에 안셀의 눈빛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던 안셀은 이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죽다니요? 엘리사는 지금 루벨린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어 멀쩡히 잘살고 있는걸요. 선생께서 잘못 아셨나 보군요.”
“아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노인은 안셀의 부정을 한 번 더 부정했다. 안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제가 엘리사 아가씨께 사망 판정을 내렸던 의사니까요.”
그의 말에 안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엘리사가 그때 죽었을 리는 없다.
자신이 아는 엘리사는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그럼 내가 알던 엘리사가, 엘리사로엔그린이 아니라고?’
그럼 자신의 친구인 엘리사는 누구란 말인가.
안셀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곧장 별장 2층에 있는 회랑으로 향했다.
회랑에 있는 초상화에는 이 별장에서 살았던 엘리사 로엔그린’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 테니까.
회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 자, 휑한 회랑의 벽면이 보였다. 수리 보수를 한다고 뗐던 액자들이 아직 회랑 한쪽에 치워져 있었다.
안셀은 벨벳 천으로 덮어 둔 액자 더미로 다가갔다.
진실 앞에서 잠시 주저하던 그는 이내 결심한 듯, 벨벳 천을 걷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