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7. 엘리사 로엔그린
수렵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귀족 여성들은 수렵제나 건국제 등 황실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단장하는 데 힘썼다.
그들이 얼마나 값비싼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귀한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했는지가 곧 그들의 재력을 상징했으므로, 그뿐만 아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황실의 행사를 앞둔 시점의 의상 디자이너들과 보석 세공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귀족들은 마음에 드는 유명 디자이 너들과 세공사들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 아예 몇 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엘리사는 몇 년 만에 참석하는 행사기도 하고, 애초에 이혼을 할 생각이었기에 디자이너와 세공사를 예약해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행히 리하르트가 일찍이 거금을 주고 선점해 둔 디자이너와 세공사들이 있었다.
‘대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그 대들이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만들어 와라.’
리하르트는 디자이너와 세공사들이 만든 제품을 모조리 구매하겠다고 했다.
디자이너와 세공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다양한 드레스와 보석 장신구를 만들어 왔다.
이 중에 공작 부부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그리고 오늘은 그것들을 선보이는 날이었다.
디자이너들과 조수들이 만들어 온 드레스 대여섯 벌 중 연하늘색 드레스와 연분홍색 드레스가 수렵제 당일에 입을 드레스로 추려졌다.
“흐음.”
서로 다른 색상, 서로 다른 디자인의 두 드레스를 놓고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던 엘리사는 두 드레스를 제 몸에 대 보며 리하르트를 불렀다.
“리하르트, 어떤 게 더 잘 어울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둘 다 예뻐.”
그것이 그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입든 그의 눈엔 마냥 어여쁠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 대답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드레스 둘 다 예쁘지. 내 말은, 둘 중에 뭐가 더 나한테 어울리냐는 거야.”
좀처럼 선택하지 못하는 엘리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디자이너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결정이 어려우시면 둘 다 입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냥 보는 것과 입어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 들거든요.”
“오, 그게 좋겠어요.”
엘리사는 디자이너의 의견에 동의하며 드레스를 각각 입어 보기로 했다.
엘리사가 조수들과 함께 드레스룸으로 들어가고, 침실에 남겨진 리하르트는 앞에 놓인 카탈로그를 살폈다.
‘곧 있으면 배가 불러 올 테니.’
그때가 되어 주문하려면 너무 늦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있던 카탈로그에 임부용 드레스는 없었다.
리하르트가 옆에 있는 디자이너에게 물어보려던 그때, 드레스룸의 문이 열리고 연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사가 나왔다.
연하늘색 드레스는 엘리사의 눈부신 금발, 반짝이는 녹안과 어우러져 시원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봄 소풍에 걸맞은 옷이었다.
“어때?”
“예쁘네.”
리하르트의 대답에 엘리사는 흡족한 얼굴로 다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리하르트는 디자이너에게 물었다.
“임부용 드레스는 없나?”
“아, 임부용 드레스를 찾으시는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카탈로그 중에 있을 텐데…….”
디자이너는 조수에게 준비해 온 카탈로그를 전부 가져오게 했다.
루벨린 공작가는 가히 제국 최고의 거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부유했다.
즉, 매출을 한탕 올릴 기회였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임부용 드레스 카탈로그가 보이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각하. 아무래도 카탈 로그를 숍에 두고 온 듯합니다.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내어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디자이너가 속으로 가슴을 치던 그때, 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숍에 있는 임부용 드레스 전부 공작저로 보내. 가볍고 움직이기 편한 옷들 위주로.”
“예?”
“전부 구매하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디자이너는 한 박자 늦게 그 뜻을 이해하고 화색을 비쳤다.
“아, 네!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디자이너와 막 이야기를 마쳤을 때, 엘리사가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드레스룸 밖으로 나왔다.
무심코 그쪽을 돌아본 리하르트의 시선이 그대로 우뚝 멈췄다.
오프 숄더 디자인의 연분홍색 드레위로 가냘픈 어깨가 드러났다.
시스루 재질의 소매 너머로 비치는 곧게 뻗은 팔과 뽀얀 피부가 청초한 이미지를 자아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앞에서 몸을 살짝 돌리며 물었다.
“어때?”
엘리사가 보기엔 연분홍색 드레스가 더욱 잘 어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역시 연분홍색 드레스를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아까 그 드레스로 하자.”
“응? 난 이게 더 예쁜 거 같은데….”
“그건 집에서만 입어.”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매우 단호했다.
‘그렇게 별로인가?’
엘리사는 그의 반응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딘가 서늘해 보이기까지 하는 리하르트의 모습에 그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마지막은 미리 주문 제작했던 장신구들이었다.
루벨린의 광산에서 나는 순도 높은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가 단장을 마무리했다.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목걸이와 귀걸이를 본 앤과 하녀들은 저들이 더 좋아라 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눈에 그 보석들보다 더 빛나 보이는 건 엘리사였다.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아냐. 이만하면 충분해.”
어차피 수렵제에서 주목받는 건 황태자비인 로제일 것이다.
엘리사는 드레스나 장신구 말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근처에 서 있는 앤과 하녀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앤, 잠깐 이리 와 볼래?”
*
수렵제 전날 밤,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데리고 그의 침실로 왔다.
평소 리하르트는 엘리사와 함께 잠을 잤기에 그의 침실은 오직 드레스룸의 용도로만 쓰였다.
엘리사가 그를 그의 침실로 데려온 이유는 그를 꾸며 주기 위해서였다.
‘이번 수렵제는 리하르트가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식 행사니까.’
모든 귀족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렇다면 그 기대의 주인공답게 꾸며 줘야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드레스룸에서 옷 몇 벌을 꺼내 왔다. 도망치기 전, 그의 방에 잠시 왔을 때 봐 두었던 옷들이었다.
“리하르트, 이거부터 입어 봐.”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내미는 청록색 재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대뜸 잠옷 튜닉을 훌렁 벗으려 했다.
그에 엘리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튜닉을 도로 잡아 내렸다.
“뭐, 뭐 해?”
“입으려면 벗어야지.”
“그건 드레스룸에 가서 갈아입고 오라는 뜻이었지! 아무 데서나 그렇게 훌렁훌렁 벗으면 어떡해?”
“아무 데서가 아니잖아.”
리하르트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튜닉을 벗으며 덧붙였다.
“여긴 내 방이고, 넌 내 아내니까.”
새삼스러울 것 없이 당연하던 ‘아내’란 단어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아내’란 단어가 저를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으응, 그렇긴…… 하지.”
아내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잘못된 건 아니긴 하지. 이미 볼 장도다 본 사이에. 그렇긴 한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멍하니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엘리 사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때,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그의 허리에 선명한 자상 흉터가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꽤 깊이 팬 흉터였는데,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그 흉터로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놀란 리하르트는 흠칫했으나, 피하진 않았다.
“안 아팠어?”
“…잘 기억 안 나.”
실제로 중상을 입고 위험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반드시 살아서 엘리사의 곁으로 돌아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생각대로 무사히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으니 그에게 흉터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애틋하게 그의 흉터를 어루만지던 엘리사의 손이 갑자기 그의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그러다 근육으로 다져진 옆구리가 잘 안 꼬집히자, 손바닥으로 찰싹때렸다.
“앞으로는 몸 좀 사려.”
속상했다.
그의 몸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을 볼 때마다, 그 흉터들에 무심한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상처에 무뎌진 그의 모습이 마음아팠다.
이 크고 작은 상처들이 다 잊힐정도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너 이제 아빠야. 딸린 처자식이 있다고.”
“……”
“힘든 일 있으면 혼자 짊어지지 말고,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응?”
그럴게.”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걱정해 주는 것이 좋았지만, 대답과 동시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미안했다.
등의 통증을 알면 엘리사가 걱정할테니, 그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다.
“다 입었어.”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골라 준 옷을 입고 그녀의 앞에 섰다.
엘리사는 흡족해하며 그의 전신을 훑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뭔가 심심했다.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침대에 앉히고 그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부드럽다….’
결 고운 흑발이 손가락 사이에서 간질거리는 느낌도,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때마다 특유의 비누 향도 기분이 좋았다.
엘리사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그의 눈썹을 살짝 덮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짙은 눈썹과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곧은 콧대가 두드러지며 그의 남성성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비현실적인 얼굴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리하르트가 시선을 들어 엘리 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과 마주친 엘리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엘리사, 시간이 꽤 늦은 것 같은데…….”
그 속을 모르는 리하르트는 내일 엘리사가 피곤할까 걱정했으나, 그녀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엘리사는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같이 세 보이는 얼굴로, 얌전하게 제게 얼굴을 맡기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귀여운데 잘생겼어……. 잘생겼는데 귀여워….’
엘리사가 한참 말없이 있자,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머리, 내일 이렇게 할까?”
리하르트의 목소리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던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다시 그의 얼굴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의 앞머리를 도로 내렸다.
“아니, 별론 거 같아.”
내 심장에 아주, 아주 별론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