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음 날, 엘리사는 올리비아 없이 혼자서 신전에 왔다.
동행한 기사들이 있었지만, 무기를 소지한 자는 신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신전 앞에서 기다리게 했다.
오직 앤만이 함께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사는 오늘은 신전을 배회하며 두리번거리지 않고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서쪽 예배당에서 중앙 예배당으로 가는 길목.
이곳은 잠시 후, 에이든이 중앙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기 위해 예배 일정을 다 훑고 왔지.’
에이든은 돕고 싶다는 자신의 진심을 의심했다.
엘리사는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진심으로 보일 때까지 노력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 있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까 고민하던 그때, 근처에 놓인 화분이 보였다.
화분은 물을 제때 주지 않은 것인지, 시들어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가엾어라….”
엘리사는 드레스를 걷고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저 홀로 피었다 시들어 가는 이름모를 작은 꽃이 가여웠다.
‘지금이라도 물을 주면 살아나지 않을까?’
시든 꽃을 손으로 일으키던 엘리사는 옆에 있던 앤을 불렀다.
앤, 아까 입구 쪽에 있던 샘에서 물을 조금만 떠다 줄래?”
“네, 마님.”
앤은 곧장 그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엘리사가 다시 화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
조금 전까지 메말라 있던 화분의 흙이 금방 물을 흡수한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처음부터 수분을 머금은 흙이었는 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엘리사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에이든이 보였다.
엘리사는 벌떡 일어나 웃는 낯으로 에이든에게 알은체했다.
“안녕하세요, 성하.”
“좋은 오후입니다, 부인.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제 일을 생각하면 달가워하지 않을 법도 하건만, 에이든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사를 대했다.
그에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오늘은 기도를 드리러 왔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엘리사는 에이든이 ‘무슨 기도를 드리러 오셨냐’ 같은 질문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엘리사의 기대를 처참히 저버렸다.
“신께서 부인의 기도를 들어 주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전 예배를 드리러, 이만.
에이든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단호하게 대화를 잘라 내곤 엘리사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엘리사는 그를 붙잡지 못한 채 얼빠진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저 다정한 얼굴로 저렇게 쌀쌀맞게 굴 수도 있네.’
엘리사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입술을 삐쭉거렸으나, 기죽지 않았다.
‘하지만 성하, 저는 포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랍니다.’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면 열한 번 찍으면 되지, 뭐.
엘리사는 에이든이 들어간 중앙 예배당 쪽을 보며 턱을 치켜들고 흥, 콧방귀를 꼈다. 그러고는 앤을 보낸 중앙 샘 쪽으로 향했다.
화분의 물기를 머금은 꽃이 그런 엘리사에게 인사하듯,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
며칠 후, 루벨린 공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 두 대가 신전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엘리사와 앤, 그리고 엘리사가 데려온 공작가의 하녀 셋이 더 내렸다.
앤을 포함한 하녀들은 각자 두 팔에 종이봉투를 가득 안고 엘리사의 뒤를 따라 신전 입구로 들어섰다.
엘리사는 오늘은 동쪽 예배당으로 향했다.
동쪽 예배당은 낮에는 신전에서 기거하는 아이들이 기도를 드리고, 밤에는 신관들이 기도를 드리는 곳이었다.
엘리사가 막 동쪽 예배당에 도착했을 때, 막 기도를 마친 아이들이 삼삼오오 예배당을 나오고 있었다.
엘리사는 아이들 앞에 다가가 섰다.
갑작스러운 외부인의 등장에 의아한 아이들의 시선이 엘리사에게로 향했다.
“얘들아, 여기 와서 이거 하나씩 받아 갈래?”
엘리사는 하녀들이 안고 있는 종이 봉투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원래는 외부인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신관에게 미리 허락을 구한 것이었다.
경계심 어린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던 아이들은 초콜릿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엘리사는 씩웃으며 초콜릿을 건넸다.
“너희들한테 나눠 주고 싶어서 가져온 거야.”
“왜 우리한테 나눠 줘요?”
“음, 그게……. 원래 나는 초콜릿을 엄청 좋아하는데, 지금은 배 속의 아가가 초콜릿을 싫어해서 못 먹고 있거든. 그래서 너희가 대신 먹어주면 기쁠 것 같아.”
엘리사는 아직 크게 티가 나지 않는 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행히 배 속 아기의 존재와 달콤한 간식은 어린아이들의 경계를 허물었다.
하지만 제법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은 좀처럼 엘리사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오히려 간식을 받으려 엘리사에게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을 저지했다.
‘이 아이들, 교육을 잘 받았네. 어디 가서 사기당하고 살진 않겠어.’
엘리사가 아이들의 경계심에 안도하면서도 난감해하고 있던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벨린 공작 부인?”
그쪽을 돌아보자, 늘 에이든의 곁에 동행하던 고위 신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엔 에이든도 있었다.
신관은 엘리사에게 성큼 다가왔다.
“아유, 홑몸도 아니라 힘드실 텐데 번번이 귀한 걸음을 해 주시다니.
게다가 오늘은 아이들에게 큰 호의도 베풀어 주시는군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걸요.”
“그 마음이야말로 대단한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부인.”
신관은 엘리사에게 연신 감사를 표하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루벨린의 하녀들은 줄을 선 아이들에게 차례차례 간식이 든 봉투를 나눠 주었다.
간식을 받은 아이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좋아했다.
아이들의 모습을 흔흔한 눈으로 바라보던 엘리사는 문득 에이든의 존재를 깨닫고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든이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엘리사가 불쑥 물었다.
“성하께서는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간식을 안 좋아하시나요?”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드시긴 드신다는 거네요?”
에이든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엘리사가 준비한 간식 봉투를 내밀었다.
“초콜릿은 받아 주실 거죠?”
씩 웃으며 묻는 엘리사의 물음에, 에이든은 아니라고 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 들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봉투를 전하고 곧장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엘리사가 준 간식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며칠 전신전을 찾았던 올리비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신전을 지켜 낼 수 없습니다…….
정말 신전을 위하신다면 어떤 결단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리고 엘리사의 말도.
저를, 루벨린의 이름을 이용하세요.’
아이들에게 간식 봉투를 나눠 주는 엘리사의 모습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녀의 주위로 모여든 아이들 역시 웃고 있었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목에 걸린 율리아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
수렵제에서 엘리사가 폭로한 임신 소식은 며칠 새 온 제도에 퍼졌다.
크리스티안은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영식들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형체 없는 말은 아무리 막아 봐도 새어 나가 결국 제도의 모든 이들이 소식을 알게 되었다.
물론 황실에서도.
그러잖아도 황실에서는 결혼한 지 4년이 된 황태자와 황태자비 사이에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황제는 엘리사의 임신 소식이 못마땅했다.
물론 크리스티안은 아직 젊지만, 비슷한 나이인 루벨린 공작이 먼저 후사를 보았으니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터였다.
엘리사의 소식을 들은 황제와 황후는 황태자 내외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크리스티안과 로제는 평소보다 심기가 불편한 부황과 모후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앞에 섰다.
황제는 잔뜩 굳은 표정을 한 채 아들 내외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애먼 의자 팔걸이만 두드렸다.
탁. 탁. 탁…….
그 소리가 크리스티안과 로제의 불안 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한참을 말없이 언짢은 표정만 짓고 있던 황제가 마침내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두 사람, 합방은 하고 있는 것이냐.”
“달에 한 번씩은…… 하고 있습니다.”
“고작 한 번?”
로제의 대답에 황제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제 옆의 황후를 보았다.
황실 내부의 일은 모두 황후의 소관이었다.
그의 눈빛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냐며 황후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에 위기감을 느낀 황후는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아들 내외를 질책했다.
“그래서야 어느 세월에 후사를 볼것이야? 벌써 결혼한 지 4년이 넘었거늘! 누구는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애부터 만들었는데.”
황후의 질책에 로제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와 황후가 표면적으로는 크리스티안과 자신 둘 다 질책하고 있었지만, 내심 자신만을 탓하고 있으리란 걸 알았다.
억울했다. 합방을 거부하며 밖으로 나도는 건 자신이 아니라 크리스티안이었다.
하지만 로제로선 황후나 크리스티안에게 화살을 돌릴 순 없으니, 자연히 원망의 화살은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엘리사, 그 계집애만 아니었어도..
엘리사는 어릴 때도 제 심기를 건드리더니, 자라서도 사사건건 거슬렸다. 눈엣가시처럼.
그때 황제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