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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57화 (57/164)

57화

‘이 사람이 교황…….’

엘리사는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올리비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 에이든의 나이가 생각보다 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교황이라는 것이 더욱 안 믿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자마자 그가 교황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눈부신 금발, 푸른 하늘을 담은 듯한 벽안, 수려한 외양과 벽안.

그리고 주위를 압도하는 부드러운 위압감은 마치 천사의 현신처럼 보였으니까.

“아, 왔군요. 공작 부인.”

올리비아는 반색을 띠며 엘리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에이든에게 엘리사를 소개했다.

“공작 부인, 교황 성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성하. 엘리사 루벨린이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올리비아는 에이든에게도 엘리사를 소개했다.

“성하, 이쪽은 루벨린 공작 부인이세요.”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는 후작부인께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셨다 이야기하시기에 어떤 분인가 했더니, 귀인을 모셔 오셨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저야말로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환대하는 에이든의 반응에 엘리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벨테인 후작 부인은 교황 성하가 어려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올리비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제게 호의적인 에이든을 보니 생각보다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리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모처럼 찾아오신 귀인들께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이든은 엘리사와 올리비아를 신전 안 응접실로 안내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차를 내어 왔다.

아이는 각자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에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수고를 치하했다.

“고맙구나, 노아.”

에이든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방을 나갔다.

아이가 나간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사가 물었다.

“저 아이는 신전에서 거둔 아이인가요?”

“네. 신의 심부름꾼이지요.”

“신의 심부름꾼이요?”

“신께서 거두신 아이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신전에서 각자 제 몫을 착실히 해내고 있는 기특한 아이들이고요.”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다섯 살이 넘으면 편지 심부름부터 시작하고, 조금 더 자라서는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기도 합니다.

물론 그건 모험을 좋아하는 아이들에 한해서요.”

“아하…….”

엘리사는 에이든의 신전 운영에 내 심 감탄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마냥 놀게 두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신전은 아이들에게 각각의 일을 줌으로써 일손을 덜고, 아이들은 각자 맡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자긍심을 갖는다.

각자 맡은 일을 착실히 해낸 아이는 자립심 강하고 스스로 생존할 능력을 갖추며 자라나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된다.

아기 새의 입에 먹이만 물려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구하고 살아갈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

그것이 신전에서 행하는 ‘사랑’이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시네요. 아이가 한둘도 아닌데 그렇게 신경 써주시다니.”

“과찬이십니다. 드넓은 공작령을 돌보시는 부인의 업무에 비하면 약소하지요.”

“제 눈엔 두 분 다 대단하신 분들이니 서로 겸양 떠실 것 없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올리 비아가 말했다. 그에 에이든은 미소로 응수했다. 엘리사와 올리비아의 칭찬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신전과 아이들을 저리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지.’

엘리사는 그런 그의 반응에 흡족해 하며 적당히 식은 찻잔을 들었다.

향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맛도 좋았다.

차로 목을 축이고 본론을 꺼내려는 데, 에이든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공작 부인께서 저를 뵙고자 하셨다지요. 무슨 연유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다름이 아니고, 신전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고 싶습니다.”

“송구하오나, 그 기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에이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엘리사의 제의를 거절했다. 마치 엘리사가 그런 제의를 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올리비아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삼키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가 당연히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던 엘리사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유를 여쭈어봐도 될까요?”

“저는 부인이 바라시는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

엘리사가 바라는 것.

그는 엘리사가 기부하려는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에이든은 조금 전과 똑같은 부드러운 눈빛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과 목소리에서 부드러운 의지가 느껴졌다.

그 단호함에 엘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권력을 중시 여기는 알버트가 왜 신전에 기부하지 않았는지를.

기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가 가진 힘은 감히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제것이 아니니까요. 저와 여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이 가진 것이죠.”

“…….”

“그들을 이용하려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부드러웠으나,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철저히 중립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킨 것이다.

그의 생각을 알아챈 엘리사는 전략을 바꾸었다.

“성하의 말씀이 맞아요. 제가 기부하려고 한 이유에 순수한 마음만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

“하지만 꼭 그런 이유로만 기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돕고 싶은 진심과 그로 인해 제가 취하게 될 이득이 겹치게 된 것뿐이죠.”

“…….”

“제가 알기로, 이번 전쟁으로 신전에 들어온 고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 아이들에겐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 말에 에이든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엘리사의 말대로 신전의 재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황실에서는 이십여 년 전의 사건으로 기부를 끊었고, 다른 귀족들 역시 황실의 눈치를 보며 기부를 삼갔다.

그러한 탓에 지금의 신전은 신실한 몇몇 귀족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올리비아에게서 간간이 받은 기부금으로만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급격히 늘어난 아이들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엘리사는 말을 이었다.

“루벨린의 기부를 받으면 황실도 주위의 눈을 의식해서 기부를 할 겁니다. 그럼 귀족들의 기부도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질 테고요.”

이십여 년 전, 난데없이 에이든의 부인인 율리아가 역모를 꾸몄다고 소문이 돈 적이 있다. 그런데 결국 그 사건은 그녀의 독단적인 역심이었던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제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협곡에 가 있었던 에이든은 역모죄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로와 그간 쌓은 덕망으로 지금도 여전히 제국민들에게 추앙받았다.

그 때문에 황실은 암암리에 신전을 홀대하긴 해도, 대놓고 척지진 못했다.

그러니 루벨린이 신전에 기부하면, 황실도 신전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루벨린이 순탄하게 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꼴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러한 이해관계를 알고 있는 엘리 사는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저를, 루벨린의 이름을 이용하세요.”

이번에야말로 에이든이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하며.

하지만 에이든은 무심한 눈으로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하,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에이든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두 분, 편히 담소를 나누다가시길.”

그는 끝내 엘리사의 제의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에이든의 자리에 놓인 찻잔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엘리사를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머쓱한 표정으로 엘리사의 어깨를 다독였다.

“원래 성격이 저래요. 딱딱하고, 고집도 세고, 친구랑 연애할 때부터 저래서 속 좀 썩였거든.”

엘리사의 기분을 북돋아 주려 일부러 에이든을 흉보는 올리비아의 말에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전 괜찮아요. 성하의 말씀대로 제의도가 불손한 건 사실인걸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기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리고 공작 부인의 말도 일리가 있고요. 내가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아니에요. 부인께선 이미 충분히 애써 주셨는걸요. 이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저한테도 계획이 있고요.”

엘리사는 주눅 든 기색 없이 씩웃으며 올리비아를 말렸다.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신전 입구 쪽으로 나왔다.

그런데 신전 입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단연 돋보이는 잘난 얼굴, 뭇 남자들보다 반 뼘 이상은 키가 큰 남자.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리하르트였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엘리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그때, 올리비아가 엘리사의 팔을 살짝 잡았다.

“난 저쪽에 마차가 있어서 가 볼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올리비아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채 윙크를 했다.

그 윙크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

“오늘 귀족 회의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일찍 끝났어.”

“아하. 오늘 회의에선 무슨 이야기 했어?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어?”

“딱히 없었던 것 같아.”

사실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톰슨과 루벨린의 정예 기사들을 호위로 붙여 주고도 불안해서 좀처럼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 탓인지 크게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순없었기에 말을 얼버무렸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먼저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뒤따라 마차에 타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그의 몸이 멈칫했다. 동시에 눈빛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그것을 눈치챈 엘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리하르트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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