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저가 뭘 잘못한지도 모른 채 의기양양한 엘리사를 안고 돌아섰다.
크리스티안은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멀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얼굴을 구겼다.
엘리사는 그런 크리스티안을 슬쩍 돌아보고는, 만족스러운 코웃음을 쳤다.
“흥, 꼭 힘이 달리는 것들이 저런 걸로 으스댄다니까.”
“넌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결국 엘리사의 말에 귀 끝이 빨개진 리하르트가 소리쳤다.
그에 엘리사는 입술을 삐쭉이며 반박했다.
“저 자식이 내 앞에서 내 남편을 무시하잖아.”
“…….”
“그리고 뭐……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말하다 문득 그날 밤 리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린 엘리사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어릴 적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 자그마한 체구로 남들 앞에서 제 편을 들어 주며 맞서던 어린 날 그녀의 모습이.
맞아, 난 그런 네 모습에 반했었다.
내가 반한 수많은 네 모습들 중 하나.
빛바랜 기억들 중 반짝이는 소중한 기억.
‘너는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사랑스럽구나.’
가슴이 아릴 정도로,
리하르트는 변함없는 엘리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엘리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어.”
어라?
갑자기 변한 리하르트의 태도에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그를 따라 웃었다. 어찌 됐든 그가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 두 사람의 발밑으로 다정한 두 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수렵제 일정이 고되었던지, 엘리사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편히 잘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겉옷을 벗어 엘리 사에게 덮어 주기도 했다.
마차의 벽면과 엘리사의 등 사이에 낀 그의 단단한 팔이 완충재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엘리사는 마차가 자갈 위를 지나갈 때도 깨지 않았다.
고요한 마차 안에 잠든 엘리사의 고른 숨소리만이 울렸다.
리하르트는 제 품에 안긴 채 곤히 잠든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 품 안에 잠든 모습을 볼 때면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제 품에서 편하게 잠든다는 건, 그만큼 저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니까.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도, 작은 숨소리도, 제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리하르트는 잠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이마에 스치듯 입을 맞췄다.
그마저도 엘리사가 부러지기라도 할까, 잠에서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웠다.
엘리사가 잠든 시간은 그에겐 하루의 선물과도 같은 비밀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선물 같은 시간은 금세 끝이 났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리하르트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엘리사를 깨우려다 멈칫했다.
엘리사는 마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불현듯 이 ‘선물 같은 시간을 더 연장할 방법을 생각해내고는, 엘리사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잠든 엘리사를 안고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려 했다.
리하르트는 한껏 내리깐 목소리로 그들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사용인들은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잠든 엘리사를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안고 침실로 올라왔다.
엘리사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침대에 눕히고 일어나 크라바트를 푸는 데, 테이블에 놓인 편지가 보였다.
물러가려던 하녀가 그런 리하르트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아르덴 백작님으로부터 온 서신이에요.”
‘아르덴 백작’이라는 이름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엘리사의 옆에 누워 잠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려던 계획이 잊히는 이름이었다.
말을 마친 하녀는 리하르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침실을 나갔다.
리하르트는 테이블로 다가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의 수신인은 엘리사였다.
발신인의 이름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안셀 아르덴.]
엘리사가 자신과 이혼한 후 지낼 거처를 마련해 주고 떠날 채비까지 챙겨 준 남자.
리하르트의 눈에 그가 고깝게 보일리가 없었다.
‘안셀은 그냥 친구일 뿐이야.’
엘리사는 안셀을 그저 친구라고 말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엘리사의 생각일 뿐이다.
안셀도 엘리사를 친구로 보고 있는지, 아님 엘리사가 이혼한 후를 노리고 남모를 연심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제 엘리사와 자신의 사이에 ‘아이’라는 강한 연결고리가 생겼으나 리하르트는 여전히 불안했다.
안셀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엘리사라도 사랑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심기가 뒤틀렸다.
그녀가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는 오직 자신 하나여야만 했다.
리하르트는 하마터면 손에 힘이 들어가 편지를 구길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의 앞으로 온 편지에 자신이 손을 댄 것을 알면 엘리사가 제게 크게 실망할 테니.
하지만 궁금증은 참기 힘들었다.
‘무슨 내용일까.’
리하르트는 편지가 안셀인 양, 눈빛으로 편지를 태워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편지를 노려보았다.
크라바트를 푸는 그의 손길이 거칠었다.
‘그냥 읽고 태워 버릴까.’
궁금증과 엘리사의 신뢰도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하던 그때였다.
“으음, 리하르트………?”
잠에서 깬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찾았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궁금증을 합법적으로 해소할 방법을 찾았다.
그는 쥐고 있던 편지를 가지고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엘리사, 편지 왔어.”
엘리사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본 엘리사의 눈이동그랗게 떠졌다.
“안셀? 오늘 제도에 도착했나 보네.”
“편지, 뜯어 줄게.”
리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지칼을 가져와 편지 봉투 귀퉁이를 잘라 냈다.
엘리사는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리하르트는 관심 없는 척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시선은 엘리사가 쥔 편지지로 향해 있었다.
편지지에 단정한 글씨체로 짤막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엘리사.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내일 오후에 시간 괜찮을까?]
엘리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소르네티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제도로 돌아온 건 물론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긴히 할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건 어딘가 이상했다.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어투보다는, 말 그대로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한 어투였다.
‘무슨 일이지?’
어쨌든 그를 만나 직접 사과할 생각이었으니 만남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엘리사는 안셀에게 답장을 보낼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답장을 작성하는 엘리사의 등 뒤로, 그 편지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아가일은 여느 때처럼 리하르트의 집무실에서 그의 업무를 보좌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발견된 발광석 광산과 관련된 일인데, 할로스 백작가에서 세공 사업을 접목해 보고 싶다고 협업을 제의해 왔습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한 채 검지로 책상만 탁, 탁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딱 봐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모양새였다.
아가일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리하르트를 불렀다.
“각하, 제 얘기 들으셨습니까?”
“……할로스 백작가에서 발광석을 세공 사업에 접목해 보고 싶어 한다고.”
안 듣는 것 같아도 다 듣긴 했네.
아가일은 머쓱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일과는 별개로 리하르트의 표정을 보니 분명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할로스 백작가에는 뭐라고 답을 보낼까요?”
리하르트는 이번에는 아가일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검지로 계속해서 책상만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던 아가일이 리하르트를 재촉했다.
“각하?”
그 순간, 책상을 두드리던 리하르트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리하르트의 움직임에 흠칫 놀란 아가일이 뒷걸음질했으나, 리하르트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좀 더 생각해 보지.”
그 말만 남긴 채.
그대로 집무실을 나온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방으로 왔다. 엘리사와 안셀이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사.”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방 안에 단장을 거의 마친 엘리사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리하르트가 다가오자 분주히 움직이던 하녀들이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엘리사는 수렵제 전에 샀던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엘리사를 본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리하르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엘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방으로 오면서 생각했던 적당한 빌미도 잊은 채 대뜸 말했다.
“엘리사. 그 드레스 말고 다른 옷을 입는 게 어때?”
“응?”
엘리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한창 업무를 보고 있을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 대뜸 드레스를 입지 말라니.
엘리사는 그의 의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안 어울려?”
“응.”
“정말?”
“별로야. 그보다는 다른 옷이……….”
리하르트는 연분홍 드레스를 향한 엘리사의 마음을 단념시킬 생각으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데 엘리사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엘리사의 연둣빛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커다란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서러운데, 옷까지 마음대로 입지 말라고 하니 설움이 폭발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리하르트를 쏘아보았다.
“엘리사……?”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눈물에 당황한 리하르트가 그녀를 불렀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왜 말을 그렇게 해? 그냥 잘 어울린다, 예쁘다 해 주면 안 돼?”
“엘리사, 잠깐 내 말 좀~”
“어차피 배 나오면 못 입는 옷이잖아! 난 지금 입고 싶다고!”
“그게 아니라, 사실은…….”
그 드레스를 입은 네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놈한테 보여 주기 싫었어.
그래서 그랬어.
리하르트는 뒤늦게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려 했으나, 이미 울고 있는 엘리사의 귀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됐어. 듣기 싫어. 나가.”
결국,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침실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