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방에서 쫓겨난 리하르트는 방문 앞에 서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래도 엘리사가 문을 열어 주지 않자, 리하르트는 이야기 잘하고 오라며 배웅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제야 감정을 추스른 엘리사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기껏 했던 화장이 눈물에 지워진걸 보니 또 울컥 속이 상했다. 울일이 아닌데도 눈물부터 나는 걸 보니, 임신 호르몬의 영향인 듯했다.
공작 부부의 대화에 잠시 물러나 있던 앤과 다른 하녀들이 눈치를 보다가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엘리사의 머리를 빗어 주며 거울 너머로 엘리사의 안색을 살피던 앤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려 종알거렸다.
“저는 각하가 이해가 안 돼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왜 안 어울린다고 하시지?”
“그러니까요! 아니, 그리고 설령 안 어울려도 어울린다고 하셔야지.”
“각하께선 요즘 유행하는 패션을 잘 모르시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각하의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마님.”
앤이 운을 떼자, 옆에 있던 다른 하녀들도 맞장구치며 리하르트를 타박했다.
엘리사는 제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쓰는 하녀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별것도 아닌 일로 리하르트에게 울고불고 화를 낸 것이 머쓱해졌다.
‘그냥 자기가 보기엔 솔직하게 안어울린다고 한 건데 내가 너무 애처럼 굴었나…’
고작 이런 이유로 하녀들에게 욕먹게 만든 것이 어쩐지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 조절이 안 되는데 어떡해.’
엘리사는 미안함에 가슴이 콕콕 찔리는 것을 외면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래, 내 배 속에 아이를 만든 건 리하르트잖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빠가 되었으니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다.
애초에 임신한 아내를 섭섭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이제 다 됐어요, 마님.”
앤과 하녀들은 단장을 마무리하고 엘리사를 일으켰다.
엘리사는 하녀들과 함께 방을 나왔다. 예상대로 리하르트는 방문 앞에 없었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을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뿐, 이내 시선을 거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
아르덴 백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루벨린 공작저의 철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공작저 앞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고, 안셀이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집사 그레이슨은 안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각하. 못 본 새장성하셨군요.”
리하르트가 전쟁에 출정한 이후, 엘리사가 공작저에 머무는 동안 안셀이 몇 번 찾아온 적 있었기에 그레이슨과는 안면이 있었다.
안셀은 그의 인사에 웃으며 답했다.
“오랜만이네, 그레이슨, 꽤 긴 세월이 흘렀는데 그대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사업가가 되시더니, 마음에도 없는 소릴 다 하시게 됐군요.”
그레이슨은 대답은 그리했으나, 안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그레이슨은 저택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안셀을 안내했다. 뒷문을 나가면 엘리사와 만나기로 한 뒤뜰이 있었다.
안셀과 그의 보좌관은 그레이슨을 따라 뒤뜰로 나왔다.
공작저의 뒤뜰은 언제나 그랬듯 잘관리된 오색의 꽃들로 가득했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가 안셀의 기분을 한껏 풀어 주었다.
아름다운 전경과 꽃향기에 취해 온 실로 향하던 그때, 문득 뒤쪽에서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안셀은 그에 의아해하며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루벨린 공작.’
그곳에 리하르트가 있었다.
리하르트는 저택 중앙 발코니에 서서 싸한 눈으로 안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 아래로 보이는 핏빛의 붉은 눈은 대낮에 봐도 섬뜩했다.
거기에 싸한 기운까지 풀풀 풍기고 있으니 그 기세가 더했다.
안셀이 리하르트를 마지막으로 본건 8년 전, 아르덴 백작저에서 열렸던 연회에서였다.
그러니 성인이 된 이후 리하르트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안셀은 리하르트를 향해 살짝 묵례를 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의 인사를 받아 줄 마음이 없는 듯,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어릴 때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 다만, 전쟁터에서 돌아오더니 더 싸늘해졌군.’
머쓱해진 안셀은 조용히 그레이슨의 뒤를 따랐다.
‘엘리사는 저런 남자랑 어떻게 사는 거지? 설마, 이혼하려다 붙잡혀서 마지못해 공작저로 돌아온 건 아니겠지?’
엘리사의 결혼 생활을 걱정하다 보니 어느새 온실 앞에 도착했다.
그레이슨은 온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고 물러났다.
안셀은 자신의 보좌관과 함께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성한 꽃나무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중앙에 놓여 있는 티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낯선 듯 익숙한 얼굴도.
엘리사가 가끔 제도에 내려올 때마다 얼굴을 보긴 했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병환으로 앓아누우며 엘리사가 본격적인 영주 노릇을 하기 시작한 3년 전부터는 만나지 못했다.
그사이 엘리사는 앳된 티를 벗고 성숙해져 있었다.
이젠 ‘소공작 부인’이 아니라 정말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이 어울릴만큼.
그런 엘리사를 마주한 안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를 마주한 엘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녕, 안셀.”
“오랜만이야, 엘리사.”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윽고 차를 가져온 앤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엘리사는 능숙하게 차를 우려내어 안셀의 앞에 놓아주었다.
“제도에 어제 도착한 거야?”
“응. 네 편지를 받고 바로 출발했거든.”
그는 그저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 뿐이었지만, 그의 호의를 물거품으로 만든 당사자인 엘리사는 마음이 불편했다.
“날 위해서 그렇게 신경 써 줬는 데, 겨우 편지 한 쪼가리 보내고 사라져서 정말 미안해, 안셀.”
“그거야 네가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이니까, 받고 안 받고는 네 마음이지. 난 괜찮으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엘리사는 8년 전 크리스티안에게서 그를 구해 준 이후에도 종종 안셀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이따금 제도에서 그를 만날 때면, 상단 경영에 대해 공부하는 안셀을 도와주고 조언해 주곤 했었다.
안셀은 그에 대한 보답이라며 엘리 사의 미안함을 덜어 주었다.
그 말에 엘리사의 표정이 한결 더 편해졌다.
안셀은 마시기 좋게 식은 찻잔을 들며 덧붙였다.
“그래도 별장은 정리해 둘 테니, 마음 바뀌면 언제든 얘기해.”
“고마워. 갈 곳이 있다니 든든하네.”
엘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목을 축이던 안셀은 조금 전, 뒤뜰에서 보았던 리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리곤 엘리사에게 물었다.
“그럼 넌 행복한 거지? 이 결혼.”
그렇게 묻는 안셀의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전보다 묵직하게 느껴졌다.
난데없는 질문에 엘리사는 잠시 고민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행복이란 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어.”
“………”
“이 공작가에서의 생활이 불행하게 느껴지진 않는다는 거야.”
원작에선 하네스의 존재를 끔찍해 하던 리하르트가 지금은 아빠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처럼, 원작의 운명만 피해 갈 수 있다면.
“리하르트랑도…… 불같은 연인은 아니어도, 오랜 친구처럼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잠자코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던 안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좋은 사람인가 보네.”
“응. 표정이 무표정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순둥이야.”
엘리사의 말에 안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순……… 뭐라고? 대체 어딜 봐서?’
눈빛으로 사람을 압살할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남자의 어디가 순둥하다는 걸까.
안셀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사자의 아내가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받아넘겼다.
무엇보다, 안셀이 엘리사를 찾아온 진짜 목적은 리하르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안셀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 씁쓰레한 차 맛을 중화시킬 다과를 찾았다. 하지만 테이블엔 다과가 없었다.
‘엘리사가 쿠키를 빼먹었을 리가 없는데.’
안셀은 의아해하다, 문득 엘리사를 위해 준비해 온 선물을 아직 주지 않았음을 기억해 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인 자신의 보좌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보좌관은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안고 있던 작은 상자를 엘리사의 앞에 내려놓았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선물. 예전에 네가 초코 쿠키를 좋아하던 게 기억나서.”
“아…..”
곧장 그 자리에서 까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안셀의 예상과 달리, 엘리 사는 난처한 기색을 비쳤다.
“미안, 이번엔 마음만 받을게.”
“왜?”
“음, 안정기에 접어들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엘리사가 말했다.
“사실 나, 아기 가졌어.”
엘리사의 임신 소식에 안셀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엘리사가 갑자기 이 혼하겠다는 마음을 바꾼 것이 이해가 되는 이야기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재빨리 갈무리한 안셀은 애써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축하해, 엘리사.”
“고마워. 그런데 긴히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아, 그거…”
말끝을 흐리던 안셀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별거 아냐. 잘 해결됐어. 오늘은 그냥 네 얼굴 보러 온 거야.”
가뜩이나 안정을 취해야 할 시기의 엘리사에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자신이 소르네티의 별장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