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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62화 (62/164)

62화

주인의 손이 멈추지 못하고 엘리사에게로 향하려는 찰나,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루벨린의 기사가 재빨리 다가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경솔하게 굴지 마라.”

그제야 기사의 제복 팔에 새겨진 문장을 본 주인은 흠칫 놀랐다.

루벨린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그것을 보자, 다혈질적인 주인의 기세가 급격히 누그러들었다.

그는 머쓱해하며 황급히 손을 내렸다.

“아이고, 워낙에 이런 도둑놈 새끼들이 많다 보니 순간적으로 욱해서 그만……. 부인께 추태를 보여 드리고 말았네요. 송구합니다요.”

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싹싹 비비며 엘리사에게 굽실거렸다.

하지만 엘리사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하지만 이런 녀석은 감싸 주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호의를 베푸시면 다음에도 또 그런다니까요. 호되게 혼내고 쫓아내야 합니다.”

아이는 품에 안겨서도 서점 주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몸을 웅크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것을 눈치챈 엘리사는 주인에게서 아이를 보호하듯 다부지게 감싸안았다.

“이 책, 내가 살게요. 얼마죠?”

“어허, 이거 참……. 이 녀석이 이 일을 계기로 다음에도 또 이런다면 제 쪽에 손해가 발생합니다, 부인.”

주인은 굽실거리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탐욕으로 희번덕거렸다.

귀족들은 큰 금액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필요 이상의 큰 금액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곤 했다.

주인은 이 기회에 목돈을 뜯어내려는 심산이었다.

‘워낙에 돈이 많은 가문이니, 귀찮은 일에 입씨름하느니 돈 좀 더 쥐여 주고 치우겠지.’

저 정도로 부유한 가문이면 과연 얼마나 줄까.

돈 생각에 군침을 삼키고 있는데, 엘리사의 입에선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손해라………. 오히려 이득 아닌가요?”

“예?”

“주인장은 저기 뒤쪽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잖아요. 내가 이 아이를 붙잡지 않았으면 책 한 권을 그냥 날리는 거 아닌가?”

“그, 그건 그렇지만……….”

“만약 이 아이가 오늘 도둑질에 성공했으면, 다음번에도 또 도둑질에 성공해서 책을 여러 권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고.”

자신이 가게 관리에 부주의해서 벌어진 일을, 은근슬쩍 엘리사에게 돌려 한탕 뜯어내려는 그의 행태를 꼬집는 말이었다.

엘리사가 흔쾌히 돈을 좀 더 내어주고 마무리할 것이라 생각했던 주인은 예리한 지적에 당황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드,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부인께서 저를 도와주신 게 되는군요!”

“이 아이는 내가 훈육할 테니 계산해 줘요.”

“부인께서는 아리따운 외양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우십니다.”

엘리사는 주인의 아부를 듣는 둥마는 둥 무시하고 앤에게 눈짓했다.

앤은 금화가 든 주머니를 들고 계산대로 다가갔다.

주인은 못내 아쉬운 기색을 비치며 정확히 책값만 받았다.

“그럼 살펴 가시고 또 찾아 주십시오, 부인.”

엘리사는 굽실거리는 주인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이를 데리고 서점을 나왔다.

아이는 서점을 나서자마자 책을 들고 그대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기사가 재빨리 붙잡았다.

“요 녀석이, 어딜.”

엘리사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앉아 물었다.

“책 가져오라고 누가 시켰어?”

아이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책을 가지고 나가려 했다.

기껏해야 네다섯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스스로 도둑질을 생각했을 리 없다.

분명 누군가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켰으리라.

책은 귀족들에겐 비싼 물건이 아니었지만, 가난한 평민들에겐 한 달은 족히 일해야 버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고가품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꼬르륵 -

대신 아이의 배가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저가 뭘 잘못한지도 모른 채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적금안을 마주 보던 엘리사는 앤에게 말했다.

“앤, 근처 베이커리에 가서 빵 좀 사다 줄래?”

“네.”

베이커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앤은 부드럽고 먹기 좋은 빵과 우유를 사 왔다.

“자, 먹으렴.”

엘리사는 아이에게 빵 하나를 건넸다.

아이는 배가 고팠던지, 좀 전의 경계심은 오간 데 없이 지운 채 빵을 덥석 받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어린 게 얼마나 굶었으면.

며칠 굶은 듯한 그 모습이 엘리사의 눈에 안쓰럽게 보였다.

엘리사는 아직 봉투에 담겨 있는 빵을 아이의 눈앞에 보이며 대화를 시도했다.

“아가, 너 이름이 뭐야?”

오물오물 빵을 먹던 아이는 엘리사의 손에 들린 남은 빵을 보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온.”

그 이름을 들은 엘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리온 카이로트.

하네스와 대립한 연적의 이름이자, 이 소설 『버드 케이지」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었다.

그와 동시에 서점으로 오는 길에 광장에서 보았던 황실의 기사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리온이 어릴 때 로제가 보낸 용병들에게 쫓겼다는 내용이 원작에 나왔었어.’

남자 주인공의 불우한 과거는 거의 모든 로판 소설의 필수 설정이다.

리온의 불우한 과거는 특히 그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겼기에 더욱 상세히 다뤄졌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용병들에게 쫓기던 리온은 막다른 상황에 다다르자, 능력이 발현되었는데 제어하지 못해 주변 마을 하나를 태워 버렸지.’

그 덕분에 가문의 능력을 발견한 황실에서는 리온을 데려가고, 리온을 죽이려던 로제는 계획에 실패한다.

하지만 낯선 황궁에 홀로 고립된 리온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사방에서 뻗쳐 오는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다 인간성이 결여된 황태자로 자라난다.

그 외로운 유년 시절을 떠올리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리하르트도 그랬었지…….”

리하르트 역시 어려서부터 알버트에게 살해의 위협을 받았고, 살아남기 위해 길드에 들어가 험한 일을 하며 자랐다고 했다.

그의 유년 시절이 눈앞의 아이와 겹쳐 보였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

“대답 잘했으니까 이것도 줄게.”

엘리사는 들고 있던 빵 봉투를 리온에게 건넸다. 대답의 대가였다.

아이는 빵을 건네받자마자 허겁지 겁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아이가 혹여나 놀라 체하지 않도록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리온을 놓고 갈 순 없어.’

이 시기엔 리온의 친모가 죽어 리온은 길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리온을 보내 주면 원작에서처럼 로제의 용병들에게 쫓기다 마을 하나를 태워 버릴 것이다.

리온을 위해서도,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내버려 둘순 없었다.

”하지만 공작저에 데려갈 순 없는 데…….’

데려가서 이 아이가 누구인지 왜 키워야 하는지 납득시킬 명분도 없고, 무엇보다 황실에서 알게 된다면 이쪽이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리온을 다른 지역으로 보낼 수도 없고.’

원작이 시작되는 곳은 제도인 아카로아였다. 남자 주인공인 리온이 아카로아를 벗어나면 어떤 변수가 될지 몰랐다.

‘으음, 어쩌지……. 아!’

미래를 바꿀 방법을 고민하던 엘리 사의 머릿속에, 적합한 장소 한 곳이 생각났다.

아카로아를 떠나지 않으면서 용병들을 피할 수 있는 곳.

아무리 황제라도 침공할 수 없도록 제국법으로 정해진 성역.

그리고 리온의 힘을 제어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단 한 사람.

엘리사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온, 나랑 같이 갈래?”

그러자 리온은 다시 경계심 어린 눈을 하고 슬금슬금 물러서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 안댄다구 했눈데……….”

아직 마냥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나이에, 경계심을 품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운 동시에 기특했다.

‘크리스티안한테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태어나다니. 기적이네.’

엘리사는 똘망똘망한 아이의 눈을 흔흔한 눈으로 마주 보다가, 아이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똑똑하네, 리온.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우리 엄마 아라?”

“그럼. 난 리온의 엄마랑 친구였거든. 엄마 이름이 세이라 맞지?”

당연히 엘리사는 세이라를 만난 적이 없지만, 남주의 엄마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원작을 읽은 엘리사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지짜 엄마 친구야……?”

예상대로 리온은 엄마의 이름에 눈에 띄게 경계를 풀었다.

엘리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이에게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응. 그래서 리온을 좋은 곳에 데려다주려고 해. 거기 가면 나쁜 심부름도 안 해도 되고, 깨끗한 옷도 주고, 맛있는 식사도 줄 거야.”

“우웅.”

“나랑 같이 갈래?”

리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엘리사의 얼굴과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와 닮지 않았지만, 어쩐지 엘리사의 얼굴에서 엄마란 존재에 느꼈던 그리움이 풍겼다.

리온은 엘리사의 손 위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그 모습에 엘리사는 활짝 웃으며 리온을 가볍게 안았다.

“잘 생각했어, 리온.”

엘리사에게 안긴 리온은 얼떨떨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가 죽은 이후, 누군가에게 안겨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간 만났던 어른들은 전부 리온에게 욕하거나, 때리려고 위협하기만 했으니까.

간만에 느끼는 타인의 온기는 포근했다. 절로 히죽 웃음이 나올 정도로,리온은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선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좋은 향기가 났다.

“서트 경, 이 아이를 마차에 태워 줘요.”

엘리사는 옆에 있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부와 루벨린의 기사들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신전에 들렀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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