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온실은 각종 꽃나무들로 가려져 있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나무를 다 뽑아 버릴 것을….’
리하르트는 차마 온실에 직접 찾아 가지는 못한 채 온실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흘렀을 때.
마침내 온실의 문이 열리고 안셀과 엘리사가 나왔다.
엘리사는 공작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르덴 백작가의 마차 앞까지 안셀을 배웅했다.
안셀은 작별의 의미로 엘리사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안셀이 마차에 올랐다.
엘리사는 아르덴 백작가의 마차가 공작저를 나서는 것을 지켜보고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불시에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리하르트는 흠칫 놀랐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엘리사가 먼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고는 쌩하니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엘리사의 모습에 리하르트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곤두박질쳤다.
‘화가 많이 났나………?’
어떻게 해야 풀어 줄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날 밤, 씻고 침실로 돌아온 엘리 사는 텅 빈 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하르트?”
평소엔 자신이 씻고 오면 항상 그가 먼저 침실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오늘 그에게 화를 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엔 감정이 격해져 그가 미웠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별것도 아닌 일로 그에게 울며 화낸 것이 좀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대하기가 머쓱했다.
그래서 안셀을 배웅하고 돌아서서 눈이 마주쳤을 때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를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그래도 씻고 돌아와서는 제대로 화해하려고 했건만.
‘집무실에 있으려나?’
그를 찾으러 가 볼까, 찾아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볼까 생각하던 그때. 방문이 열렸다.
“리하르트?”
그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 엘리사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검은 숲의 꼬마 마녀 이야기』
그의 손에 들린 건 동화책이었다.
“아기한테 읽어 주고 싶어서.”
머뭇거리며 말하는 리하르트를 멀뚱히 쳐다보던 엘리사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는 자신과 화해할 빌미로 동화책을 가져온 것이다.
엘리사는 짐짓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읽어 줘.”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았다.
리하르트는 오른팔에 엘리사를 안은 자세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엘리사의 배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엘리사는 이제 제법 볼록 나온 아랫배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아가야, 오늘은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 준대. 제목은 『검은 숲의 꼬마 마녀 이야기』란다. 재밌겠지?”
엘리사의 말이 끝나자, 리하르트는 목을 가다듬은 후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포포리 숲 북쪽에는 아무도 가지 않는 검은 숲이 있어요.”
엘리사는 웃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첫 문장부터 난관이 찾아왔다.
포포리라니. 숲 이름부터 너무 귀엽지 않나.
“그 숲에는 꼬마 마녀 루루가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포포리 숲 동물친구들은 모두 루루를 무서워했어요. 루루는 머리가 엄청 길어서 얼굴을 다 가리고 다녔거든요.”
책을 읽는 그의 중저음 목소리는 감미로웠지만, 어투는 어색하다 못해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역사서를 읽어도 그거보단 재미있게 읽겠다!’
장난기가 발동한 엘리사는 은근슬쩍 리하르트를 채근했다.
“너무 딱딱하게 읽는 거 아니야?
아기한테는 감정이 풍부하게 이야기 해야 전달이 잘되고 좋다고 하던데…….”
“…….”
“대사는 목소리를 바꿔 가면서 읽어 줘.”
잠시 멈칫했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요구에 못 이겨 어설픈 구연동화를 펼쳤다.
“……어느 날, 동물 친구들은 숨바꼭질을 하기로 했어요. 아기 토끼토토는 아무도 못 찾는 곳에 숨으려고 검은 숲으로 들어갔어요. ‘여기에 숨으면 아무도 못 찾겠지?”
엘리사는 나름대로 열심히 귀여운 토끼 목소리를 흉내 내는 리하르트를 보며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깨물었다.
여전히 어색하긴 하지만, 잘생긴 미간까지 살짝 찡그려 가며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읽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하지만 친구들을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던 토토는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어요. ‘아야!’ 토토의 무릎에서 피가 줄줄 났어요. 토토는 무섭고 아파서… 엉엉 울었어요.”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엉엉’을 말하기 전 잠시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 채고 결국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리하르트는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 루루가 나타났어요.
토토는 귀신인 줄 알고 소리를 질렀어요. ‘으악, 귀신이다!’ 하지만 루루가 토토의 다친 무릎에 약초를 발라주는 게 아니겠어요? 토토는 그제…….”
숨죽여 웃던 엘리사는 다시 동화책에 집중했다. 그런데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갔다.
발광석의 은은한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붉은색 눈동자, 그 눈동자 위로 길게 드리운 속눈썹, 옆에서 보면 더욱 두드러지는 날렵한 콧대, 그리고 그 아래로……….
시원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
저 입술과 맞닿았을 때의 말랑하고 부드럽던 감촉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엘리사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입술로 손을 뻗었다.
“?”
동화책을 열심히 읽던 리하르트는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행동에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엘리사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쳤나 봐!’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던 그때, 불현듯 이 상황을 수습할 묘책이 생각났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어서…….”
엘리사는 존재하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떼는 척 그의 입술을 만졌다.
찰나였지만,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손끝으로 선연히 느껴졌다. 그 감촉이 아찔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그와 동시에 제 등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단단한 팔도, 자신이 기대고 있는 그의 다부진 몸도, 그리고 맞닿은 온기도 몹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쿵. 쿵.
고요한 적막 속에 제 심장 소리만이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엘리사는 멍하니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어쩐지, 마주한 그의 눈빛도 묘하게 짙어진 듯했다.
그리고 엘리사를 안은 그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간 그 순간, 엘리사가 황급히 몸을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도, 동화책은 내일 이어서 읽는 게 좋겠어.”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쥐고 있던 동화책을 덮어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그가 무어라 할 틈도 없이 침대에 누웠다.
“내일 신전에 가기로 했으니까 일찍 잘래.”
그를 등지고 누운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엘리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쿵, 쿵.
아직도 뛰는 심장 소리를 그가 들을까 겁이 났으니까.
애써 눈을 감고 있는 엘리사의 위로 이불을 세심히 여며 주는 리하르트의 손길이 느껴졌다.
“잘 자.”
이윽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온기가 엘리사를 안았다.
‘불편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엘리사는 끝내 그 괴리감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엘리사는 신전을 찾았다.
‘여기가 신전이구나.’
신전은 제도 외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흙색으로 지은 집들이 많은 빈민촌에서 유일하게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데다, 그 규모가 여느 백작성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줄곧 루벨린에서 살았고, 이따금 제도에 내려와도 볼일이 끝나면 곧장 루벨린으로 돌아갔던 터라 신전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전 곳곳을 구경하며 안쪽으로 들어서던 엘리사는 정면에 있는 샘을 발견했다.
‘이게 정화의 샘인가?’
교황 에이든은 이십여 년 전, 협곡에서 돌아온 이후 자신의 신성력을 쏟아부어 이 샘을 만들었다.
이 샘은 신전 밖 외곽 지역에 총네 개가 더 있었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몬스터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교황 성하는 대단한 사람이구나.
당시, 가족을 잃고 힘들었을 시기임에도 약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다니.’
엘리사가 정화의 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그때, 주변을 지나가던 신관이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신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혹시 서쪽 예배당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신관은 흔쾌히 길 안내에 나섰다.
엘리사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엘리사가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올리비아였다.
며칠 전, 수렵제 때 올리비아가 신전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는 올리비아와 함께 신전을 찾기로 약속을 했었다.
엘리사가 신전을 찾은 목적은 분명했다.
금전이 필요한 신전에 루벨린의 이름으로 기부하고 명성을 쌓는 것.
나아가 신전의 명성에 기대어 제도 내에서의 루벨린의 영향력을 키우는것.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느새 서쪽 예배당 앞에 도착한 신관이 예배당 입구를 가리켰다.
엘리사는 그에게 꾸벅 감사의 인사를 하고 예배당 쪽으로 향했다.
그때, 예배당 바깥쪽 복도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곳을 돌아본 엘리사는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올리비아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금발의 미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은….’
엘리사는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했다.
교황 에이든 세리어트.
오늘 엘리사가 신전에 찾아온 목적이었다.
엘리사가 올리비아를 부르려던 그 순간,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에이든이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에이든의 벽안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