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61화 (61/164)

61화

#8. 부부가 된다는 건

리하르트가 황궁에 간 시간.

엘리사는 눈앞에 놓인 먹음직한 음식들을 보았다.

갓 구운 빵, 먹음직하게 익힌 고기, 크림소스를 곁들인 생선 요리 등 그간 엘리사가 입덧으로 먹지 못했던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며칠 새 입덧 증상이 많이 호전되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리하르트가 셰프에게 평소 엘리사가 좋아하던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

하지만 엘리사는 그 음식들을 멍하니 보기만 할 뿐, 선뜻 식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근래에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 때문이었다.

‘입술….’

얼마 전, 리하르트가 제게 동화책을 읽어 줬던 그날부터 자꾸만 그의 입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말캉하던 감촉.

아찔하게 얽히던 뜨거운 숨결……….

거기에 잘생긴 얼굴까지 시너지를 더해 엘리사의 음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그의 몸까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넓게 벌어진 가슴과 그 아래로 탄탄한 복근이 자리 잡은 배, 움직일 때마다 선명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팔 근육과 단단한 허벅지까지.

셔츠 사이로, 혹은 셔츠 너머로 언뜻 두드러지는 그의 몸을 볼 때마다 그와 보냈던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오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덩달아 심장도 멋대로 두근거렸다.

‘자꾸 이러니까 내가 꼭 리하르트를….’

무심코 생각하던 엘리사는 제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엘리사는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가득한 그를 음식으로 눌러 내리듯 먹기 시작했다.

“많이 드세요, 마님.”

엘리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앤은 엘리사가 잘 먹는 걸 보고 기뻐하며 다른 음식들을 가까이 가져다 날랐다.

“임신을 하면 입맛도 바뀌나 봐요.

전엔 잘 안 드시던 음식도 드시고.”

흐뭇해하며 말하는 앤의 말에 엘리 사는 멈칫했다.

‘임신해서 입맛이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임신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평소엔 전혀 울 일이 아닌데도 눈물이 났고, 낮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닌데도 요즘은 하루 일과처럼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엘리사는 앤의 말에서 최근 리하르트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던 이유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럼 이것도 임신 호르몬의 영향인 건가?’

식사 내내 곰곰이 고민하던 엘리사는 식사를 마친 후, 곧장 침실로 돌아와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엔 엘리사가 요즘 틈틈이 읽고 있는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책이 놓여 있었다.

엘리사는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다가,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

[대부분의 여성은 임신 이후 성욕이 떨어지지만 간혹 없던 성욕이 치솟기도 한다. 이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성욕이 있던 사람을 성욕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반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럼 리하르트에게 느낀 건 성욕이었구나!’ 엘리사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밑에 추가로 붙은 설명을 읽었다.

[엄마와 아빠가 행복해하면 배 속의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즐거운 부부 생활을 하는 것도 힘든 임신 시기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다.]

그 구절을 읽은 엘리사는 끄응, 한숨을 삼켰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지……….’

단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술을 훔치고 싶고 그에게 닿고 싶었다.

오죽하면 그와 키스를 하고, 서로 뜨거운 체온을 나누는 꿈을 꿀 정도였다.

‘이대로는 내가 애가 닳아 죽겠어.

내가 스트레스 받으면 아기한테도 좋지 않다고.’

이미 결혼까지 한 사이에, 아이까지 만든 사이에, 함께 밤을 보낸다고 한들 문제가 될 건 없지 않나.

하지만 야속하게도, 리하르트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하물며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는 것조차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저 바보를 어떻게 구워삶지?’

엘리사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편지가 왔어요.”

“들어와.”

방으로 들어온 앤은 엘리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편지들을 내려놓았다.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책 보시면서 드실 만한 차를 내올게요.”

앤은 조용히 다시 침실을 나갔다.

잠시 더 책을 정독하던 엘리사는 책을 덮고 눈앞의 편지들로 관심을 돌렸다.

편지 세 개 중 두 개는 티 파티 초대장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카탈 로그였다.

여름을 상징하듯 청량한 연하늘색으로 꾸민 카탈로그는 엘리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엘리사는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다.

최근 엘리사가 드레스를 주문 제작했던 부티크에서 보내온 카탈로그였다.

[아네스 부티크 여름 신상 최초 공개!]

별생각 없이 카탈로그를 구경하던 엘리사는 한 페이지에서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이거라면…

카탈로그를 살펴보는 엘리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드리웠다.

*

“그럼 또 찾아 주십시오, 부인.”

“살펴 가십시오!”

그날 오후, 엘리사는 아네스 부티크 사장과 전 직원들에게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

엘리사의 뒤를 따르는 앤의 품엔 엘리사가 원하던 물건이 든 벨벳 상자가 들려 있었다.

가게 앞에서 대기 중이던 루벨린의 기사들은 엘리사에게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마부는 마차에 탄 엘리사에게 물었다.

“곧장 공작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습관적으로 그러자고 대답하려던 엘리사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니, 잠깐 서점에 들렀다 가요.”

루벨린 공작가의 도서관에 웬만한 책들은 다 있었지만, 그 책들은 대부분 공작가에서 사들인 새 책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발간되지 않는 구간이나 소규모로 유통되는 민간전승정보가 담긴 책들은 오직 서점에만 팔았다.

또한 광장에 있는 서점에서는 헌책도 같이 팔았는데, 그 책들에서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이 남겨 놓은 메모 같은 것을 찾아보는 것 또한 묘미였다.

엘리사는 간만에 책 구경을 하고자 서점을 찾았다.

마차는 그녀의 뜻에 따라 광장의상점가 쪽으로 향했다.

엘리사는 익숙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활기찬 상점가의 사람들과 분주히 오가는 행인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

그때, 익숙한 풍경 속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황궁의 기사들?’

황가의 문양이 그려진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들의 등장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알아챘다.

일반적으로 광장의 치안을 순찰하는 건 병사들의 일이었다.

기사들이 광장의 치안에 신경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렇게 우르르 다니는 경우는 더욱더.

‘저들이 왜 광장에 있지?’

엘리사가 그에 의문을 가지던 찰나, 마부석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마님.”

엘리사는 스치듯 들었던 의문을 뒤 로한 채 앤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광장 상점가 구석에 위치한 서점은 작고 아담했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딸랑 -

하지만 서점 계산대에 아무도 없었다.

대신 서점 안쪽에서 주인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지금 좀 바쁘니까 찬찬히 살펴보고 계쇼!”

뒤이어 사다리가 덜컥거리는 소리, 먼지가 일어나 기침하는 소리 등 조용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엘리사는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쪽 책장을 훑어보기로 했다.

그때, 발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응?’

엘리사가 흠칫 놀라 아래를 내려다 보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모를 붉은 머리의 남자아이가 보였다.

기껏해야 네다섯 살로 보이는 아이는 군데군데 구멍이 난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적금색 눈동자만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엘리사를 빤히 쳐다보더니,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어 옷 안에 집어넣고 총총히 책장 사이를 나갔다.

너무도 당당하고 뻔뻔한 도둑질에 당황하여 눈만 깜빡거리던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성큼 다가가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그거 이리 줄래?”

하지만 아이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훔친 책을 꼭 끌어안고 못마땅한 눈으로 엘리사를 쏘아보았다.

그러다 그대로 엘리사를 지나쳐 가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시도였다.

엘리사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아가, 도둑질은 나쁜 거야. 돈 안내고 남의 물건을 가져가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널 잡으러 올걸?”

마침 저쪽 책장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엘리사는 다급히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주인이 아이의 도둑질을 알면 일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아이참, 바빠 죽겠는데 손님이 자꾸 오….”

서점 주인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리며 계산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엘리사의 값비싼 옷과 장신구들을 보고는 황급히 안색을 바꿨다.

“………시면 제가 너무 감사하지요.

어서 오십시오, 부인. 어떤 책을 사러 오셨습니까?”

“딱히 찾는 책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좀 둘러보려고요.”

“아하. 그럼 제가 추천해 드립지요.

어디 보자, 아리따운 부인들께서 즐겨 찾으시는 서정시집이…….”

시집을 찾으려 책장으로 다가서던 주인은 그제야 발치에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옷 안에 평평하게 책을 감추고 있는 아이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곧이어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도둑놈 새끼가!”

주인이 아이의 뺨을 내리치려는 순간, 엘리사가 다급히 아이를 품에 안았다.

계산된 행동이라기보다는, 이 작은 아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