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크리스티안, 네 아이를 밴 계집은 없었느냐?”
갑작스러운 부황의 질문에 크리스티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저도 잘….”
황제의 질문에서 그의 의도를 단박에 간파한 황후와 로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크리스티안의 사생아를 찾아 황궁으로 데려오려는 것이다.
황제는 근처에 있던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시종장. 사람을 풀어 황가의 핏줄이 이어진 아이를 찾아봐라.”
“예, 폐하.”
그의 명에 황후는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안 됩니다. 폐하! 어찌 근본도 없는 천한 피가 섞인 아이를 황궁에 들이실 수 있습니까?”
“황궁에 들인다고 해서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은 아니오.”
“하면……?”
“잠깐의 대용품 정도로는 쓸 수 있겠지. 그리고 황궁에 있으면 적자가 태어났을 때 처리하기도 쉬울 터.”
황제의 말을 듣던 황후는 언제 그의 뜻에 반기를 들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요. 역시 폐하께선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 혜안을 가지셨습니다.”
“하면 그리 알고,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오늘부터 후사 생산에 더욱 힘쓰도록 해라.”
“………예, 폐하.”
황제와 황후에게 저녁 인사를 올리고 크리스티안과 함께 접견실을 나온 로제는 입술을 짓씹었다.
황후는 황제가 내놓은 방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지만, 로제는 아니었다.
비록 임시방편이라 해도,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 뿌리 모를 아이가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은 후사를 낳지 못한 황태자비로서 알게 모르게 멸시를 받을 터였다.
이미 지금도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정부를 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엘리사, 그 계집애가 있는 곳에선 더 나를 무시하겠지.’
로제는 이를 까드득 물었다.
엘리사와 비교당할 것을 생각하자 심기가 뒤틀렸다.
비단 후계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수렵제 때도 사업 이야기를 꺼내며 루벨린의 영향력을 과시했었지 않나.
‘난 황태자비야. 이 제국에서 황후 폐하 다음으로 가장 존귀하고 영향력 있는 여자는 나여야 한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로제는 조금 전, 황제의 말을 떠올리며 크리스티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전하, 오늘 밤에 바쁘지 않으시면…….”
“으음, 오늘은 좀 피곤해서 말이지.”
크리스티안은 로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돌아서 가 버렸다.
로제는 그런 크리스티안의 뒷모습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다 돌아서 침실로 향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만약, 정말 그이의 사생아가 있으면…….’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로제는 한 가지 방책을 떠올리고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이빨라졌다.
서둘러 방에 도착한 로제는 자신의 최측근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길드에 의뢰해. 홍등가를 뒤져 황가의 핏줄을 이은 아이들을 찾으라고, 황제보다 먼저 찾아야 해.”
“찾으면 어찌할까요?”
“처리해. 아무도 모르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로제의 눈빛이 자신만만하게 빛났다.
*
엘리사가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엘리사는 한 번 더 신전에 찾아와 아이들에게 하절기 옷을 전해 주고 갔다.
에이든이 간식을 나눠 주는 걸 막지 않자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내심 엘리사의 방문이 반가운 눈치였다.
기부뿐만 아니라 직접 찾아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도 들어 주니, 그 상냥함에 아이들이 넘어간 것이다.
에이든도 아이들의 마음이 엘리사에게 기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오늘도 공작 부인이 오는 날이었던가.’
며칠 전, 엘리사가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에이든은 그 기억을 되짚으며 날짜를 살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하,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에이든은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나 흠칫 놀랐다.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엘리사에 대한 생각을 이내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막 동쪽 예배당 쪽에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예배당 앞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든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예쁜 언니가 오늘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예쁜 언니란 말에 에이든은 그게 누구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한 박자 늦게야 그 ‘예쁜 언니가 엘리사라는 걸 깨달았다.
그 예쁜 언니가 단순히 ‘언니가 아니라 ‘공작 부인’이라고 정정해 주려다 그냥 두었다.
아이들에겐 그만큼 엘리사가 친숙하게 느껴졌다는 뜻이고, 엘리사가 그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건 그녀 역시 그것이 편하다는 뜻일 테니.
그때, 에이든을 바라보던 아이 하나가 불쑥 물었다.
“성하께서도 언니를 기다리러 오신 거예요?”
그 물음에 에이든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흠칫했다.
그런 그의 곁에 있던 신관이 그럴 리가 있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성하께선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 이셨단다.”
“아, 그러셨구나.”
“공작 부인을 뵙게 되면 감사하다고 꼭 인사하렴.”
“네에!”
에이든은 아이들을 뒤로한 채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때, 신관 하나가 아이들에게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얘들아, 오늘은 공작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못 오신다는구나.”
“헉! 진짜요?”
“언니 많이 아프대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몸이 좀 안좋으시대.”
예배당으로 향하던 에이든은 신관의 말을 듣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단순히 바쁜 일이 있어 못 오게 된 것인데,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가 애매하니 아프다는 이유를 붙인 걸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엘리사의 소식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일주일 전, 신관이 엘리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유, 홑몸도 아니라 힘드실 텐데 번번이 귀한 걸음을 해 주시다니.’
엘리사가 며칠 간격으로 신전에 찾아오는 건 저를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제게 환심을 얻어 원하는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은 그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어쩌면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시기에 본의 아니게 자주 외출을 행하는 바람에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하? 왜 그러십니까?”
굳은 표정으로 멈춰 있는 에이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신관이 그를 불렀다.
평소 그 어떤 일에도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던 에이든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불안했다.
그런 신관의 기색을 읽어 낸 에이 든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죠.”
*
황제의 탄신일과 건국제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을 앞둔 시점, 황궁의회의실에서는 귀족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회의를 했다.
그 회의의 중심에는 제국 유일 공작가의 수장이자, 귀족회의 수장인 리하르트가 있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리하르트의 선언에 황제파 귀족들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그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리하르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그를 주시하던 안셀은 그를 따라 일어나 회의장을 나왔다.
리하르트는 이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멀어져 복도 끝에 있었다. 안셀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황궁 건물을 빠져나온 리하르트는 대기 중인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에 올랐다.
안셀은 그와 일정 간격을 두고 건물을 나와 아르덴 백작가의 마차에 탔다. 그리고 마부에게 지시했다.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를 쫓아.”
“예, 각하.”
마부는 안셀의 지시대로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를 쫓았다.
마차는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를 따라 신전이 있는 빈민촌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신전에 가는 건가.’
안셀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갑자기 마부가 신전과는 반대 방향으로 마차를 틀었다.
그에 의아해하는데, 마차가 멈췄다.
곧이어 마부석에서 마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공작 각하께서 마차에서 내리셨습니다.”
안셀은 마차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았다.
마부의 말대로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가 골목길 앞에 멈춰 있었고, 마차에서 리하르트가 막 내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골목길 안으로 향했다.
‘어딜 가는 거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셀은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리하르트가 들어간 골목길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골목길로 들어섰다.
리하르트가 있는 쪽을 보자, 저 멀리 멀어지고 있는 리하르트의 옷자락이 보였다.
안셀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쫓아 골목길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모서리를 돌자,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놓쳤나?’
안셀은 미간을 구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찾고 있나?”
그의 머리 위에서.
안셀은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허공에 떠서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리하르트가 있었다.
“아르덴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