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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60화 (60/164)

60화

“그래서 그 할 이야기’ 라는 게 뭐지?”

안셀과 함께 아르덴 백작저로 온 리하르트는 차를 가져온 집사가 나가자마자 본론부터 물었다.

안셀과 조금도 무의미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애초에 안셀이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으면 백작저까지 발걸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셀은 그런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굉장히 불쾌하고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쭙고 싶습니다.”

리하르트는 적당히 식은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며 안셀을 쳐다보았다.

“엘리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안셀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물음에, 차를 마시려던 리하르트의 동작이 멈칫했다. 동시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쾌하고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 굳이 그런 질문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군.”

안셀은 리하르트의 말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부터 설명했다.

“제가 각하를 미행한 건, 각하께서 이 진실을 알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실?”

“예전 로엔그린 자작가의 별장이 소르네티에 있다는 사실,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리하르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소르네티는 엘리사가 자신과 이혼을 하고 정착할 후보 중 가장 유력한 곳이라 미리 조사해 두었으니까.

“엘리사는 제게 그 별장을 구입하고 보수를 해 주길 부탁했습니다.

각하와 이혼한 후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요.”

‘이혼’이라는 단어에 리하르트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 단어만으로도 엘리사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안셀은 그것이 본론이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엘리사의 부탁대로 그 별장을 구입했고, 보수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었죠.”

“…….”

“그런데 별장 앞에서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소르네티에서 한평생을 의사로 살았다고 하더군요.”

“……..”

“그 노인은 엘리사의 주치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셀은 잠시 말끝을 흐리다, 말을 이었다.

“엘리사가 폐병으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이미 8년 전에.”

서늘한 표정으로 잠자코 안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고작 노망난 노인네의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부른 건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별장회랑의 초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안셀은 소르네티의 별장에서 보았던 초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초상화 속 소녀는 제가 아는 열두 살의 엘리사가 아니었습니다.”

액자를 덮고 있던 벨벳 천을 걷어 내자, 빛바랜 그림 속 금발과 녹안을 가진 소녀가 보였다.

자라면서 얼굴이 조금씩 변한다고는 하지만, 초상화 속 소녀는 머리 색과 눈 색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진짜 ‘엘리사 로엔그린’은 그 초상화 속 소녀였다.

‘그럼 내가 아는 엘리사는 누구지.…?’

안셀은 그림 속 낯선 소녀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리하르트 역시 같은 표정으로 안셀을 보고 있었다.

…그럼, 엘리사의 친가에 대해서는 더 알아봤나?”

“아뇨. 더 파헤치진 않았습니다. 거기까지 알 권리는 제게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제도에 돌아오자마자 엘리사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하께 말씀드리는 거고요.”

“현명하군.”

리하르트는 잠시 혼란스럽던 마음을 갈무리하고 담담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셀은 그런 리하르트를 의외라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진실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시는군요.”

“내가 왜 흔들려야 하지?”

안셀의 말에 리하르트는 여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엘리사가 그 어떤 이름을 가졌든, 그녀가 내 소중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 진실이 엘리사와 그의 사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듯이.

대화를 마친 리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안셀을 지나치려다, 문득 무언가 할 말이 생각난 듯 안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엘리사를 위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좀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나? 딱히 나를 신뢰하지는 않는 듯한데.”

“각하께서 이 진실 앞에서 흔들리 시길 바랐으니까요.”

안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물론 엘리사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요.”

리하르트는 그제야 안셀이 왜 제게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아챘다.

그는 자신이 엘리사의 불분명한 신분을 알고 그녀와 이혼하길 바랐던 것이다.

자신과 이혼한 엘리사를 데려가기 위해서.

그녀의 배 속에 제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알면서도.

막연히 경계하던 안셀이 엘리사에게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리하르트의 눈빛이 싸늘히 침잠했다.

리하르트는 살기 어린 눈으로 안셀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 경고했다.

“그 욕심, 엘리사 앞에선 드러내지 않길 바라지.”

안셀은 리하르트의 살기 어린 눈빛에 순간적으로 흠칫했으나,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리하르트는 그런 안셀을 뒤로한 채 곧장 접견실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안셀은 닫힌 접견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 그리고 어릴 적 잠깐 이나마 본 리하르트의 모습으로 그가 엘리사를 쉽게 저버릴 사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매사에 무심한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이야기에만 저렇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 안도하는 한편으로, 씁쓸했다.

결국 제겐 기회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래도 다행인가.”

안셀은 씁쓸하게 웃으며 남은 차를 비웠다.

*

“다녀오셨습니까, 각하.”

리하르트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는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이른 저녁이었다.

리하르트는 그레이슨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톰슨이 다가왔다.

“오늘은 좀 늦게 오셨네요.”

“중간에 일이 좀 있어서. 신전에선 별일 없었나?”

“아, 오늘은 마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신전에 가지 않았습니다.”

평소 일과를 묻듯 가볍게 물었던 리하르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여상하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몸이 안 좋다고? 어디가?”

“두통이 좀 있다고 하셨습니다.”

리하르트의 추궁에 그레이슨이 대신 대답했다.

“주치의는 뭐라고 하던가?”

“원래 임신 중에 두통을 느끼는 사람이 꽤 많다고, 푹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리하르트는 곧장 엘리사의 방으로 왔다.

그레이슨의 말대로 엘리사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의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러자 그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자고 있던 엘리사가 눈을 떴다.

“…리하르트?”

“미안, 깨워서.”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아직 무거운 눈을 비비며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엘리사가 물었다.

그 물음에 리하르트는 흠칫했다.

아르덴 백작저에서 나온 이후, 여러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모르던 것을, 엘리사는 잠결에도 단박에 눈치채고 물어왔다.

리하르트는 다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언젠가 엘리사도 알게 될 일이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문제를 그녀에게 알려 충격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알리기 전에 확실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리하르트는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오늘 두통 때문에 신전에 못 갔다며.”

“지금은 괜찮아.”

엘리사는 새어 나오는 하품을 막으며 대답했다.

그런 엘리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손으로 엘리사의 눈을 부드럽게 덮었다.

“좀 더 자. 식사 준비되면 깨울게.”

“으응….….”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대답한 엘리사는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리하르트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색색, 규칙적인 엘리사의 숨소리를 듣자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 차분해졌다.

‘네가, 엘리사 로엔그린이 아니라고.’

엘리사는 마차 사고 이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진찰한 의사는 사고의 충격으로 단기적인 기억 상실일 것이라고 했지만, 엘리사의 기억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기억을 잃었다는 엘리 사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분을 속이고 자신과 결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알버트부터 호락호락하게 속지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엘리사의 진짜 신분을 알 만한 사람은……….’

그녀를 공작저에 데려온 사람.

‘알버트 루벨린.’

그의 조부밖에 없었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달갑지 않은 그 이름을 떠올리고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망자에게 진실을 물을 순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하르트는 그가 은폐한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리하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톰슨을 찾았다.

“네가 찾아 줘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굽니까?”

“애런 클로르.”

톰슨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익숙한 이름에 의아한 듯 눈을 끔뻑였다.

애런 클로르는 알버트의 보좌관이었던 남자였다.

그는 알버트의 장례식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루벨린을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그를 찾아오라니.

리하르트는 톰슨에게 명령했다.

“그를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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