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52화 (52/164)

52화

말을 탄 황궁의 기사들이 암사슴을 몰았다. 암사슴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날아오는 화살에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도망갔다. 그 도주로가 몰이꾼들의 의도된 길인 줄도 모르고.

그 도주로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티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활시위를 당겼다. 곧이어 겁에 질린 암사슴이 풀숲을 헤치고 뛰어나왔다.

그 순간,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암사슴의 목을 관통했다. 암사슴은 비틀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박수치며 크리스티안을 추앙했다.

"역시 명궁이십니다!"

"과연, 전장을 용맹하게 누비시던 그 실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저 화살에 적군이 수없이 죽었다지요. 하하.”

이 자리에 크리스티안이 전장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리하르트뿐이었으나, 귀족들은 마치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 양 아무렇게나 떠들었다. 사실 크리스티안은 전장에서 화살하나 제대로 쏘지 못했다.

적군을 죽이긴커녕, 혼자 허둥거리다 리하르트에게 구해진 것만 해도 몇 차례.

그 외에 가당치 않은 전략을 세워 밀어붙이다가 열세에 몰린다거나, 제국군과 루벨린 기사들 사이를 이 간질하는 등 헛짓만 줄기차게 해 댔더랬다.

귀족들 역시 크리스티안이 전쟁터에서 한 달도 채 못 버티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 진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황태자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 수렵제는 순전히 그런 의도로 계획된 행사였다.

암사슴은 황실에서 직접 준비하고 푼 동물이었다. 수사슴은 뿔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귀족들의 활 역시 그저 장식에 불과했다. 전부 황제와 황태자의 사냥실력을 추앙하기 위한 들러리일 뿐.

수렵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차하나 없이 황제와 황태자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계산되고 만들어진 놀이였다.

그 놀이에 낄 마음이 없는 리하르트는 멀찍이 뒷줄에 서서 엘리사 걱정만 하고 있었다.

'아까 황태자비와 미카엘라 황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때, 사냥의 성취감에 취해 있던 크리스티안이 고개를 쭉 뺐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겨 저를 쳐다보고 있지도 않은 리하르트를 발견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우리 위대하신 전쟁 영웅께서는 멍청한 동물들을 상대하는 건 영 시시하신가 봐?”

비아냥의 의도가 명백한 크리스티안의 말에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싸늘한 크리스티안의 시선은 전쟁영웅인 리하르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크리스티안의 명백한 비아냥에도 리하르트는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전쟁터에서 오래 뒹굴어서인지, 약한 동물을 죽이는 데는 흥미가 일지 않는군요. 전하께서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핑계로 한 달도 채 못 버티고 도망치듯 제도로 돌아간 크리스티안을 비꼬는 말이었다.

크리스티안은 무심한 눈을 한 리하르트를 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건방진 자식이……….’

황태자인 자신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데도 굽히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한쪽은 장차 제국의 황위를 이을 황태자였고, 한쪽은 황실조차 두려워하고 견제할 만한 힘을 가진 루벨린 공작이었다. 귀족들은 둘 사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사색으로 얼어붙었다.

그 싸늘한 침묵을 깨트린 건 리하르트였다.

"저는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인사를 하고 그대로 돌아서 사냥 진열에서 이탈했다. 크리스티안이 그런 리하르트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귀족들이 끼어들며 다급히 분위기를 수습했다.

“저, 전하. 저쪽에 또 다른 암사슴이 있습니다.”

“오, 방금 잡은 놈보다 훨씬 커 보이는 녀석이군요. 저 녀석을 잡아 두 분 폐하를 놀라게 해 드리는 게 어떠십니까?”

크리스티안은 리하르트를 노려보다, 마지못해 귀족들과 함께 사슴을 쫓아 멀어졌다.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리하르트의 뒤로 또 다른 말발굽 소리 하나가 따라붙었다.

리하르트는 그 인기척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그러자 인기척의 주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못 본 새 장성하셨군요.”

레이모어 펠리스 후작.

협곡에서 가져온 악마의 영혼석을 루벨린에 뿌리도록 지시했을 확률이 높은 자였다.

리하르트는 그를 무시하고 앞서가지도, 그렇다고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았다. 철저히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레이모어는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이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나 봅니다.”

“…….”

“하지만 너무 고깝게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각하를 위한 일이니.”

그를 철저히 무시한 채 말을 몰던 리하르트가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싸늘한 시선이 레이모어에게 박혔다.

“내 사람들을 위험에 처넣어 놓고는, 그게 다 나를 위한 일이다…….”

“지금이야 믿기 힘드시겠지만 - “

“한 번만 더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이면 그 입을 찢어 주지.”

리하르트의 말과 동시에 그의 등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 명백한 살기와 섬뜩함에 레이모어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했다.

방금 한 말이 그에겐 ‘벌레 한 마리 죽이겠다’ 정도의 별거 아닌 말인 것처럼.

그래서 더 섬뜩했다.

리하르트는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그대를 위해 하는 말이오.

믿기 힘들겠지만.”

레이모어의 말을 비웃듯, 그가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리하르트는 유유히 돌아서 멀어졌다.

*

황제와 황태자를 따르는 귀족 남자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사냥터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남겨진 황후와 황태자비 로제는 나무 그늘 아래에 티파티 자리를 깔았다.

그런 두 사람의 주위로 귀부인들과 귀족 영애들이 둘러앉았다.

엘리사는 황후와 로제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앉았다. 그런 엘리사의 옆에 올리비아가 착석했다.

황궁의 하녀들은 모두의 잔에 일제히 차를 채웠다.

엘리사는 제 앞에 놓인 차를 보며 긴장했다.

‘이 차, 마실 수 있겠지…….…?’

수렵제에 오기 전, 주치의가 임산부가 마셔선 안 될 차를 알려 주었다.

다행히 앞에 놓인 차는 마셔도 되는 차였다. 하지만 문제는 몸에서 받아 주느냐 아니냐였다.

입덧 약을 미리 먹고 오긴 했지만,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임신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으나, 아직 안정기가 아니기에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모두들 바쁜 시간 내어 참석해 주니 기뻐요. 그대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차이니, 편히 들어요.”

황후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말하자, 귀부인들도 뒤따라 잔을 들었다.

엘리사 역시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향부터 맡았다.

‘꽃향기가 나서인지, 다행히 역하게 느껴지지 않네.’

엘리사는 안도하며 차를 조금씩 마셨다.

잠시 후, 한 모금씩 목을 축인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황후가 준비한 차를 찬양했다.

“어머나, 향이 너무 좋네요. 이 차는 무엇인가요, 폐하?”

“그러게요. 동동 떠다니는 꽃잎도 너무 예쁘고요.”

“마음도 편안해지는 기분이에요.”

“동쪽 해안 절벽에서만 자라는 테트라 꽃을 말려 만든 차랍니다.”

귀부인들은 자신들도 이 차를 구해 다 마셔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황후가 과장되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음, 애석하게도 아주 귀한 꽃으로 만든 차라 구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 아쉽네요.”

귀부인들은 아쉬워했고, 엘리사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너희들은 감히 구할 수 없는 것을 나는 마실 수 있다………. 그런 걸로 과시하고 싶은 건가.’

귀부인들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던 황후는 올리비아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벨테인 후작 부인. 그동안 좀처럼 제도에 올라오질 않기에 매우 아쉬웠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표정은 간만에 만난 시누이를 반가워하는 표정 보다는, 그녀의 등장을 고까워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딸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 도통 제도에 올라올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새 폐하의 안색이 더 좋아지신 것 같아 기쁘네요.”

“우리가 남도 아닌데, 올라오자마자 황궁에 한번 들르지 그랬어요?

신전부터 찾다니 많이 섭섭합니다.”

예로부터 황실과 신전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십여 년 전, 세리어트 후작 부인이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된 이후로는 공공연한 적대 관계가 되었다.

황후의 말은 황실보다 신전과 가깝게 지내는 올리비아의 행동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저 제 도움이 필요한 이를 먼저 찾았을 뿐이니, 너무 섭섭해 마세요.”

올리비아는 황후의 말 속에 숨은 뼈를 눈치채지 못한 듯, 빙긋 웃으며 답했다.

사교계에서 오래 활동한 노련한 황녀가 그 숨은 뜻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한 올리 비아의 대답에 황후는 전의를 잃은 듯 미간만 찡그릴 뿐, 더 이상 꼬투리 잡지 못했다.

엘리사는 그들의 대화에서 새삼 깨달았다.

‘맞아, 신전이 있었지.’

엘리사가 이번 수렵제에 참가한 이유는 제도에서도 루벨린이 건재함을 보여 주고, 보다 많은 아군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황실이 암암리에 신전과 척을 지고 있다 해도 신전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신전이 그만큼 제국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실의 눈을 피해 신을 믿는 귀족들도 꽤 많았다.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하늘 위의 신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전과 제국의 영웅인 루벨린의 영향력이 합쳐진다면 황실을 충분히 위협하고도 남았다.

‘조만간 신전을 찾아야겠어.’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바람에 찻잔이 흔들리며 찻물이 엘리사의 드레스에 흘렀다.

그것을 본 앤이 다가왔다.

“마님, 괜찮으세요?”

“차는 다 식었어. 괜찮아.”

앤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찻물이 든 엘리사의 드레스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앤에게로 모였다. 정확히는, 앤이 입고 있는 원피스로, 앤이 입고 있는 원피스는 제도에서 최근 유행하는 깔끔한 디자인의 원피스였는데, 누가 봐도 하녀의 옷치고는 값이 꽤 나갈 듯한 옷이었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다른 가문의 하녀들과는 확연히 달라 눈에 띄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피스 왼쪽 가슴 께에는 루벨린의 문양으로 세공한은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엘리사의 뒤쪽에 대기 중인 다른 하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잖아도 못마땅한 눈으로 엘리 사를 주시하고 있던 로제가 입을 열었다.

“일개 하녀들의 옷까지 사 주다니……. 역시 공작가는 듣던 대로 부유한가 보군요.”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로제의 말에 엘리사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던 반응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