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다 같이 나가서 각자 입고 싶은 옷을 사 오렴.’
‘예? 그, 그럴 수는…….’
‘루벨린의 이름에 걸맞은 걸로 사와야 해. 알겠니?’
엘리사는 더 필요한 것이 없냐는 리하르트의 물음에 자신의 드레스나 장신구를 사는 대신, 하녀들과 기사들에게 새 옷을 사 주기로 했다.
거기에 루벨린의 문양을 새긴 은브로치도 주문 제작했다.
‘어차피 수렵제의 주인공은 황제와 황후, 황태자와 황태자비니까.’
제아무리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해도 스포트라이트는 그들에게로 갈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는 자신 대신, 하녀들과 루벨린의 기사들을 돋보이게 하기로 했다.
그 덕에 새 옷을 산 하녀들과 기사들은 요 며칠 기분이 최고조였다.
‘이렇게 대우해 주는 곳에서 일한다!’
새 옷을 샀다는 기쁨은 물론, 자신들을 대우해 주는 루벨린에 대한 강한 소속감을 느꼈다.
엘리사와 루벨린의 하녀들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눈빛은 못마땅했으나, 그들의 뒤에 선 하녀들의 표정은 달랐다.
다른 귀족들의 하녀들은 앤과 하녀들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루벨린 공작가에서 대우를 잘해 준다는 소문이 나면, 일 잘하는 인재들이 몰려들겠지.’
그럼 현재 루벨린의 기사들과 하녀들은 현재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이고, 엘리사는 그 시선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돈 자랑은 이렇게 하는 거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도였다.
엘리사는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곧 여름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 가문을 위해 일해 준 이들에게 보답하고자 사 주었답니다. 적절한 보상은 의욕을 고양시키니까요.”
그리고 이제, 이 ‘돈 자랑’의 진짜 목적을 슬쩍 던질 차례였다.
“그리고 최근에 영지 남서부에서 발광석이 묻힌 또 다른 광산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아, 맞아. 얼마 전에 들었어요. 광산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는데.”
“혹시 발광석으로 다른 사업을 확장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발광석 광산 이야기에 솔깃해하며 귀를 기울이는 귀부인들이 몇몇 있었다.
반면 엘리사가 그저 돈 자랑을 한다고만 생각하고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는 귀부인들도 있었다.
엘리사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자신에게 득이 될 자와 득이 되지 않을 자를 걸러 냈다.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허울뿐인 안주인이야. 실질적인 경제권이 없는 사람들.’
냉정하게 봤을 때, 이들과의 친분은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주변의 가십 정도는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론 득이 될 것이 없는 관계가 되리라.
‘반대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실질적인 경제권을 쥔 가문의 안주인으로, 가문에서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사람들이지.’
이들과의 친분은 사업적으로든, 정치적으로는 도움이 될 터였다.
머릿속으로 득이 될 사람을 걸러낸 엘리사는 다음 떡밥을 던졌다.
“그러잖아도 이참에 협력할 가문을 구해 여러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해 볼까 고민하고 있어요. 발광석을 이용한 인테리어도 나오고 있다고 하고, 몇몇 세공소에서는 자그마한 발광석 알갱이로 장신구도 만든다고 하고요.”
“세공이요? 세공이라면 저희 가문에서….”
발광석은 오직 루벨린에서만 나는 귀한 보석으로, 모두가 탐내는 사업아이템이었다.
누가 루벨린과의 협업 자리를 채 갈세라 황급히 말을 꺼냈던 한 귀부인은 언짢은 기색을 비치는 황후와 로제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묘한 기류를 읽은 다른 귀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발광석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전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여기서 대놓고 협업 얘기를 꺼내긴 힘들 테니, 조만간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겠지.’
어쨌든 쓸 만한 사람은 대충 걸러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수렵제 참석에 보람이 있었다.
묘한 기류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깬건 로제였다.
“아, 참.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답니다.”
“준비한 것이요?”
“소소한 것이지만, 여러분이 기뻐했으면 좋겠네요.”
로제의 지시를 받은 하녀들은 바구니를 가져왔다. 그 바구니에서 나온건 브라우니와 쿠키였다.
“새로 온 수석 셰프가 브라우니를 굉장히 잘 만들더군요. 여러분과 함께 나눠 먹고 싶어서 특별히 부탁했답니다. 차와 함께 먹으면 좋을 거예요.”
“어머나, 상냥하셔라.”
세모꼴로 예쁘게 잘린 브라우니와 쿠키가 보기 좋게 접시에 담겨 모두의 앞에 놓였다.
귀부인들은 달콤한 간식을 기뻐하며 받았으나, 엘리사는 사색이 되었다.
‘버터 냄새…….’
배 속의 아이는 이전부터 버터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거부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나오는 욕지기를 참으려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 막았다.
황태자비가 준비한 간식 앞에서 구역질을 하면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하지만 한 번 올라온 구역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냥 이참에 임신한 거 확 밝혀버릴까.’
결국 욕지기를 참지 못한 엘리사가 자리를 뜨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며 몸이 비틀거렸다.
쓰러지기 직전, 뒤에서 나타난 넓고 단단한 몸이 그녀의 등과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리하르트………?’
그 잘난 얼굴이 설핏 일그러져 있었다.
“황태자비 전하의 마음은 감사하나, 엘리사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뭔가를 먹는 것이 힘들 것 같군요.”
리하르트는 힘없이 비틀거리는 엘리사를 안아 들었다.
평소 같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을 테지만, 지금의 엘리사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쳐다보는 귀부인들을 뒤로한 채 엘리 사를 소중히 감싸 안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문득, 크리스티안에게 주스를 붓고 저를 구해 주었던 열다섯의 소년을 본것 같았다.
*
인적이 드문 사냥터 주변에서 속을 게워 낸 엘리사는 지친 듯 주저앉았다.
그런 엘리사를 리하르트가 끌어안고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입가를 닦아 주려고 하자, 엘리사가 힘없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더럽잖아. 하지 마.”
계속되는 입덧과 호르몬의 영향인지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엘리사는 제가 말하고는 흠칫 놀라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다시 손수건을 가져다 댔다.
“안 더러워.”
그 말이 진심인 듯,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였다.
엘리사는 제 입술을 닦아 주는 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하게 굴 때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분이 좋다가도 싫어졌다. 이상했다.
엘리사의 입술을 닦아 준 리하르트는 주머니에서 과일 맛 사탕을 꺼냈다. 그리고 포장지를 벗겨 엘리사의 입에 넣어 주었다.
상큼한 맛이 나는 과일 맛 사탕을 먹으면 입덧이 한결 나아지곤 했다.
‘본인도 입덧을 하니까 챙긴 거구나.’
엘리사는 단것을 싫어하는 그가 사탕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리하르트는 혹여나 엘리사가 다시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질까, 그녀를 안은 채로 물었다.
“집에 갈까?”
엘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곧 해산할 텐데, 뭐.”
사탕을 한참 오물거리던 엘리사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사냥은 어쩌고 여기 있어?”
“어차피 내 사냥 실력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전장에서 수천, 수만 명을 물리친 자의 사냥 실력을 의심하지도 않을 테고, 엘리사는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빠져나온 리하르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선 고맙다고 하는 게 맞겠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냥 안 하고 어딜 가나 했더니, 덜떨어진 놈처럼 부인 치마폭에 싸여 있었군.”
리하르트가 사냥에서 이탈한 후, 흥이 식은 크리스티안은 막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그 곁엔 항상 붙어 다니는 비슷한 연배의 귀족 영식 둘도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엘리사를 바라볼 때와는 판이하게 변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보호하듯 단단히 감싸 안고 크리스티안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혼자서 크리스티안을 마주했을 땐 소 닭 보듯 무시하던 리하르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경계심이 드러났다.
제 품에 안긴 작은 여자 하나 때문에.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안은 흡족해 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리하르트의 반응을 보니 더욱 건드리고 싶어졌다.
크리스티안은 비아냥 섞인 어조로 리하르트를 조롱했다.
“우리 공작님은 어릴 때도 공처가더니, 지금도 그런가 봐?”
“…….”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첫날밤도 안 보냈다던데.”
“…….”
“아무리 그래도 남자 구실은 해야지. 그래야 부인을 만족시켜 드릴 거 아냐?”
“첫날밤도 안 보냈으면, 그 혼인은 언제든 무효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크리스티안의 조롱에 귀족 영식들이 천박하게 킬킬 웃으며 맞장구쳤다.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리하르트의 주위로 바람이 모여들던 그때였다.
엘리사가 먼저 과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 우리 아기가 들으면 섭섭해할 말씀을 하시네요.”
“…아기?”
크리스티안이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묻자,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손을 끌어다 제 아랫배를 감싸며 수줍은 듯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어 부끄럽지만, 뜨거운 첫날밤으로 축복이 찾아왔답니다. 축하해 주실 거죠?”
엘리사의 말 중 ‘첫날밤’에 묘한 악센트가 들어 있었다.
‘넌 허구한 날 이 여자 저 여자 같이 뒹굴어서 겨우 남주 하나 낳았지만, 내 남편은 한 번에 해내는 정력 왕이다. 이 자식아!’
엘리사는 우쭐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크리스티안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엘리사의 말뜻을 이해한 크리스티안과 영식들은 입을 떡 벌린채 리하르트와 엘리사의 배만 번갈아 볼 뿐이었다.
엘리사의 파격 선언에 놀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우쭐한 엘리사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 역시 거세게 흔들렸다.
“하아….”
리하르트는 제 손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