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수렵제 당일.
미카엘라는 자신의 남편인 다이온 후작과 함께 사냥터에 도착했다.
다이온 후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귀족들 틈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가 먼저 내렸다. 미카엘라의 남편인 다이온 후작이었다.
그다음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카엘라가 내렸다.
미카엘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의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한 채였다.
그녀를 본 귀족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간만에 뵈어요, 다이온 후작 각하.
그리고 후작 부인.”
“어머, 이 목걸이는 요즘 유행하는 목걸이 아닌가요?”
“드레스도 너무 아름답네요. 역시, 예나 지금이나 패션의 선두 주자다 우시다니까.”
황녀로 스무 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미카엘라는 그들의 관심과 추앙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저기,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 아닌가요?”
“어머, 맞네요. 오늘은 공작님도 오신다죠?”
“무사 귀환 축하 연회 때도 오지 않으셨으니, 공식 석상에 참석하신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공작 부인도 늘 영지에 틀어박혀 살더니, 남편이 돌아왔다고 의기양양해서 오나 보더라고요.”
미카엘라는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자신에게 몰린 관심을 빼앗아 가는 것이 언짢았지만, 그 관심이 좋은 방향은 아님을 알기에 수긍했다.
그리고 리하르트에 관해서는 저도 조금은 궁금했다.
어릴 적 잠깐이었지만, 황실에서 제 짝으로 지어 주려고 말이 오갔던 남자였으니까.
또한 미카엘라 역시 한때는 리하르트의 잘난 외모에 설렜던 뭇 소녀들 중 한 명이어서이기도 했다.
모두가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는 가운데, 마침내 마차가 사냥터 입구에 멈췄다.
마차 문이 열리고, 먼저 리하르트가 내려섰다.
길쭉길쭉하게 뻗은 장신과 넓은 어깨,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팔 근육,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뭇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리하르트는 제게 모여드는 시선들을 무심히 외면한 채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하늘색 드레스에 레이스 모자를 쓴 엘리사는 봄 소풍에 걸맞게 청량 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미카엘라는 물론, 귀족 영애들과 귀부인들은 그런 엘리사를 흘겨보았다.
한미한 자작가의 딸이었던 소녀가 분에 넘치게도, 제국 최고의 재력과 권력을 가진 공작가에 시집가 젊고 잘난 남편까지 차지했으니 못마땅할 밖에.
미카엘라가 그들의 대표로 엘리사의 앞에 나섰다.
“참으로 오랜만에 뵈어요,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 너무 오랜만이라, 하마터면 얼굴도 잊어 먹을 뻔했네요.”
“저는 루벨린 공작가의 문양도 까맣게 잊고 있었답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종종 얼굴 비춰 주세요. 두 분.”
엘리사는 제게로 향하는 질투 어린 시선과 말들을 빙긋 웃는 것으로 받아쳤다.
그녀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엘리사 양?”
“베, 벨테인 후작 부인?”
엘리사는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올리비아를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맞다, 이 사람 수도로 왔었지!’
그녀는 자신이 루벨린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면 루벨린 공작가에서 도망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귀족들의 구설수에 오를 터였다.
엘리사가 올리비아에게 다급히 말하려던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의 기사들과 황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였다.
엘리사는 모두가 황가의 행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올리비아에게 속삭였다.
“부인, 이따가 다 말씀드릴게요.”
올리비아는 잠시 놀란 눈으로 엘리 사를 바라보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황실의 일원들이 탄 마차가 당도했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마차에서 내리자, 귀족들은 일제히 그들에게 예를 갖추었다.
“거룩한 아렌시아의 광명을 뵙습니다.”
“가뜩이나 바쁠 시기에 모두들 이리 자리를 빛내 주다니 기쁘군.”
“실로 간만에 보는 오랜 벗의 얼굴도 보여서 반갑네요.”
황제의 말을 거드는 크리스티안의 시선이 엘리사와 리하르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크리스티안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사를 안은 팔을 좀 더 단단히 감쌌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마친 귀족들은 사냥 준비를 하기 위해 각자의 마차로 돌아갔다.
엘리사는 문득 귀족들을 쭉 훑어보았다. 하지만 찾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안셀은 아직 제도에 도착하지 않았나 보네.’
아르덴 상단의 배를 떠나기 전, 잠깐이나마 호위를 맡아 주었던 용병들에게 안셀에게 전할 편지를 주었다.
그러나 호의를 베풀어 주고 기다려준 친구의 수고를 가벼운 사과로 무마하기엔 부족했다.
‘나 때문에 소르네티에서 기다렸을 텐데, 돌아오면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하르트의 사냥 준비를 돕기 위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활이나 사냥용 매를 점검하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리하르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걱정 어린 눈을 한 그의 커다란 손이 엘리사의 이마를 짚었다. 늘 있는 미열만 느껴졌다.
“몸은 어때?”
“응? 괜찮아.”
“속이 안 좋거나, 현기증 나거나 그런 것도 없고?”
“응.”
엘리사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힘들면 억지로 저기 끼지 말고 그냥 마차에서 쉬어.”
“그럴게. 내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와. 어제 내가 했던 얘기 잊지 말고.”
정작 엘리사가 걱정되는 건 자신이 아니라 리하르트였다.
어릴 적, 리하르트가 황실 사냥터에서 습격을 받아 크게 다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제 그가 웬만한 남자 몇 명 정도는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도 걱정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걱정을 하고 있던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들한테 남편 자리를 빼앗길 뻔했던 사람이 공작님이셨군요?"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올리비아였다.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는 엘리사와 달리, 리하르트는 표정을 굳혔다.
“남편 자리를 빼앗기다니, 무슨 이 야깁니까?”
“리하르트, 그게……….”
엘리사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그때, 올리비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우리 아들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제가 부인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던 거니까.”
“얼마 전에 공작 부인께 은혜를 입었는데, 미혼인 줄 알고 우리 아들을 소개해 주려고 했었답니다. 단지 그뿐이에요.”
그제야 굳어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으나, 남들 앞에선 언제나 그랬듯 서늘한 표정이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리하르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나이로는 부모뻘인 귀족들도 두려워하는 리하르트를 친한 조카를 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녀이기에 가능했다.
“이제 사냥이 시작되려나 보네요.”
올리비아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황실 기사단의 기사가 호각을 불었다. 사냥이 곧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였다.
“잘 다녀와, 리하르트."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배웅했으나, 리하르트는 선뜻 가지 않고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돌아섰다.
"다녀올게.”
멀어지는 리하르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엘리사는 먼저 이번 일에 대해 운을 뗐다.
“부인, 제 신분을 속인 건 죄송해요. 그때는…… 몰래 집을 나온 거라,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엘리사양… 아니, 공작 부인이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잘못은 아내가 집 나가고 싶게 한 남편의 잘못이죠. 안 그래요?”
“각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냥,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올리비아의 장난기 어린 말에 엘리 사는 웃었지만, 곧바로 정정했다. 그러자 엘리사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눈빛이 은근해졌다. 귀여운 조카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어머, 그래도 남편이라고 편드는 거예요? 그렇게 사랑하면서 어쩌다 도망을 쳤을까.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도망친 거면 공작님이 정말 많이 잘못하셨나 본데.”
그 말을 들은 엘리사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랑해……? 내가? 리하르트를?'
그를 많이 좋아하긴 했다. 오랜 친구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소중한 친구거나 가족이라도 이상황에선 편들어 주는 게 당연하지.’
엘리사는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그렇게 결론 내리고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번 일은 정말 오해여서 그래요.”
"흐음, 잘 해결됐다면 다행이죠. 임신하면 얼마나 힘든데. 당연히 남편이 옆에서 발닦개 노릇 해야지.”
'발닦개'라는 말에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엘리사를 흔흔한 눈으로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멀리서 티 파티 준비 중인 황궁의 하녀들을 보고는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의 오해도 풀었으니, 이제 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